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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단편 _ 김수만 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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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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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5. 14:144,483 읽음

김수만 씨가 패가망신했다는 소식을 친구들 편으로 전해 듣고 모른 체하고 있기가 편치 않아서 나는 ‘오랜만에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그를 불러냈다.
김수만 씨가 어떤 과부와의 불륜 관계가 들통나는 바람에 부인한테 이혼당하고 자식과 재산도 다 부인한테 빼앗기고 직장도 정부산하 기업체의 부장 자리를 그만두고 어느 개인회사로 옮긴 채 혼자서 셋방살이하고 지낸다는 소문이었다.

패가망신의 경위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스스로 얘기를 꺼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묻지는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고 대학생이 된 자녀들의 장래 결혼 같은 문제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부인과 재결합할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는 권고를 해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회사 근처 횟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소식을 듣고 그냥 있기가 뭣해서…….”

그래서 술 한잔 사는 거라고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나에게 김수만 씨는 자신이 오늘날, 오십이 다 되어 자기 인생이 풍비박산 돼버린 경위랄까 요인이랄까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들려주는 것이었다. 마치 저녁을 사준 보답으로 들려준다는 듯 차분한 음성과 표정으로.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나 봐. 그 약한 부분이 그 사람 인생을 예정에 없단 엉뚱한 꼴로 망가뜨려버리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권력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하고, 술에 약한 사람, 도박에 약한 사람, 색정에 약한 사람. 그런데 난 과부한테 약했어.
자식을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 말이지.

우리 어머니 때문일 거야. 우리 어머니가 이십 대에 혼자되어 우리 형제들을 키웠거든. 전쟁과 가난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이잖아. 인생을 살아보니까 요즘처럼 풍요하다는 세월에 남자가 억척스럽게 뛰어도 가족들 제대로 먹이고 입히기가 숨찬데 그 가난하던 시절에 여자 혼자서 도와주는 친척 하나 없이 가족을 부양해온 우리 어머니의 고생이 어떠했겠어.

‘엄마, 학급비 가져오래’ 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응, 그래, 그래’ 입으로는 선선히 대답하면서도 망연한 표정으로 초점 없는 눈길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 쓸쓸한 모습을 나는 항상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어. 나는 어디서나, 가령 지하철 승객들 속에서도 표정이나 태도만 봐도 혼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과부를 금방 가려 볼 수 있어. 우리 어머니에게서 보이던 표정이나 몸짓과 똑같거든. 그래서 나이가 나보다 많건 어리건 과부로 보이는 여자는 다 우리 어머니처럼 여겨져서 친근감도 느껴지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가 없어.

살아오면서 여러 아주머니들을 도와줬어. 변변한 도움은 못 됐겠지만 내 딴엔 성의껏 하느라고 했지. 그래야만 내 맘이 편했거든. 대학생 시절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고 보니 홀어머니가 조그만 지물포를 꾸려가며 아들딸 넷을 키우고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가정교사 봉급은 사양하고 그저 밥 세끼 먹는 걸로 네 아이들 공부를 봐주기로 했지.
덕분에 내 학점은 엉망이 되더군. 큰아이를 명문고등학교 합격시키고 나서 ‘이제부터 네가 동생들 가르쳐라.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날 찾아오고.’ 그렇게 떠맡기고 해방되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을 거야.

내 어머니처럼 여겨져서 측은한 마음에 불쑥 덤벼들었다간 내가 상당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인생법칙 같은 걸 그때 좀 깨달았지만, 그래도 역시 초점 없는 눈길로 망연히 한숨 쉬고 있는 여자만 보면 내 처지나 분수를 깜빡
잊어버린단 말이야. 그게 바로 내 약점이었어.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와서도 화투짝만 보면 그만 세상만사 다 깜빡해버리는 도박꾼처럼 난 어린것들을 데리고 낑낑대고 있는 여자만 보면 내 빠듯한 월급도 잊어버리고 내 약점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는 아내의 야무진 얼굴도 깜빡해버리고 그 과부를 도와주는 거야.

이번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만 여자도 작년 이맘때 전철 안에서 만났어. 밤늦은 시각이었는데 전철 안은 승객이 꽤 많았지. 내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다섯 살쯤 된 여자애가 지 엄마한테 몹시 칭얼대고 있더군. 못생기고 꾀죄죄한 매무새였어. 딸도 그렇고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엄마도 말이야. 아마 집에서라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니까 어린애가 졸음은 오고 좌석은 불편하니까 칭얼대는 모양인데 그 칭얼대는 품이 아닌 게 아니라 내 눈에도 지겹게 느껴지더군.
아기 엄마는 처음엔 좀 달래보기도 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가 발광한 사람처럼 ‘입 다물어, 입 다물어.’
비명 같은 소리로 외치며 딸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어. 그 엄마 눈에는 자신의 딱한 처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과부였던 거야.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큰 소리로 울며 외쳤지.

‘엄마, 나 설사했어. 설사했단 말이야. 엄마가 때리니까 나 설사했단 말이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더군.
벌떡 일어나서 다가갔지. 아이를 안아들고 그 젊은 과부를 재촉해서 다음 역에서 내렸어. 지하철역 내 화장실로 데려가서 아이의 옷을 벗기고 몸을 씻겼지. 아이는 마치 친아빠나 할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나한테 폭 안겨오더군.

그렇게 해서 만났는데 한동안은 아무 일 없이 잘 지냈어. 경제적으로도 내가 뭐 도와줄 필요도 없었어. 시내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한 달 생활비는 충분히 벌고 있더군. 변두리 싸구려 월세방에서 딸 하나 데리고 사니까 큰돈이 들 것도 없었지.
나는 그저 한 달에 한두 번, 일요일에 아내한테는 등산간다고 거짓말하고 그 여자 셋방을 찾았어. 그 여자가 끓여주는 두부찌개 같은 걸로 점심을 먹으며 하루 종일 아이한테 공부를 가르쳤지. 숫자 세는 것, 한글 읽기 같은 거 말이야.
그러는 동안 그 젊은 엄마한테도 필요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남자였지. 그 정도에서 딱 끊고 돌아서든지 어디 장가 못 간 농촌 청년이라도 하나 구해다가 결혼시켰어야 하는 건데 그만…… 내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어.
김수만 씨는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을 그 큰 손바닥으로 한번 훑어 내리며 얘기를 끝냈다.

“어쩌다가 이혼까지?”

“꼬리가 길면 잡히는 거지. 집사람한테 현장을 잡힌 거야. 집사람이 그러더군. 내 성격의 약점을 이해하고 용서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싸구려 셋방 꾀죄죄한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던 알몸뚱이들이 떠오르면 이빨이 저절로 뽀드득거린다는 거야.”

“그래서, 그럼 지금 그 젊은 여자하고 지내는 거요?”

“도망쳐버렸어. 아이를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고 일본 무슨 요릿집으로 갔다더군.”

“앞으로 어쩔 셈이오? 혼자 살아갈 수는 없을 거구.”

“아냐, 이제부터 진짜 할 일이 생겼잖아? 우리 집 과부를 위해서 열심히 돈 벌어 보내는 거 말이야. 그래서 일에 대한 의욕이 요즘 부쩍 강해지고 있단 말이지,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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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와 진짜

저자 김승옥

출판 보랏빛소

발매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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