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測雨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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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세종 때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제작된 기구.

측우기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쓰는 기구.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강수량을 측정하는 것이 각 도의 감사(監司)들에게도 업무의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측정 기준이 통일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기후 관측을 담당하던 서운관(書雲觀)에서는 강수량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연구하였다. 《세종실록》에는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다. 그러나 비가 온 푼수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다”(세종 23년 4월 29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세자이던 문종 이향(李珦)도 강수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연구를 배경으로 1441년(세종 23) 음력 8월 18일에 호조의 건의로 측우기가 제작되었다. 당시 호조는 서운관에 대(臺)를 짓고, 길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그릇을 쇠로 만들어서 대 위에 올려놓고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빗물의 양을 측정해 보고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아울러 마전교(馬前橋) 서쪽과 한강변의 암석에 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푯말을 세워 도승(渡丞)으로 하여금 수량의 변화를 측정해 호조에 보고하게 했으며, 각 고을에서도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로 관청 뜰에 측우기를 설치해 강수량의 변화를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그것을 조정에 알리도록 했다.

호조는 1442년(세종 24) 음력 5월 8일에는 측우기의 제작과 운용에 관한 더욱 자세한 방안을 정해서 건의하였고, 세종이 이를 받아들여 시행하면서 측우기가 전국적으로 제작・설치되었다. 그에 따르면, 측우기는 길이가 1척 5촌, 직경이 7촌으로 제작되었으며, 주척(周尺)을 사용해 서운관 관리가 수량을 측정해서 비가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푼의 수를 자세히 기록해 두도록 하였다. 아울러 쇠로 만든 측우기와 주척을 1개씩 각 도(道)로 보내고, 각 고을에서는 자기나 와기로 만든 측우기와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주척을 사용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우량을 측정해 기록하게 하였다.

이러한 측우기의 제작과 사용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나타난 것으로, 유럽보다 200년 정도 빨리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를 사용해서 강우량을 측정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측정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측우기를 제작했으나, 오늘날에는 1837년(헌종 3)에 청동으로 제작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전해지고 있다. 보물 제561호로 지정된 이 측우기는 공주 감영에서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1971년에 반환되어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도 문종 이향(李珦)이 측우기를 실험한 내용이 《세종실록》에 기록된 1441년(세종 23) 5월 19일(음력 4월 29일)의 날짜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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