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상이군인·시각장애인…맨 마지막이 노인 ‘버스 약자석 순위’에 담긴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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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프랑스 파리의 버스 안에 붙어 있는 노약자석 안내문. 좌석에 앉을 우선권이 있는 사람들의 순위를 표시한 것인데, 9순위까지 구체적으로 세분화돼 있다. 곽원철씨 제공


오랜만에 파리에서 버스를 탔더니 (노)약자석 위에 전에는 못 보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의 우선 순위를 표시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다.

1. 상이군인 2.(민간) 시각장애인 3. 산업재해 장애인 4. 서 있는 것이 힘든 (법적) 장애인 5. 임산부 6. 4세 이하의 어린이를 동반한 사람 7. 서 있는 것이 특별히 힘들지는 않은 (법적) 장애인 8. 서 있는 것이 힘들다는 증명을 가진 사람 9. 75세 이상의 노인.

프랑스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이 규정도 ‘뭐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좀 지나치게 자세하고 복잡하다. 정작 약자석에 앉을 때 서로 아, 나는 우선순위 4번이니 내가 먼저 앉겠소, 무슨소리요 나는 3번이니 내가 우선이오, 이러면서 따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사회가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할 사람들의 순위인 이 목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하나의 창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소개해 보기로 한다.

일단 이 목록의 최상단은 상이군인이다. 한국에서는 프랑스 하면 인권, 예술, 와인과 패션 등등 소프트한 것들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사실 프랑스는 전통의 군사 강국이다. 2차 대전에서의 치욕적인 패전으로 인해 왠지 강한 군대 하고는 거리가 먼 인상을 주게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서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장악하고 있는 국제사회 힘의 균형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네 정서로는 왠지 군대와 인권은 거리가 있을 듯 느껴지지만 프랑스인들의 인식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각별할 뿐 아니라, 군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대우도 매우 높은 편이다.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인 ‘앵발리드(Invalides)’. 나폴레옹의 시신이 안치된 군사박물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군인들을 위한 보훈병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파리를 방문하여 에펠탑에 올라가 본 경험이 있다면, 동남쪽 방향으로 거대한 금색 돔과 이를 둘러싼 장엄한 건물들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앵발리드(Invalides)’로 불리는 이 건물은 관광객들에게는 나폴레옹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군사 박물관 정도로 소개되지만, 실상은 군인들을 위한 병원, 즉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보훈병원에 해당하는 시설이다. 군사 박물관은 병원의 부속시설에 불과하며, 나폴레옹도 부속 교회에 안치된 많은 전쟁영웅 중 한 명일 뿐이다. 루이14세의 명령으로 지어져 대략 35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원래의 설립목적, 즉 군인들을 위한 후생병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사실 ‘앵발리드’라는 프랑스어 단어는 지체 부자유자 혹은 상이군인을 뜻하는 말이다. 파리를 대표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 하나인 아름다운 건축물이 실은 보훈병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 나라가 상이군인들을 어떻게 대우해 왔는지 보여주는 일면이 아닐는지.

프랑스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관공서 정문 바로 앞에 전쟁에서 희생당한 마을 주민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새겨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곽원철씨 제공


파리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어디를 가나 아무리 작은 마을을 둘러봐도, 그 지역의 관공서, 즉 시청이나 구청 (더 작은 마을이라면 읍·면사무소) 등을 가보면 정문 바로 앞에는 전쟁에서 희생당한 그 마을 출신 사람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새겨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우리 부부는 휴가 때에도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이름 없는 조그마한 마을들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꼭 마을 앞 기념비에 새겨진 이름들을 찬찬히 짚어 보고는 한다. 한 집안에서 여러 명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일도 왕왕 있는데, 많은 경우 그들의 가족들과 후손들이 아직도 그 마을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도 국가보훈처가 있지만 한때 기관장의 편향된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거나 일부 인사의 비리 연루 등으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역사 또한 간직한 것으로 안다. 새 정부 들어 국가보훈처가 장관급으로 격상되는 등 변화가 있었으니, (정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한 분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예우 또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빈다.

목록의 두번째는 민간 시각장애인(Aveugle civils)이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앞을 못 보는 분들이 균형을 잡고 서 있기란 사지가 불편한 분들 이상일 터이다. ‘Aveugle civils’에서 ‘aveugle’은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것인데, 덧붙인 ‘civil’은 ‘시민의, 민간의’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같은 시각장애인이라도 전쟁에서 시각을 잃은 사람들은 1순위 상이군인 항목에 해당되며, 그 외의 사람들은 그 다음 순위라는 뜻. 사실 전철이나 버스 안이 시각장애인으로 꽉 들어차서 서로 누가 우선 순위입네 하고 따질 일은 없겠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3순위인 ‘산업재해 장애인’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인데, 같은 장애인이라도 산업현장에서 일하다가 상해를 입은 장애인은 더 우선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다음 네번째인 ‘서 있는 것이 힘든 (법적) 장애인’은 왠지 알 듯 말 듯 하다. 이는 7순위인 ‘딱히 서 있는 것이 힘들지 않은 (법적) 장애인’과 8순위 ‘서 있는 것이 힘들다는 증명을 가진 사람’과 함께 보면 좀 더 명확해지는데, 여기에 더해 프랑스에서 장애인들이 받는 우대 혜택을 알고 있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휠체어를 타는 등 누가 보기에도 확연히 구별되는 장애가 아닌, 겉으로 보기에는 단번에 구별되지 않는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장애인 우대카드(Carte d’invalidite)’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에도 장애인 카드가 있고 일정한 혜택이 있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사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이 카드의 소지자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지 관심도 없었고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에 반해 프랑스의 장애인 카드는 첫째, 그 적용 및 혜택 범위가 굉장히 넓고 다양하며 둘째, 장애인들의 외부(실외) 활동이 매우 활발한 데다 셋째, 그들이 이 카드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주장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기 때문에 나와 같은 비장애인들도 이 카드의 사용 범위에 대해 자연스레 익숙해지게 된다. 장애인 카드를 가진 사람은 대중교통에서의 좌석뿐 아니라 모든 공공장소에서, 가령 극장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섰을 때나 마트에서 장을 볼 때에도 우선권을 요구할 수 있다. 즉 공연 관람을 하려고 줄서 있는데 장애인 카드를 소지한 사람이 양보해 달라고 하면 즉시 앞으로 보내줘야 한다는 얘기. 이런 상황이 법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흔하기 때문에, 비장애인들도 이런 상황에서 양보하는 것을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고는 한다. 이는 장애인뿐 아니라 그들의 동반자에게도 해당된다. 장애인만 앞으로 보내주고 그의 동반자는 계속 뒤에 줄을 서야 한다면 곤란할 것 아닌가. 장애인들에게 주어지는 교통할인 혜택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의 동반자에게까지 적용된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4순위와 7순위의 차이가 쉽게 이해갈 것이다. 가령 장애인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하여 버스나 전철에서 서 있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청각장애인들처럼 딱히 비장애인보다 서 있기가 더 힘들거나 하지는 않은 사람들도 (다른 부분에서는 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8순위인 ‘서 있는 것이 힘들다는 증명을 가진 사람’은 뭘까? 이는 의사의 진단서·소견서를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다리를 다쳤다든지 하여 (인대가 늘어났다거나)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 해당된다.

이들 사이에 자리매김되어 있는 5순위와 6순위는 임산부, 그리고 4세 이하의 아이를 동반한 사람이다. (꼭 부모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이는 왠지 9순위인 ‘75세 이상의 노인’ 항목과 연결해서 봐야 할 듯하다. 임산부 앞에 있는 1~4순위 사람들은 그냥 딱 보기에도 서 있기조차 힘들 법한 사람들뿐이다. (이런 분들이 왜 굳이 집에 안 있고 돌아다니시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유럽에서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공공장소에서 이동하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는 ‘장애인 이동권’ 개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즉 이들을 제외하면 임산부 또는 아이를 동반한 사람은 여타의 장애인이나 몸이 일시적으로 불편한 비장애인, 그리고 75세 이상의 노인들보다도 더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인들이 사회적으로 합의한 원칙인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 보자면, 만 4세 어린이를 데리고 탄 젊고 건강한 사람이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자리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일은 무척 드물겠지만 말이다.

이는 지하철을 비롯한 한국 대중교통에서 볼 수 있는 노약자석 및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논란과 확연히 대비된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인지 나이 많은 사람을 무조건 공경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지만 유럽에서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이고, ‘약자를 배려한다’는 원칙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 여기서 노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약자일 이유는 없다. 한국에서 ‘경로우대’의 기준은 만 65세 이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프랑스에서 약자로 구분되는 나이의 기준은 적어도 만 75세 이상이다. 무엇보다 노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보호가 필요한 약자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65세라면 프랑스에서는 은퇴 직후 인생의 황금기라고 여겨지는 시기이다. 은퇴 전까지 착실히 경제생활을 해 왔다면 연금도 충분히 지급되겠다, 생계를 걱정할 이유가 없고 시간은 많으니 그동안 미뤄왔던 여행과 취미, 봉사활동 등에 남은 정열을 불태우고는 한다. 특히 지역과 사회에 열심히 봉사하느라 은퇴 전보다도 더 바빠졌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투덜대는 노인들을 주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다. 이런 분들이 자신들을 약자 취급해서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 양보받는 것을 달가워하겠는가.

일전에 다른 일로 파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철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옆자리의 앳된 청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즉 머리가 하얗게 세고 피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러면서도 왠지 표정은 밝고 활기차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차에 올랐던 것. ‘예의 바른 청년이네, 나도 일어나야겠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려는 찰나, 할머니 한 분이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가르송(소년·젊은이), 우린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 않다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즐겁게 수다를 떨며 가신다. 문득 잊을 만하면 한번씩 한국 신문이나 SNS 등에 공유되곤 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임산부를 꾸짖으며 정말로 임신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옷을 들춰봤다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사실 내가 살고 있는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 지역에서는 저런 노약자석 안내문을 본 적이 없다. 이 도시는 수년째 프랑스에서 ‘장애인이 살기에 가장 편리한 도시’ 1위에 랭크될 정도로 (유럽 전체에서는 2위) 장애인 이동권이 우선적으로 보장된 도시인지라, 굳이 저런 순위를 명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도시는 당연히 임산부나 유모차를 미는 아이 엄마들에게도 편리하다. 레나 엄마 역시 그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다른 회차에서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필자 곽원철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09년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알프스 자락에 걸친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갓 태어난 딸 레나와 함께 살면서 파리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뭔가 남들과 다르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모토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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