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기자의 돌발史전] 1970년대까지 남자도 '언니~'라고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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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졸업식 시즌이면 학교마다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다. 1946년 윤석중이 노랫말을 만들고 정순철이 곡을 붙였다. 그런데 '형' '오빠' '누나'는 없고 '언니'만 있다. 이 노래의 화자(話者)와 졸업하는 학생은 모두 여학생인 걸까?

벽초 홍명희가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임꺽정'에서는 주인공의 동생뻘 의형제들이 "꺽정 언니"라 호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다정한 표정으로 "언니~"라고 부르는 걸 상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도 모른다. 2010년 화제의 TV 드라마 '추노'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 걸 보고 시청자들 사이 논란이 있었는데, 나름 내력이 있는 설정이었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사전의 재발견'에 가 보면 불과 60여 년 전까지도 '언니'란 말에 성(性) 구분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940년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은 '언니'를 '형(兄)과 같음'이라고 풀이했고, 1957년 '큰사전'에선 '형(兄)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형제 사이에서 '언니'란 말을 쓸 수도 있고, 자매 사이에서 '형'이라 부를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의 '언니' 풀이에선 세월에 따른 의미상의 변화가 나타난다. "… 항렬이 같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주로 여자 형제 사이에 많이 쓴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언니'란 말에 '성(性) 정체성'이 생겨난 것이다.

1976년 신문수 만화‘우리집 콩돌이’(왼쪽)와 1977년 길창덕 만화‘크라운 철’의 한 장면. 남자 형제나 선후배 사이에‘언니’란 호칭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카페‘클로버문고의 향수’

그래도 최소한 1970년대까지는 나이 어린 남동생이 형을 향해 친근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증거 자료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된 만화에 남아 있다. 1976년 10월 신문수의 만화 '우리집 콩돌이'에선 주인공의 형이 "이리 와, 언니가 잘 가르쳐 줄게"라고 말한다. 1977년 4월 길창덕의 '크라운 철'에선 남자 초등학생이 학교 선배를 '언니'라 지칭한다. 이렇게 부르고 불렸을 세대조차 지금은 거의 잊어버린 얘기가 됐지만.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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