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닦느라 키보다 더 길어진 옷고름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ㆍ‘다시 꽃을 보다’ 미술전

길게 늘어진 옷고름이 인상적인 강민주·김동욱의 설치작품.


최근 여성가족부가 연구용역 형태로 내놓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보고서’가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 내용도 문제지만, 당초 정부 차원의 ‘백서’를 발간한다고 발표하고는 민간의 ‘보고서’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이번 보고서는 2015년 말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어 다시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 시민사회의 분노를 사고 있다.

여성 인권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환기시키는 기획미술전 ‘다시, 꽃을 보다-전쟁 그리고 여성들’이 열리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예술인 모임 ‘ART(아트)제안’이 기획한 전시는 옛 질병관리본부의 창고를 리모델링한 서울시립미술관(SeMA)의 전시공간 ‘SeMA 창고’(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울혁신파크 내)에 마련됐다. ‘ART제안’은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참여적인 예술을 실현하는 예술인 그룹’을 표방하는 모임으로 2014년 창립됐다. 20~50대 작가 17명이 회원으로 있는 ‘ART제안’은 평소엔 개별 작품활동을 하지만 뜻이 모여지면 기획전을 마련한다. 그동안 두 번의 기획전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붉은 벽돌, 천장의 나무골조 등 옛 건물의 흔적이 선명한 전시장에는 회화, 설치, 애니메이션, 영상 등 작가 15명(팀)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 2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미술인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언어로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여성 인권 문제를 성찰하는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특히 오는 10월에 홍콩, 내년에는 대만과 네덜란드에서도 현지 작가들과 함께 열릴 예정이다. ‘ART제안’ 측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해외 전시 지원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전시회는 신영성 작가의 설치·회화로 시작된다. 선풍기 잔해물인 모터들을 모은 설치작품은 인권을 유린당한 위안부 할머니들, 지금도 소외된 그들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정경미 작가는 꽃들을 판화지에 짓눌러 갖가지 색깔·모양으로 남은 흔적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 흔적들은 짓이겨진 꽃의 눈물이자 삶의 존엄성을 짓밟힌 할머니들의 눈물을 상징하는 듯하다.

허은영 작가는 수십 개의 흰 알을 설치했다. 알 표면에는 위안부 관련 문헌들에서 뽑은 ‘팩트 텍스트’들이 전시돼 있다. 생명, 또는 부활이라는 상징성을 띤 알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꼬집고 할머니들의 새로운 부활을 그려보는 작업으로 읽힌다. 강민주·김동욱 작가는 저고리 고름이 바닥으로까지 길게 늘어뜨려진 치마저고리 위에 봉숭아물이 퍼지는 영상을 겹쳤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느라 옷고름이 자신의 키보다도 더 길어져야 했던 어린 소녀들을 떠올리게 해 관람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하민수 작가는 재봉틀 작업으로 여성 9명의 초상화 위에 갖가지 색의 실을 올렸고, 회화 뒤에는 빨간 실들을 늘어뜨렸다. 저마다의 삶이 녹아든 초상들과 질곡의 역사와 시간을 상징하는 듯한 실이 어우러진다. 이번 전시 기획자이기도 한 그는 “여전히 계속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에 이 시대 작가로서 ‘내’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얘기를 하고자 했다”며 “탈북여성, 난민 여성 등의 담론으로 이어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시회에는 또 소녀상 철거반대 집회를 꾸준히 기록해온 민철홍·한승훈 작가의 영상을 비롯해 신정원 작가의 애니메이션, 김미향·김수향·김은영·박설아·심정아·양지희·이유현·황선영 작가가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오유정 큐레이터는 “사회 이슈를 미술언어로 풀어낸 작가들과 관객의 활발한 소통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는 13~14일, 20~21일에는 ‘프로젝트 Pilgrim’의 공연도 열린다. 28일까지.

<글·사진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