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치느냐, 쪼개느냐" 고민되는 이건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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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에 분산 기증
미술관 유치 위해 서울·부산·대구 등 치열한 신경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살아생전 수집한 문화예술품,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4월28일 유족 측이 이 회장의 소장품 1만1023건, 약 2만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각각 기증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관련 소식을 전하는 보도자료에서 문체부는 "고 이건희 회장 소장품의 기증으로 우리 박물관·미술관의 문화적 자산이 풍성해졌고, 해외 유명 박물관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며 유족 측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세기의 기증'이라고 불리는 이건희 컬렉션은 감정가만 2조5000억~3조원을 넘는다.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 근현대미술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받기로 했다. 대구미술관·전남도립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제주 이중섭미술관·강원 박수근미술관 등 지역 미술관 5곳과 서울대 등에도 총 143점이 기증됐다. 예컨대 전남도립미술관에는 허백련·오지호·김환기·천경자 등 지역 작가 9명의 작품 21점이,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김종영 등 대구 출신 작가의 작품 21점이 기증됐다. 박수근의 유화와 드로잉 등 18점은 박수근미술관 품에 안겼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자코메티·로스코·베이컨 등 서양 현대미술품들은 기증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내심 기대를 걸었던 미술계 내부에선 "이 정도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가"라면서도 실망하는 시각도 일부 나오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의 실체가 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지난 1월18일 한 종합일간지 단독 기사를 통해서다. 당시 이 매체는 삼성 측이 감정을 의뢰한 이건희 컬렉션 품목을 소개하면서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1962년 작품 《방 안에 있는 인물》과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60년에 만든 청동조각상 《거대한 여인III》, 러시아계 미국 화가인 마크 로스코의 1962년 작 《무제》 등의 그림을 기사의 사진으로 썼다. 감정에 참여한 한 인사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앤디워홀의 작품을 한꺼번에 감정했으며, 피카소 판화 작품도 여러 작 있었다"고 설명했다.

5월7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기증품 관련 세부 공개 발표 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다.ⓒ연합뉴스


유명 현대미술작품, 유족이 상속받은 듯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5월7일 공개한 기증품 1488점에는 이들 작품이 빠져 있다. 대신 클로드 모네의 《수련》, 피에르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폴 고갱의 《무제(센강 풍경)》,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등이 포함됐다. 미술계에선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에서 이들 작품에 대한 출연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 회장 유족들이 상속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리움 운영위원장과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이서현 이사장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업의 전반을 주도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둘째 동생이다. 경우에 따라선 국제 미술시장에서 큰손으로 활동한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의 의지가 반영됐을 수도 있다.

왜 이랬을까. 미술계에선 이 회장 유족들이 이들 유명 해외 작가 작품의 미래가치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중섭·박수근 등 국내 작가들은 자코메티·베이컨 등 해외 작가들에 비해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낮다.

상속세 부담은 둘째 문제다. 미술품을 상속받으려면 공인된 감정기관으로부터 감정평가를 받아 이를 토대로 납세액이 결정된다. 한 대형 세무법인 세무사는 "최대한 감정평가액을 낮춰 신고하면 된다"면서 "상속받은 후 장기간 보유해 가격이 오를 거라고 판단된 것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독 판화작품이 많은 것도 이채롭다. 가령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 유영국의 작품은 187점인데, 이 중 판화가 167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최근 모 종합일간지와 인터뷰한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의 말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중반 이건희 회장께서 '삼성 임원이라면 사무실에 원화 한 점, 판화 두 점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이종상·이우환·박서보·유영국·김창열 작품의 동판화를 주문했다. 작가별로 동판화 1~4종(에디션 55까지)을 만들었는데 그중 유 작가 동판화를 좋아하셔서 많이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임원 선물용으로 구입했기에 수량이 많았다는 것이다.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 이중섭의 작품 중에선 엽서화와 은지화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따르면, 이번에 기증받은 이중섭의 작품은 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銀紙)화 27점 등 총 104점이다. 담배를 싼 은박종이에 그렸다고 해 은지화로 불리는 이중섭 작품은 위작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삼성가의 통 큰 결단으로 기증품은 늘어났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정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이 전 회장이 소장한 문화재·미술품의 기증과 관련해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4월28일 언론 브리핑에서 "수장고 부족으로 '이건희미술관'을 포함해 새로운 미술관 건립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 공간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기증 작품을 전시할 이건희미술관은 온 국민의 관심사항으로 커지게 됐다.

현재 이 전 회장이 태어난 대구시를 비롯해 그가 잠시 학교를 다닌 부산시, 개인 소유 목적으로 섬을 매입한 것으로 알려진 전남 여수시, 삼성전자 본사가 있는 경기 수원시, 그리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태어난 경남 의령군, 호암미술관과 에버랜드가 위치한 경기 용인시 등이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대구시는 6월초 미술관 건립비 2500억원을 모두 시가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부산시는 청사 제공을 약속했다. 세종시와 경기도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이건희미술관을 각각 자기 지역에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5월26일 대구시의회에서 이건희미술관 대구 유치 시민추진단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유력 후보지인 경복궁 옆 서울 송현동ⓒ연합뉴스·시사저널 이종현


"이건희 고향" "삼성전자 있다" 유치전 치열

이런 가운데 서울시가 뒤늦게 유치전에 뛰어들어 관심을 받고 있다. 과거 시장 재임 시절 디자인시티를 핵심 시정으로 정한 오세훈 시장은 현재 공터로 남아 있는 서울 송현동에 이건희미술관이 들어서기를 크게 기대하는 눈치다.

당초 이 땅을 보유했던 곳은 대한항공이었다. 2008년 이 땅을 인수한 대한항공은 이곳에 최고급 호텔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인허가를 놓고 전임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던 중 경영 정상화를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지난해 매각을 결정했다. 현재 이 땅은 서울시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대한항공으로부터 이 땅을 사고, LH는 이 땅을 서울시의 시유지와 맞바꾸는 형식이다.

미술계 인사들의 환영 움직임도 거세다. 5월27일 미술계 인사 400여 명이 참여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송현동 부지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청동·인사동 일대 화랑가 및 서울공예박물관 등을 연결해 문화 클러스터를 이룰 수 있는 장소"라며 송현동 건립을 적극 건의했다. 이러자 다른 시도 지자체가 강하게 맞서는 모습이다. 비수도권 광역자치단체들은 "경제력의 수도권 집중화도 모자라 문화마저 서울에 짓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 간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논란이 일자 문체부는 "서울시에 협조 여부를 문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시도에도 질의했다"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서울시 관계자 역시 "서울시 어디든 건립에 필요한 부지 및 행정 절차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문체부에 밝힌 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문체부는 외부 인사가 참여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이달 말께 이건희미술관 건립과 관련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박사는 "특정 지역에 기증자의 미술품이 모이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유족의 뜻과도 배치되는 것"이라면서 "지역 미술관에 분산 배치한 뒤 소장전, 순회전 등을 잇따라 열어 많은 국민이 골고루 수혜를 보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시사저널 박정훈


"국내외 관람자 입장에서 보라, 어디가 좋은지…"

공공디자인 전문가 권영걸 전 한샘 사장 인터뷰

서울대 미대 학장을 역임한 권영걸 전 한샘 사장은 "이건희 컬렉션은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과거 서울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부시장)을 맡았고, 개인적으로 서울시 송현동이 최적지라고 생각해 내 생각을 강하게 말하긴 힘들지만, 지금처럼 이상한 연고주의를 내세우며 많은 지자체가 경쟁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샘 사장에서 물러난 뒤 권 전 사장은 계원예술대 총장을 역임했다. 권 전 사장은 공공디자인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건희미술관을 둘러싼 논란을 어떻게 보나.

"세계적 미술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지역균형발전이나 지방자치에 대한 욕구가 강해 빚어진 게 아닐까 싶다. 공공기관들이 지방으로 가는 것을 봐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 역시 찬성이다. 하지만 굳이 문화예술에까지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게 맞는 걸까. 미술품을 분산 배치하면 세계적인 미술관은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서울 송현동에 들어서야 한다는 뜻인가.

"나 역시 지역이기주의로 비칠까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싶은 관람객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어디가 좋을지."

왜 일각에선 송현동을 주장할까.

"이건희 컬렉션은 인류 문화자산이다. 시간적·유형적·장르별로 스펙트럼이 넓다. 이런 미술관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송현동 부지는 정도전이 왕자의 난 때 죽은 곳이다. 그렇기에 조선조에는 지역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명문 세도가들이 그곳에 집을 지었는데 안타깝게도 살던 사람들이 대체로 불행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도심 한가운데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인근에 경복궁·창덕궁 등 역사문화 관광지가 있고, 국립현대미술관 및 여러 사설 미술관이 가까이 있다. 문화예술벨트의 중앙에 있는 것이다. 정말 절묘한 위치다. 문화예술 클러스터가 중요한데 관광객 입장에선 이들 시설을 도보로 이용해야 한다. 그게 요즘 세계적인 추세다. 송현동에 들어서면 경복궁부터 창덕궁까지 이 모든 게 가능해진다."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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