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at >“상속세 때문에 세계적 명작 해외 팔아야 하나”… 일각 “조세 회피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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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3.10. 오전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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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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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국보 제219호)


■ “이건희 컬렉션 유출 안돼… 물납제 도입” 외치는 문화계

이건희 소장품 모네·샤갈·피카소 등 1만3000여점… 문화계 “물납 미술품 현금화하지 않고 국민 문화향유 폭 넓히는 것”

이광재 의원 개정안 발의했지만 정부·국회 신중… 삼성家 “오해사고 싶지 않다” 일절 함구


“상속세를 문화재·미술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도입하면 개인이 보유한 문화재와 미술품이 국가 소유로 전환돼 국공립박물관 소장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3일 문화계 인사들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8명과 현직 문화단체장들이 연명한 호소문은 정부와 국회가 문화재·미술품 물납제 관련 세법을 조속히 개정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틀 후인 5일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경실련은 “현재 물납이 인정되는 주식, 부동산과 달리 그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화재와 미술품 물납은 조세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고 현금화도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또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상속세 이슈가 첨예한 상황에서의 미술품 등 상속세 물납제 도입 논의는 그 의도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물납제를 연구해 온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물납 받은 문화재와 미술품은 주식, 부동산처럼 팔아서 현금화하는 것이 아니고 국공립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으로 보존·관리하면서 연구와 전시, 교육을 통해 국민이 문화 향유 폭을 넓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경실련 성명은 이 회장 타계 후에 삼성에 상속세 혜택을 주기 위해 경제, 문화계가 함께 주장을 펴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과 맥을 함께한다. 그러나 문화계가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를 주장하며 문체부와 논의를 시작한 것은 이미 10년 전부터였다. 이후 논의가 지지부진했으나 지난해 간송문화재단이 상속세 부담을 못 이겨 국가지정 보물인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은 것을 계기로 이슈가 됐다. 지난해 물납제 도입을 위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측은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 사례처럼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미술 문화 유산을 공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계가 이 회장이 생전 소유한 미술품 컬렉션이 감정 평가를 받는 시점에 호소문 등을 통해 물납제 화두를 환기시킨 것은 전략적 마케팅 성격이 강하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국보를 넘어서 세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은데, 이것들을 국내에서 계속 보존해야지 상속세 때문에 해외에 팔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이런 논리로 물납제 도입 여론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희 컬렉션의 명작들을 국내에 보유해 우리 문화유산으로 남게 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작용하고 있다.

“명작이 많다고는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안복(眼福)을 누린 바람에 가슴이 뛰어서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이건희 컬렉션 시가 감정에 참여한 한 미술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화랑협회,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은 삼성의 법률대리를 맡은 김앤장의 의뢰로 지난해 말부터 감정을 진행하고 있다. 두 단체에서 한 작품을 함께 진행해 평균값을 내는 방식이다.

이번에 삼성이 감정을 맡긴 작품은 1만3000여 점. 이 회장과 가까이 지냈던 이우환 화백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고미술품도 세계적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에 따라 모았다고 한다.

이 회장은 백자 마니아로서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백자 달항아리’ ‘청화죽문각병’ 등을 수집했는데, 이것들은 뒤에 국보가 된다.

그는 생전 국보 30점과 보물 82점을 소유했다.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부터 시작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을 사들였다. 일본에 있던 이암의 ‘화조구자도’는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 컬렉션이 될 뻔했으나, 이 회장이 사진을 본 후 구입한 경우다.



근현대 작품 수집은 미술을 전공한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조언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00여 점에 달하는 국내 작품 리스트엔 이중섭 ‘황소’,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김환기 전면점화 등 걸작이 포함돼 있다.

감정위원들은 서양 근현대미술 작품 1300여 점의 수준에 특별히 놀랐다고 입을 모았다. 모네 ‘수련’,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샤갈 ‘신랑신부의 꽃다발’ 등 세계 보물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경매시장에서 1000억 원대에 팔려 화제에 오르곤 하는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화, 1600억 원대에 낙찰된 바 있는 자코메티의 조각 ‘거대한 여인’도 리스트에 포함됐다. 로댕이 1881년에 만든 청동 조각 ‘이브’는 이 회장이 각별히 아꼈다는 작품이다.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처럼 팝아트 작가 대표작도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외 명작들의 값은 구입 당시보다 수십 배는 올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컬렉션의 감정 시가 총액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2조∼3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40여 년간 그림 매매를 해 온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단순히 돈만이 아닌 안목이 있었기에 그런 작품들을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삼성가에서 상속세를 내기 위해 미술품을 내놓을 경우, 국내에서 이를 살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해외 매매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화계 우려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상속세 문화재·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삼성가는 어떤 의견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최웅철 전 화랑협회장은 “삼성 측에 의사 타진을 해 봤으나 일절 답을 주지 않더라”고 했다.

정부와 국회도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삼성이 그 첫 사례가 됨으로써 일부 시민단체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하는 기색이다. 현재 상황에선 삼성이 이 회장 상속세 납부 방법을 최종 결정해야 하는 4월 말 이내에 문화재·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문화계가 강력히 요구해 검토에 착수했으나, 내용을 살펴본 단계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광재 의원실은 “기획재정위원회 전체 회의에 상정한 후 조세 소위원회에서 다루는데, 아직 상정도 안 된 단계”라며 “국민 정서상 공감대 형성이 이뤄져야 하고 감정평가 시스템도 보완돼야 한다”고 했다.

장재선 선임기자·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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