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책쟁이's 다이어리

[1인 출판] 재주와 고생의 재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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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책의 해

공식

2018.12.07. 10:01510 읽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서 얼마든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독립출판의 인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제 막 혼자 책을 만들어보려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엮어, 어떤 책으로 만들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것인지 막막할 겁니다. 책쟁이's 다이어리 아홉 번째 주인공, 임소라 작가는 책 기획부터 제작, 유통, 홍보까지 혼자 도맡아 하는 출판사 '하우위아'의 발행인입니다. 개인의 이야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책으로 만들어지는지, 또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충은 무엇인지 들어보세요. 


1인 출판에 필요한 재주들
직접 만들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판매한 박스 테이프.


어떤 대답은 한참 후에 나온다. 상대가 더는 대답을 궁금해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저기, 그때 그건 말이죠…”식으로 나오고 만다. 3년 전에 참여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어느 관객이 “재주가 많아서 고생이네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니요!”라고 답하기도 좀 그렇고 “예!”라고 답하기도 뭐해서 “어…” 소리만 간신히 내는 중에 그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올해 참여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관객으로부터 “재주가 많아 고생이네”라는 말을 또 들었다. 이 말에도 역시 “어…” 소리만 끌었고, 왠지 그 소리가 타령처럼 길어져서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도 곧 떠났다. 여기까지 읽고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재주가 많아서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혼자 다 한다고 자랑하는 건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글은 《서울, 9개의 선》**의 작업 과정을 시작하고, 만들고, 말하는 세 가지 재주로 나눠 살피며 목소리나 표정으로만 남은 두 사람에게 “그때 하신 말씀 가운데 어느 부분은 확실히 맞고 어느 부분은 완전히 틀렸습니다”라고 뒤늦게 대답해보는 이야기이다.

하나, 시작하는 재주
《서울, 9개의 선》을 위한 취재 노트.

우선 시작하는 재주가 있다. 시작하고, 만들고, 말하는 재주 가운데 뒤에 ‘부리다’를 붙일 수 있는 것으로는 시작하는 재주가 유일하다. 시작할 땐 별 생각이 없다. ‘도시별로 거기에 있는 지하철 타본 얘기를 쓰면 재미있겠다!’에서 ‘나란히 꽂아두면 알록달록한 시리즈로 만들자!’까지 걸리는 시간이 날벌레의 수명만도 못하게 짧다. 대강이라도 책의 형태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취재하는 기간, 원고를 작성하는 기간, 파일을 만드는 기간 등의 일정을 짠다.

<서울, 9개의 선>의 경우 이 노선, 저 노선 타보는 기간을 한 달, 원고 역시 한 달, 파일 만들기는 2주로 잡았다. 사실 기간이라기보단 시점을 정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취재를 마무리 짓는 시점, 원고를 일단락하는 시점, 파일을 넘기는 시점을 달력에 표시하는데 이때 중요한 건 이 시점이라는 것들이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일주일 이상 미뤄지고 만다는 점, 그동안 만든 책들 가운데 단 한 권도 스스로 정한 시점을 지켜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정하는 것이다. 《서울, 9개의 선》의 일정도 다 지나고 나서 세어보니 두 달, 두 달, 한 달이 걸렸다.

둘, 만드는 재주
‘도시, 선’ 시리즈의 3호로 <도쿄, 13개의 선>을 만들었다.

시작하는 재주를 신나게 부렸다면 만드는 재주를 불러와야 한다. 만드는 재주를 불러오는 과정은 마치 쓴 지 오래된 만큼 산 지도 오래된 노트북의 부팅과 같다. 버튼을 누른 후에 한참을 인내해야 한다. 시간이 드는 일에는 마땅히 시간을 써야 한다. 《서울, 9개의 선》의 경우 지하철에 타서 노트에 기록한 것들을 바탕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탑승 당시의 기록에다가 뭔가 특별한 걸 더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금방 할 줄 알았는데 작업 속도가 더뎠다. 앞 단계에서 재주를 잔뜩 부려 시작한 일들이 이 단계에서 대부분 없던 일이 된다. 시작할 땐 없던 별 생각이 만들 땐 셈을 포기할 정도로 많아져서 하다가 만 취재, 쓰다가 만 원고, 만들다 만 파일들로 외장 하드가 무겁다. 

만드는 재주를 더 쉽고 빠르게 불러오는 방법 같은 건 못 찾았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알게 된 두 가지는 안 부르면 안 부를수록 점점 더 안 불러진다는 것과 한 번 불렀다고 해서 왕창 다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시작할 땐 자리에 앉자마자 한 번에 술술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자리에 앉기도 여러 번 앉아야 하고, 그때마다 자신을 어르고 달래다 화까지 내보면서 만드는 재주를 어렵게 불러온 뒤, 그걸 아주 꾸역꾸역 쥐어짜내도 몇 줄밖에 안 된다. 불러오기도 힘들면서 한 번 부를 때마다 쓸 수 있는 양이 대형마트의 포인트 적립률만큼도 안 돼서 답답하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하는 재주에 비하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어렵든 오래 걸리든 불러올 수 있는 건 그런 재주가 어디에 있긴 있는 거니까.

셋, 말하는 재주

신나게 시작하고 힘들게 만들었다면 말해야 한다. “여러분, 제가 신나게 시작하고 힘들게 만들어서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하고 말이다. 시작하는 재주를 부리고, 만드는 재주를 불러왔으니 이제 말하는 재주를 넘어야 할 차례인데 매번 못 넘는다. 가진 재주를 수로 나타낸다면 시작하는 재주가 90, 만드는 재주는 9, 말하는 재주는 1인데, 가끔은 0인 것도 같다. 0과 1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뿐 절대 1을 넘지 못한다. 어쨌든 팔려고 만든 책이니까 자리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고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한 적도 있지만, 1이 없어질 때마다 나머지 9와 90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서울, 9개의 선》은 출간 기념행사 같은 자리를 두 번 제안 받았고 그걸 굳이 다 했다. 행사를 하기로 하면, 그걸 하겠다고 말한 날부터 행사 당일까지 긴장을 해서 배탈이 났다. 행사 당일엔 온 기운을 다 써서 다다음날까지 몸져 누워야 했는데, 그렇게 온 기운을 다 썼으면 말이라도 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누워서도 너무 억울했다.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면, 행사 때 내가 말한 것들과 피드백을 좀 더 면밀하게 곱씹고 괴로워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 책 작업을 미루게 되었다. 말하는 재주를 넘기 위해 시작하고 만드는 재주를 소진하고 있자니 잘못되어도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고생은 여기서 생긴다. 재주가 많아서 고생이라는 말에 해맑게 웃지도 못하고 시원하게 울지도 못한 건 맞는 말과 틀린 말이 그 말 안에서 묘하게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재주가 많거나 있는 부분, 시작하거나 만드는 단계에서는 딱히 고생이라 할 것이 없지만 재주가 없는 부분, 말하는 단계에선 매 순간이 고생이다. 지금도 보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지 않은가. 




*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줄여서 UE. 서울아트북페어(SEOUL ART BOOK FAIR)라고도 부르며 2009년 1회를 시작으로 매년 진행되어온 행사. 아트북페어이자 독립출판의 시장으로 일반적인 홍보와 거리를 두는 독립출판과 그 제작자들이 일 년에 한 차례 각자의 목소리로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고 판매하는 자리다.

**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서울 안팎을 오가는 9개의 노선 안에서 보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책. 도시별 지하철 탑승기 ‘도시, 선’ 시리즈의 1호로 올해 6월에 발행되었으며, 얼마 전 2호 《홍콩, 11개의 선》, 3호 《도쿄, 13개의 선》이 발행되었다.


글쓴이_ 임소라 
글 쓰고 책 만드는 하우위아(HOW WE ARE) 발행인.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늘고 길지만 나선형으로 이어간다. 《시간이 많아서》, 《한숨의 기술》, '거울 너머' 시리즈 등을 쓰고 만들었으며 '도시, 선' 시리즈를 만드는 중이다.

이미지 준비중
서울, 9개의 선

저자 임소라

출판 하우위아(HOWWEARE)

발매 201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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