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8일, 서울 장충벌이 만원관중으로 물들었다. 2019~2020시즌 V-리그 여자부 3라운드 GS칼텍스-흥국생명 경기가 열렸던 장충체육관에 4,200여 명의 구름관중이 몰렸다. 주말이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많은 두 팀이 맞붙었다. 시너지 효과가 날만한 요소들이 결합되자 현실로 나타났다. 차상현 GS칼텍스 감독과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은 “여자배구가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배구인으로서 기분이 너무 좋다”며 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올 시즌 여자배구가 남자배구의 인기를 뛰어넘고 있다. 특히 과감한 정면 돌파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남자 팀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오후 7시 동시간에 여자부 경기를 펼쳤는데 시청률과 관중 수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복수의 프로배구 관계자들도 “이런 높은 인기는 어떻게 설명이 안 된다”며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왜 이렇게 여자배구에 팬은 열광하는 것일까. 거품일까. 발전을 위한 그린 라이트일까.
‘배구여제’ · ‘식빵언니’ 효과 프로스포츠협회 지원사격
여자배구 팬덤이 남자배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이 원동력이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배구여제’ 김연경 효과를 국내 프로배구가 톡톡히 누린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배구를 잘하는 여자선수가 한국선수인데다 ‘걸 크러시’ 매력을 뿜어내자 여기에 반한 여성 팬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무엇보다 여성 팬은 경기장에 동성 또는 남자친구를 대동하는 것이 기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중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후 김연경이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여자배구 인기가 계속 유지됐다.
여성 팬이 경기장에 몰려들자 자연스럽게 경기장 분위기가 한층 젊어졌다는 평가다. 그 동안 여자배구 팬층은 30대 후반 이상이 주축이었다. 고정 팬이 있었을 뿐 새로 유입되는 팬은 적었다. 그러나 A여자팀 관계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배구 팬층은 중장년층이었다. 하지만 최근 여자배구 팬층이 확실히 젊어졌다. 경기장에서 신선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젊은 세대들은 쉽게 기호가 변함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여주는 건 그만큼 여자배구가 어필하는 매력이 남다르다는 증거”라며 “구단도 달라진 팬층에 맞는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프로스포츠협회의 지원사격도 여자배구 인기를 끌어올리는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6개 여자배구단은 프로스포츠협회에서 연간 2~3억원의 분배금을 받는다. 샐러리캡(14억원) 등 구단 운영비가 30~40억원 수준인 실정에서 10%의 도움은 클 수밖에 없다. B여자팀 관계자는 “프로스포츠협회에서 주는 도움으로 마케팅의 질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경기장에 팬을 불러모으기 위해선 이런 마케팅 활동에도 힘을 쏟아야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자배구 전성시대’ 숫자가 말한다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차치하고 지표만 보면 여자배구는 그야말로 ‘전성시대’다. 시청률과 관중수 지표가 폭풍인기의 바로미터가 된다. 2018~2019시즌 수치와 비교해보면, 올 시즌 여자배구 인기가 얼마나 높아졌나를 실감할 수 있다. 우선 2라운드까지 시청률부터 알아보자. 2018~2019시즌 1~2라운드 평균 여자부 주중 시청률(0.76%)은 남자부(0.95%)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나 2019~2020시즌은 다르다. 1라운드는 물론 2라운드에서도 여자부 평균 시청률이 남자부보다 높았다. 특히 여자부는 1라운드 0.89%에서 2라운드 1.13%까지 치솟았다. 여자부 최고 시청률은 11월 24일 GS칼텍스-KGC인삼공사전에서 찍은 1.56%였다. 1~2라운드 최고 시청률도 남자부(11월 24일 현대캐피탈-OK저축은행전 1.37%)보다 높았다.
관중수에서도 여자부 지표가 남자부를 뒤집었다. 2018~2019시즌부터 모든 부문에서 여자부 수치가 남자부를 따라잡은 가운데 2019~2020시즌에는 남자부와의 격차를 더 벌려나가고 있다. 특히 올 시즌 1, 2라운드에서 희비가 극명히 갈렸다. 남자부 2라운드 평균 관중수는 2,098명이었다. 1라운드 평균 관중수(2,183명)보다 줄었다. 여자부도 1라운드(2,388명)보다 2라운드 평균 관중수(2,180명)는 줄었지만, 지난 시즌과 비교해 동일시기보다 평균 115명이 늘었다. 또 주중과 주말 평균 관중수에서도 여자부가 남자부를 압도한다는 걸 아래 표를 통해 알 수 있다.
안주해선 안된다
시청률과 관중수 수치를 살펴봐선 여자배구의 인기가 거품이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인기 고공행진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배구연맹(KOVO) 실무위원회 멤버인 여자 구단 사무국장들은 “여자배구가 이렇게 인기가 높은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면서도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된다”며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중장기적으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제도적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전했다.
사실 프로종목 인기가 좋아지면 주최단체나 구단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얻는 것이 있는 반면 문제도 생기기 마련이다. 당장 여자배구 인기에 편승해 샐러리캡이 늘어나면 선수는 웃고, 구단은 더 머리를 싸매게 된다. 연봉 부분에서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선수의 정확한 가치에 따라 연봉이 산정돼야 하지만, 선수들이 인기를 통해 구단에 요구사항이 커지게 될 수 있다. 또 주머니가 커지면 스타 플레이어 영입 경쟁에서 투명하지 못한 방법이 발생할 수 있다. 현행 규정에 옵션은 연봉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옵션으로 선수의 마음을 사려는 팀들이 대부분이다.
C여자팀 관계자는 “선수 연봉 투명화가 되지 않을 경우 시장이 더 혼란스러워지면 여자배구를 운영하는 구단 입장에선 동력을 잃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또 “샐러리캡은 거품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급진적으로 규정 변경을 진행하지 말자는 의견이 많다. 그래서 이번 이사회에서 남자부 샐러리캡만 적용시킨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여자부 7구단 창단 숙제 풀어야
조원태 KOVO 총재도 좋은 시기를 잘 살려 자신의 공약도 지켜야 한다. 조 총재는 2년 전 공약 중 한 가지로 여자부 7구단 창단을 약속한 바 있다. 창단 팀을 위한 물밑작업도 이뤄지긴 했다. 올 시즌 개막 전 부산 금융 공기업이 KOVO 실무진 접촉에 창단 의지를 드러냈다. 행보는 적극적이었다. 부산 금융 공기업 실무진이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 등 이미 KOVO 회원사인 공기업 배구단 실사를 하면서 창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상급기관의 상황이 녹록지 않아 허락을 맡지 못했다. 결국 이번 시즌 창단 얘기는 무산되고 말았다. 조 총재에게 한 가지 방법은 연임 이후 김연경의 국내 복귀에 맞춰 여자부 7구단을 창단하는 것이다. 터키 진출 시 맺은 협약서로 인해 흥국생명과 풀어야 할 문제가 있지만, 대의를 위해선 양보도 필요하다.
여자부 분리 독립도 고민해야 할 때
프로농구가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프로농구는 남자(KBL)와 여자(WKBL)가 따로 운영되고 있다. 각자의 연맹에서 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배구도 농구의 사례를 따르게 되면 분명 프로배구 산업시장은 커지게 된다. 여자부가 분리, 독립될 경우 남자부와 다른 스폰서를 구하게 되고 팬에게 더 쉽게 다양하게 다가갈 수 있는 로컬 룰을 지금보다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의사결정이 빨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주중과 주말 남자부 경기에 시청률과 관중수가 밀리지 않다 보니 KOVO에서 독립하자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잘 맞는다.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덩치가 컸던 조직을 벗어나 남자부에서조차 안되고 있는 2군 리그 등 경쟁력을 도모하는 방법도 충분히 모색해 볼 수 있다.
하지만 WKBL의 상황을 지켜보면 망설여지게 된다. 여자배구도 이 인기를 언제 잃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독립했다가 소위 ‘패가망신’ 할 수 있다. 역시 부담이 되는 건 ‘돈’이다. 여자배구단은 운영 면에서 가성비를 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헌데 독립할 경우 운영비가 더 늘어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글/ 김진회 스포츠조선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