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입학보다 프로게이머 되기 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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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혜운 기자의 살롱]
게임 세계 1위 '페이커' 이상혁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없었다. 온종일 게임만 하고 싶어한 소년이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됐다. ‘페이커’ 이상혁은 “운(運)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단정한 모습으로 흔한 구설에도 오르지 않은 그는 “어린 친구들이 날 보고 따라 할 수도 있어 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우상(偶像)이 져야 할 책임을 알고 있었다. / SK텔레콤 T1프로게임단

'말없고 내성적인 아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마르고 큰 키.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오락실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서울 강서구 우장산동의 15평 아파트에서 할머니, 아버지, 남동생과 살았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장남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집에 컴퓨터가 생겼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첫 만남은 '메이플스토리(캐릭터 성장 게임)'.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스타크래프트(전투게임)',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리그오브레전드(이하 롤·전투게임)'를 했다. 또래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채팅 창으로 메시지 하나를 받는다. "프로게이머 할 생각 없나." 숙고 끝에 학교를 중퇴하고 프로게이머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의 이름은 이상혁(23), '페이커'라는 게임 닉네임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선수다. 121만달러(약 14억원)로 전 세계 E스포츠 누적 상금 기준(롤 부문) 1위. 액수는 비공개지만, 국내 프로스포츠 선수 중 연봉도 가장 높다고 했다. 해외 언론은 그를 축구 선수 리오널 메시(영국 가디언)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미국 ESPN)에게 비교한다.

2004년 KBS 아침마당에서 사회자는 프로게이머 임요환에게 "현실 속에서도 '누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요?"라고 물었다. 그를 게임 중독자로 간주한 것이다. 지금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宗主國). 1999년 국내에서 '프로게이머 코리아오픈(PKO)'이 개최된 것이 세계 최초다. 세계 1위 프로게이머는 과연 어떻게 탄생했을까. WHO의 질병 규정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하루 24시간 게임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는 직업의 소유자는 인생에서 어떤 교훈과 깨달음을 얻었을까. 페이커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다.

흰 티만 입는 억대 연봉의 스타

그에겐 수많은 별명이 있다. 그중 하나는 '흰 티 수집가'. 검은 목폴라를 입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회색 티셔츠를 입는 마크 저크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처럼 언제나 무늬 없는 흰 티만 입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왜 흰 티만 고집하나.

"원래 옷에 신경을 안 쓴다. (합숙 생활로) 무늬나 색깔이 있으면 누구 옷인지 헷갈린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입었다. 그런데 이제 '민짜면 전부 내 티'로 인식돼 찾기 쉬워 계속 입는다."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것만 입은 스티브 잡스처럼 선호하는 브랜드는?

"없다. 직접 사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부분 팬이 선물해준다."

―염색, 문신도 하지 않는 '모범생' 이미지다.

"이 모습을 팬들이 좋아해 주신다. 공인이다 보니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도 크다. 어린 친구들이 날 보고 따라 할 수도 있으니. 내가 안 좋은 행실을 하면 그들도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친절하게 대한다.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등의 원칙이 있다.

―게임을 하면서 들었던 가장 큰 칭찬과, 가장 큰 욕은.

"게임 못한다는 말이 가장 기분 나쁘고, 잘한다는 말이 가장 기분이 좋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한다. 담배는 안 피우고 술은 안 좋아한다."

―기억에 남는 책은?

"'나를 모르는 나에게'.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습관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부분에 감명받았다. 지금 읽는 건 '게임이론'. 게임은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부분이 공감됐다."

오경식 SKT T1 단장은 그의 연봉에 대해 "국내 프로스포츠 선수 중 1위"라고 말한 바 있다. 현재 국내에선 이대호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25억원으로 가장 많다. 업계에서는 이를 토대로 그의 연 수입이 상금, 해외 CF, 굿즈 판매 등을 합해 5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 달 용돈은.

"20만~30만원. 원래 성격이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게 없다. 차곡차곡 쌓아둔다. 친구들이랑 밥 먹을 때는 내가 내야 하니깐 그 정도."

―가장 큰 지출은.

"4년 전 15평 아파트에서 48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내가 집에 자주 가진 않지만, 가족들이 불편함 없이 지내는 걸 보면 뿌듯하다."

―최근 손흥민 선수와 CF를 찍었다. (해외에서 그는 손흥민, 방탄소년단과 함께 한국을 알린 '3대장'으로 꼽힌다.)

"5시간 찍었는데 영상은 1초 나오더라. NG도 내가 제일 많이 냈다. 대사는 한 줄 '뭐야, 다 보고 있는 거야?'. 20번 정도 다시 찍었다. 손 선수가 연기 잘하더라. 축구 선수들은 다른 것 같다. 아이스크림 광고 찍으면서 연습해서 그런가(웃음)."

새벽 4시까지 할머니가 응원한다

―프로게이머 제안을 받았을 때가 고2였다. 기분은?

"올 것이 왔구나(웃음). 당시 세계 랭킹 1위였기 때문에 제안을 받을 거로 예상했다."

―바로 결심했나.

"고민했다.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는 프로게이머 연봉도 높지 않았고 인식도 안 좋아서. 망하면 어떻게 하지, 돈 얼마 못 벌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프로게이머 생활이 누구나 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잘하자, 편하게, 침착하게.” 5명이 한 팀으로 하는 인터넷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를 하기 전 이상혁 선수는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승부욕이 강하기로 유명한 그는 경기 중 흥분하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 집중하고, 지면 게임을 복기하며 연구한다”고 했다. / 라이엇게임즈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

"없었다. '네 인생이니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응원해주셨다. 원래 우리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게 없으셨다. 대체로 부모님들은 자녀가 프로게이머가 되는 데 회의감을 갖고 계신 분이 많은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도 '왜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느냐'고 잔소리 안 하셨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웃음)."

―성적은 어느 정도?

"중학교 때는 잘했다. 상위 10% 정도. 고등학교 땐 게임만 하다 보니 20~30% 수준으로 떨어졌다. 복습을 안 하니 학교 수업만으로는 힘들더라."

―아버지도 게임을 좋아하셨나.

"그렇진 않다. 할머니가 게임을 좋아하신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안 계셨기 때문에 할머니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연습한다고) 게임을 새벽 4시까지 하면 옆에서 끝날 때까지 응원하셨다. 가끔 훈수도 두셨다(웃음). 지금도 내가 하는 경기는 다 보신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라고 했다.

"그런 환경이 나에게 영향을 주진 않았다. 난 하고 싶은 게임을 마음껏 했으니깐 크게 가난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어릴 때도 돈을 많이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PC방 가고 싶으면 버스비 모아서 가곤 했다."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계기는.

"남들보다 많이 한 건 아니었는데 1등을 했다. 성격도 맞는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편이다. 다들 나보고 어떻게 멘털을 유지하느냐고 하는데 난 타고났다고 말한다. 최근 성격 검사에서도 로봇 같은 성격이라고 나오더라."

―남동생도 게임을 잘하나.

"집에 컴퓨터가 한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게임을 할 수 없어 밖에 나가서 놀았다. 지금은 태권도를 한다."

―자녀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 한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할 것 같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조언해 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식이 나와 같은 성격이 아니라면 프로게이머를 하는 건 어려울 거 같다. 우리는 자유가 없다. 합숙 생활에 연습하느라 개인 시간도 없다. 1년에 쉬는 날이 주말·공휴일 합쳐서 30일 정도다. 다른 스포츠보다 성공하기도 어렵다. 서울대 의대 들어가는 것보다 경쟁이 세다. 대회 일정을 소화하려면 학업 병행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게임을 좋아한다고 프로게이머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잘하고, 적합한 성격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학업을 추천하고 싶다."

게임 시간은 부모 자식 대화로

지난 5월 7일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는 페이커의 얼굴이 등장했다. 중국 팬클럽에서 준비한 그의 생일 선물이었다.

중국 내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2017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를 보기 위해 모인 관중은 4만여 명. 경기에 진 그가 눈물을 흘리자 그날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의 검색어 1위가 '페이커의 눈물'이었다. 마침 그날 2위는 '송중기 송혜교 신혼여행'이었다.

―중국의 거액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난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생 전체로 봤을 때 가장 좋을 것 같은 방향을 골랐다. SK텔레콤에 대한 의리, 나라에 대한 애국심,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한국팀 성적이 부진하다.

"한 국가가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려면 많은 투자와 인력이 중요하다. 그동안 게임에서는 한국이 그랬다. 인터넷 보급이 빨랐고, PC방 문화가 있었다. 많은 친구가 게임을 했다. 그러나 2010년부터 다른 나라들이 따라잡고 있다. 특히 게이밍하우스(연습실과 경기장) 등 프로구단 시설에 많이 투자한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해외에서 국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격차가 줄어든 측면도 있다."

―한국인은 왜 게임에 강할까.

"기질이 잘 맞는다. 게임은 집중력, 승부욕이 중요하다. 한국 선수들은 즐기기보다 이기겠다는 생각이 크다. 한 가지에 파고드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외 메이저 대회에서 12번 우승했다. 그러나 지난해 한 번도 우승을 못하며 최악의 슬럼프를 겪었다.

―'전성기가 끝났다'는 비판이 나온다.

"처음엔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젠 어느 정도 감수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프로 생활을 하다 보면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있기 마련이다. 작년에 많은 패배를 하면서 나를 돌아봤다. 지금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전성기보다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 측면에서도 몸이 굳고해서 스트레칭 등으로 풀어주고 있다."

―올해로 7년 차다. 함께 활동했던 프로게이머들은 거의 은퇴했다.

"아직 은퇴를 생각해본 적 없다. 더 열심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은퇴 후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가르치는 건 잘 못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경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가장 하고 싶은 걸 할 듯하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게임의 중독성이라는 게 없지만은 않다."

―많은 부모가 이 분류에 공감할 것 같은데.

"자녀가 과도하게 게임을 하면 부모는 당연히 걱정한다. 어느 정도 게임을 허락할 것인지를 부모 자식 간에 대화로 풀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게임을 정말 좋아한다면 부모는 최소한 그 이유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 더. 게임도 팽이치기 같은 하나의 놀이문화라고 여기고 좋게 봐줬으면 좋겠다. 게임도 학습이다. 어떻게 하면 승리할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익힌다. 그 시간에 억지로 공부하는 것보다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게임 중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어렸을 때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 숙제를 미룰 때 그랬다. 임박해서야 숙제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숙제든 뭐든 미리 할 일들을 마치고 게임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만약 게임이 일상에 영향을 준다면 그땐 가족들이 도와줄 필요도 있다고 본다."

―게임으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난 지금까지 굉장히 운이 좋았다. 게임만 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는데 프로게이머가 됐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는 유지하기 위해서, 부진할 땐 향상시키기 위해서. 게임을 하며 비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제일 잘 아는 사람도 자기다. 그래서 2~3년 전부터는 인터넷 댓글도 안 본다. 남들 평가에 영향을 받거나 감정적으로 휘둘릴 수 있어서. 나에 대한 평가는 내가 가장 정확하다. 누구도 나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프로게이머 될 확률 0.0027%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국내에서 롤을 하는 인원은 약 300만명. 이 중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선수는 82명이다. 0.0027%. 지난해 대학수능능력시험 전체 응시자 수는 53만명. 서울대 의대 입학 정원은 135명이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상혁이 "서울대 의대보다 경쟁이 세다"고 말한 이유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표한 '2018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프로 선수가 될 경우 평균 연봉은 1억7600만원 정도다. 그러나 아마추어로 내려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5.4%만이 연 200만~4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35.7%가 200만원 미만이다. 58.9%는 한 해 소득이 전혀 없었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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