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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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볼 곳 부산진, 행주산성
만날 사람 이이, 김성일, 이순신
주요 사건 임진왜란

일본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하였다. 이때 통신사로 일본을 살피고 온 김성일은 함께 갔던 황윤길과는 달리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다. 민심을 잃으면 성과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전쟁 준비에 반대하였다.

■ 10만 군사를 기르자

이이(1536~1584)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도 유명한 이이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다양한 개혁 조치를 주장하였다.

1583년 어느 날,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이이가 왕을 찾았다.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다 보니 군대와 식량이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아, 오랑캐가 변경을 소란하게만 하여도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 지금대로라면 큰 적이 침범해 왔을 때 어떤 지혜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 《선조실록》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국가는 항상 전쟁 준비를 갖춰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이라, 이이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이이는 10만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얼마 뒤 일본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하였다. 120여 년간 분열되어 있던 일본이 통일되었고, 머지않아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두 사신의 의견이 달라 조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토론은 큰 성과 없이 끝났고, 조정에서는 급한 대로 몇 가지만 준비한 채 한 해를 보냈다.

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1592, 임진왜란) 2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일본군에 맞선 처절한 항쟁
부산진 순절도(왼쪽), 동래부 순절도(오른쪽)새까맣게 몰려오는 일본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싸워 보지도 않고 우리 땅을 내줄 수는 없는 일. 부산진, 동래성의 조선 군사와 백성들은 하나가 되어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렇지만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그는 오랫동안 진행된 국내 싸움을 평정하고 나라를 통일하였다. 그렇지만 지방 세력가들의 갈등으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자 그들의 관심을 밖으로 분출하여야 했다. 마침내 그는 '명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는 핑계로 조선 침략을 감행하였다.

■ 김성일을 위한 변명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뒤, 부산진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짓밟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이 위협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김성일을 잡아들이고 왜적을 막을 군대를 급히 편성하도록 하였다.

죄인의 복장으로 한성으로 향하던 김성일은 다시 경상도로 돌아갔다. 김성일에 대한 명령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량과 군대를 모아 적을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죄를 묻는 것보다 나라를 구하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한 탓일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성일이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다.

민심을 잃으면 성과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며 황윤길을 비판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군대를 길러야 한다'며 세금을 올리고 농민을 징발하며 언론을 봉쇄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김성일과 그가 속한 동인은 '나라가 부유해지면 민의 생활이 어려워진다'면서 '정치란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의병

관군이 일본군에 무너지면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빠졌다. 이러한 가운데 왕과 조정은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고, 나라 곳곳이 일본군에 짓밟혔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명의 구원을 학수고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일본군을 무찔러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이순신이 이끈 수군과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일어선 의병이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바다 곳곳에서 일본 함대를 무찔렀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함대만 보면 달아날 지경이 되었다. 이제 황해안으로 무기와 식량을 실어 나르며 조선 전체를 지배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수군이 승리하면서 전쟁의 분위기도 점차 바뀌었다. 특히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싸운 의병의 활동이 눈부셨다.

의병은 소부대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의 보급을 막아 일본군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리고 관군과 협력하여 진주성과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 일본군의 침입로와 의병 항쟁

의병은 관군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기가 아주 높았다. 관군은 '목을 베어도 도망자를 막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싸울 의지가 없었으나, 의병은 '떠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한다'고 해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과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1545~1598)은 전라 좌도의 수군 책임자였다. 거북선은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함께 해전 승리의 주역이었다.

■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명의 대군이 조선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명군과 일본군이 두 차례 전투를 치른 뒤 휴전 회담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라서,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랴, 수많은 명군을 먹여 살리랴, 우리 민중이 겪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게다가 명군의 약탈과 행패도 적지 않아,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1597년에는 일본이 휴전 회담을 깨고 다시 쳐들어왔다. 그러나 조선도 그사이 군비를 갖춰 육지와 바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핑계로 이듬해에 모두 철수하였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숱한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전쟁을 막지도, 전쟁 동안 민중을 보살피지도 못한 왕과 조정은 건재하였다.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을 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통신사 행렬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끊었으나, 일본에 새로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는 국교 재개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조선은 왜란 때 끌려간 포로 7,000여 명을 돌려받은 뒤 외교 관계를 다시 열었다. 1607년부터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그 이후 약 250년간 일본과 평화 관계를 지속하였다.

▣ 나도 역사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중 한 명을 정해 행적을 조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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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고 외울 것만 많은 역사 교과서, 개설서를 요약한 듯 죽은 지식을 나열한 교과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더보기

  • 저자

    뜻있는 한국의 역사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생생하면서도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출 수 있도록 ‘살아있는 역사교육’을 하고자 1988년에 만든 모임이다. 현재 2000여 명의 회원이 전국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사와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등 교과별로 학습 자료를 개발하는 한편, 인터넷·사진·동영상·현장체험학습 등을 활용한 다양한 교육방법 연구와 이론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사교육 전문지인 계간 《역사교육》을 비롯해 다수의 단행본을 펴내며 역사교육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를 집필한 전국역사교사모임은 그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라는 대안의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교육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왔다. 최근에는 ‘처음 읽는 세계사 시리즈’를 기획, 집필함으로써 한국인을 위한 세계사와, 그와의 연장선에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를 고민하고, 그 결과물을 내놓았다.

    역사교사는 이 책을 집필하는 데 두 가지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먼저, 한국사와 세계사 영역을 넘나들며 세계사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읽으려 하고, 또 한국사를 염두에 두고 세계사를 가르쳐 옴으로써 세계사의 경험 속에서 한국사를 성찰하고 세계인과 한국사를 소통하는 데 그 누구보다 유리하다. 또한 가장 쉬운 언어로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누구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사를 집필하는 데도 유리하다. 이러한 장점을 십분 살린 이 책은 한국사를 세계사의 일부로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견지하면서 한국의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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