독립신문과 서재필

한국 신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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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은 급진 개화파 서재필이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돌아와서 창간한 신문이다. 서재필은 신문을 통해서 정치개혁과 구습 타파를 외치면서 국민을 계도했고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국가 홍보를 담당했다. 한글 전용과 구독료를 싸게 책정하여 신문의 대중화를 촉진하면서 정부의 잘못과 관리들의 무능 부패를 비판하고 외세 침탈에 저항하는 언론의 전통을 세우는 기초를 닦았다.

1. 독립신문의 역사적 의미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1864~1951)
ⓒ 커뮤니케이션북스

《독립신문》(1896. 4. 7~1899. 12. 4)은 개화운동의 선각자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독립신문》에 앞서 1883년 10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를 발행한 일이 있었다. 정부에서 발행했지만 순보와 주보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민간인이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며, 내용과 운영방식에서 순보·주보와 확연한 차이를 나타낸다.

《독립신문》은 한국 언론의 정신사적인 원류다. 독립신문의 비판 기능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정신은 한국 언론의 전통으로 이어 내려오게 되었으며, 언론의 정신사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서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의 비정(秕政)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했으며, 민간인의 잘못도 서슴지 않고 지적했다. 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페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부패 무능한 정부 관리들을 비판하는 한편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열강 세력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했다.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정부가 직접 발행한 신문이므로 논평과 비판 기능이 없었다.

2. 한글 전용과 영문판 발행

《독립신문》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고 알려주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인 전제군주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로서는 처음으로 깨닫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독자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과 기사를 통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열강 여러 나라들이 국가의 이권을 탈취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저항하여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도록 했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누구나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한글 전용의 신문을 제작하여 한글을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격상시켰으며, 그 후에 창간되는 한말의 다른 민간 신문이 한글을 사용하게 된 것도 독립신문의 선구적인 한글 전용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의 교보원(校補員 : 오늘의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이었던 주시경은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 :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어 국어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이 신문은 정부와 국민들이 한글을 공용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립신문》은 구독료를 싸게 하여 상하귀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면서 한글판은 동전 2푼(2전), 월 25전, 연 2원 60전을 받는 반면에, 영문판은 1장당 동전 5푼(5전), 월 75전, 연 6원으로 올렸다. 영문판의 구독료를 한글판보다 2배 이상 3배씩이나 비싸게 책정한 것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한국인들에게 신문 구독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어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독립신문》은 광고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한성주보》에는 몇 건의 광고가 등장했으나 광고료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독립신문》은 광고를 게재하여 신문 경영에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아서 신문이 독립 사업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창간되는 민간 신문에서 이와 같은 경영방법을 채택했다. 독립신문 이후에 여러 민간 신문이 나타나게 된 것도 구독료와 광고료만으로 외부의 보조 없이 신문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기 때문이었다.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당시의 한국 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의사와 주장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신문》은 그 이후에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민간 신문의 모델이 되었다. 1898년에 창간된 《매일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과 같은 한말의 대표적 민족지는 《독립신문》이 창간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여론 형성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보고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언론계가 형성된 것은 《독립신문》의 선도적인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3. 서재필의 경력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 1864. 1. 7~1951. 1. 5)은 1864년 1월 7일(양력)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7세쯤에는 서울로 올라와 서당에서 공부했는데 1882년 음력 3월에 실시된 과거(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를 배운 뒤 같은 해 11월경에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들어가 신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서재필이 일본에 체류하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한성순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서재필은 1884년 7월 말에 귀국하여 사관장(士官長)에 임명되었다. 약 5개월 후인 그 해 12월 4일에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서재필도 가담했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모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곧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신정변 후에 그의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 당하거나 음독자살했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서재필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미국에서 영어를 배워가며 자력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 워싱턴에 있는 콜롬비안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 : 현 조지 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1893년 6월 무렵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1894년 6월에는 미국 철도 우편사업의 창설자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mstrong)의 딸과 결혼했다.

서재필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국내 정세는 바뀌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경장으로 친일내각이 성립되면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망명객들에게도 사면령이 내린 것이다. 갑신정변의 동지로 함께 망명의 길에 올랐던 박영효와 서광범은 망명지에서 귀국하여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서재필에게도 귀국의 길이 열렸다.

4. 서재필의 귀국과 신문 발행

서재필은 1895년 12월 말 미국에서 돌아왔다. 귀국 직후 월봉 300원의 보수를 받는 조건으로 조선 정부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서재필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독립신문》의 발행이었다. 그는 또한 독립협회의 창립과 그 운영, 독립문 건립 그리고 배재학당 강의 등에도 정열적으로 헌신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동기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갑신정변 때와 달리 개화사상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으나 국민들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 그러므로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의 이목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며 국민의 교육을 위해서는 신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재필이 귀국 직후에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정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생활을 보장하고 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자금도 지원했다. 정부는 서재필에게 신문사 설립자금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 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지급해 주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독립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모두 4400원을 지급 받았으며, 이와는 별도로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매월 300원의 급료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정부의 전적인 지원에 힘입어 신문 발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5. 추방과 독립신문 폐간

정부는 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제작과 경영에 관해서는 일체 간여하지를 못했다. 서재필은 어떤 사람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전적인 권한을 행사하여 신문을 제작했다. 그는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페이(밝히)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부패 무능한 정부 관리들을 비판하는 한편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열강 세력의 부당한 요구와 음모를 서슴지 않고 폭로했다. 또한 이 신문은 정치, 사회,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서 합리적인 개혁의 방안을 제시했다.

《독립신문》이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규탄하여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여론을 선도하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공사관과 수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일본도 이에 동조했다. 서재필의 태도에 대해 정부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리하여 1897년 12월 13일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에게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임을 통보하고, 이튿날인 12월 14일에는 농상공부에 조회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했으므로 《독립신문》도 폐간시키라고 요청했다. 서재필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서재필은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자신은 한국정부와 10년 기한으로 중추원 고문의 고빙(雇聘)계약을 체결했으므로 해임하겠다면 남은 기간의 봉급을 지불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서도 정부와 러시아 측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미국공사 알렌도 한국정부가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을 해임하는 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부당한 조치라고 항의하면서 서재필이 요구하는 대로 계약 만료까지 남은 기간의 봉급 전액을 일시불로 지급해 주어야 하며, 이 금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서재필이 한국에서 떠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알렌과 한국정부 간의 서재필 문제에 관한 교섭은 5개월이 지난 1898년 4월 26일에야 완전히 타결되어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독립신문》은 발행되었으나 1899년 12월 4일자로 정부가 미국에 있는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한 뒤 신문은 폐간되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때로부터 폐간까지 43개월 동안 발간된 총 호수는 한글판 776호, 영문판이 442호였다.

참고문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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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서재필, 인디펜던트, 신문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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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한국 신문 역사』. 개화의 문을 연 한성순보에서 대한제국 개혁의 선도자 독립신문, 항일...더보기

  • 저자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런던대학교 정경대학(School of Economics & Political Science-LSE)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 언론계에 입문하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을 지냈다. 198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학 교수,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언론중재위원, 방송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2004년 정년퇴임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다. 현재 장지연기념회, 서재필기념사업회 이사, 인촌기념회 운영위원, 한국신문협회 정책자문위원장, 국무총리 직속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이다.

    저서로 『한국현대언론사론』,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한국언론사』, 『언론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현대사』, 『한국영어신문사』, 『언론조선총독부』,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외에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언론관련 자료집, 문헌해제, 신문 · 잡지 색인을 만들었고, 한성순보-한성주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와 1945년 광복 후부터 1953년까지 발행된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의 지면 전체를 모은 영인본(전32권)을 편찬했다. 조선총독부 언론통제 자료총서(전21권) 조선총독부 직원록(1911~1942년, 전34권) 같은 자료도 발굴 영인하여 언론계와 역사학계의 자료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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