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崔東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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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의 야구선수. 1980년대 프로야구의 최고 투수로,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둬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가 주무기였으며, 연투 능력도 뛰어났다.

출생-사망 1958. 5. 24 ~ 2011. 9. 14
본명 최동원
별칭 무쇠팔
국적 대한민국
활동분야 스포츠(야구)
출생지 부산
주요수상 한국프로야구 최우수선수상(1984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구덕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경남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에서 야구를 계속했다. 1975년 고교 2학년 때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6년 청룡기 대회 승자결승에서 군산상고를 상대로 1경기 최다 탈삼진(20개)를 기록하며 완봉승을 거둬 초고교급 투수로 올라섰다.

1977년 연세대 1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었다. 1981년 실업야구팀 롯데에 입단하여 다승왕, 신인왕, 최우수선수 등 3관왕에 올랐고, 대륙간컵 국제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활약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으나 병역문제 등으로 인해 메이저리그행이 무산되었다.

1983년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1984년 51경기(284⅔이닝) 등판, 14차례 완투, 27승(13패, 6세이브), 탈삼진 223개, 평균자책점 2.40의 놀라운 성적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을 견인하고, 최우수선수상과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했다. 한국시리즈 7차전 중 5번 등판하여 4승을 거둠으로써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 1985년 2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올리며 당대 최고 투수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1988년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 문제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기도 했다. 트레이드 이후 의욕을 잃어 침체기를 맞게 되었고, 1990년 화려한 선수생활을 뒤로하고 은퇴했다. 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프로 생활을 마치기까지 그는 총 248경기에 등판하여 1414.2이닝을 소화하고, 103승 26세이브 74패, 1019 탈삼진, 평균자책점 2.46이라는 좋은 기록을 세웠으며, 무려 80경기를 완투(완봉 15경기)하였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구위를 자랑한 최고의 에이스로, 트레이드마크인 금테 안경을 끼고 마운드에 올랐다. 주무기는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와 낙차 큰 커브였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단련된 연투 능력으로 인해 ‘무쇠팔’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1977~1978년 국가대표 시절에는 거의 매 경기 마운드에 등판했고,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투구했을 정도로, 이닝 소화능력이 출중했다.

은퇴 이후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으며, 방송사 해설위원, 방송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1년 은퇴한 지 10년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와 한화 이글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7년 한화 2군 감독이 되었다.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했으나 2007년 진단을 받은 대장암으로 2011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친정팀인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 시절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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