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만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비슷한 글9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쇼펜하우어1)가 헤겔을 미워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다른 철학교수들이 ‘철학의 숨은 황제’인 자신을 시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항상 주위를 경계했다.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도 않았고, 불이 날까봐 이층에서 자지도 않았으며, 잠잘 때에는 권총에 탄환을 넣어 침대 옆에 두고 잤다.

또한 어머니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인지, 여자를 불행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여자들은 돈을 낭비하는 버릇과 교활함으로 똘똘 뭉쳐 있고,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오직 “성적 충동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남자들만이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여자라는 존재를 아름답다고 본다”라고 비하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그는 독일의 단치히에서 돈이 많은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들의 부부관계가 좋지 않아, 호강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자살로 추정되는 아버지의 죽음 후에 그의 어머니는 문화와 사교 생활에 더 열중했다.

결국 성년이 되는 해에 쇼펜하우어는 어머니를 상대로 법적인 소송을 걸었고, 유산 중 삼분의 일을 받아내어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1819년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2)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초판 이후 16년이 지난 다음에는, 출판업자도 그 판본의 대부분을 폐지로 팔아 버릴 결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1820년 베를린대학의 전임강사가 된 쇼펜하우어는 “후세에 나의 기념비가 반드시 건립되리라”라고 장담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헤겔과 같은 강의 시간대에 자신의 강의를 열어 놓았지만, 청강생들이 헤겔에게로 몰리는 바람에 한 학기 만에 강의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1831년 베를린에 유행한 콜레라로 헤겔이 죽고 1848년 시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낙관론적 헤겔 철학이 서서히 빛을 잃자 염세주의적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직접 쇼펜하우어를 방문하거나 갖가지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렇게도 바라 마지않던 명성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고, 모든 재산은 그의 유언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증되었다.

오늘날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검은 대리석의 묘비에는 외롭게 그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세계는 나의 표상3)이다!”

그의 주저(主著)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칸트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그 현상만 인식할 수 있을 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 우리를 에워싼 세계는 오직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표상 이외에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으로 세계와 만난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

좁은 뜻의 의지뿐만 아니라, 우리가 품는 모든 소망 · 욕구 · 동경 · 희망 · 사랑 · 미움 · 반항 · 도피 · 괴로움 · 인식 · 사고 · 표상 등 우리의 삶 전체가 체험이자 의지다.

우리의 판단은 논리적 사유 행위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의식하지 못하는 심층부에서 순간적인 착상이나 결단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우리의 몸은 시공간 속에 드러난 의지일 뿐이다. 가령 걸어가려는 의지는 발에서 나타나고, 붙들려는 의지는 손에서, 소화를 시키려는 의지는 위장에서, 생각하려는 의지는 뇌에서 나타난다.

이 의지란 마치 앞을 볼 수는 있으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힘센 맹인과 같다.

어깨 위에 앉은 사람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그는 힘껏 달려 나간다.

여기에서 보듯, 행동의 실질적인 추진력은 의지이고, 이성은 다만 그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인간은 앞에서 끄는 힘이 아니라, 뒤에서 미는 힘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무의식적인 삶의 의지에 끊임없이 충동을 받는다.

쇼펜하우어의 뒷모습
애완견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풍자화. 빌헬름 부시가 그린 그림이다.

보통 우리의 의식 기능은 쉽게 피곤해지기 마련이어서, 반드시 휴식과 잠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의식적 의지는 휴식 없이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심장이나 폐의 운동처럼 지칠 줄 모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구와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단 자기보존의 방법을 찾고 나면, 즉시 종족보존을 추구하는데, 생물의 세계에서 가장 강렬하게 의지가 표현되는 부분이 바로 생식 본능이다.

인간은 인식이 이루어지는 뇌보다도 성적 충동이 발산되는 생식기에서 더 강한 충동을 받는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는 모든 자연현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우주의 중력으로부터 인간의 자기의식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내면을 이루고 있다.

자연의 힘과 중력, 구심력과 원심력, 극성(極性)과 자기(磁氣), 화학적인 친화성, 식물들의 성장, 식물들이 빛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 생물들이 자기를 보존하려는 충동과 본성 등 이 모든 것들이 의지다.

사랑의 형이상학

흔히 우리는 사랑을 아주 고상한 감정이라 여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사랑이란 것이 ‘종족보존’이라는 자연의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봤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불가항력적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것은 고상한 인격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없는 것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종(種)의 유형을 보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을 유난히 좋아하며, 피부가 검은 사람은 그 반대의 사람을 대단히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종의 유형에서 벗어난 개인의 결점을 바로잡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가진 이성에게 집착하고 또 그를 배우자로 선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뚜렷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은 남자의 남성다움과 여자의 여성다움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 목적을 원만하게 달성할 수 있다.

예컨대, 포용력과 결단력 등의 남성미와 섬세함과 신중함 등의 여성미가 어우러질 때, 두 남녀는 가장 잘 어울린다.

가장 남성적인 남자는 가장 여성적인 여자를 찾게 마련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개인이 자기도 모르게 이 문제에 그렇게도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바로 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욕망은 원래 종족보존을 위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개인을 위해 가치가 있는 듯이 보이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의 욕구도 일단 종족보존의 목적이 실현되고 나면 사라진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출산이 가능한 시기일 때 절정에 도달하고, 나이가 들면 곧 시들해진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속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름다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종의 의지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사람들끼리 막상 결혼하고 나면 급속하게 그 사랑이 식는 것처럼, 인간은 결국 종의 도구였던 것이다.

의지의 발동을 막아라, 인간의 고뇌와 해탈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데 비해, 그것을 충족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욕망이든지 채워지고 나면 즉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고, 반대로 어떤 고통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든다.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래 모습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깐 찾아오는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첫째,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을 때에는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실감한다.

건강이나 맑은 공기나 사랑하는 사람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고통이라는 몽둥이가 다가오고, 이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권태라는 또 다른 채찍이 떨어진다.

삶은 마치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인생은 이렇게 고통과 권태라는 두 박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6일간의 고통과 제7일째의 권태라는 일주일의 생활 패턴은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셋째, 고독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나 혼자일 뿐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다툼과 전쟁, 학살과 약육강식 등이 있다.

이것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동물계나 인간 세계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라 할지라도, 행복을 표현하는 데에는 서툴기 마련이다.

단테의 작품 《신곡》 속에서 지옥의 모습은 아주 자세하게 그려지지만, 천국에 대한 묘사는 아주 제한적이고도 어색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는 지옥의 소재가 풍부한 반면에, 천국의 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극작가들도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거짓으로 해피엔딩을 처리한 다음에 재빨리 막을 내린다.

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행복의 묘사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낙관주의란 인류의 수많은 고뇌에 대한 쓴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신곡》을 표현한 그림
프랑스의 화가 겸 판화가인 도레(1832~1883)가 그린 작품

단테의 대표 서사시 《신곡》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신곡》은 저승 세계로 가는 여행을 주제로 하여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의 삶의 길 가운데에서 어두운 숲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내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신곡의 첫 번째 주제인 <지옥편>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를 외과수술실 · 감옥 · 고문실 · 전쟁터 · 법정 등 온갖 불행이 깃든 음산한 곳으로 안내한다.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억제되는 넘어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억제되는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삶은 죽음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으며, 숨을 몰아쉬면서 뛰어봤자 결국 도달하는 곳은 죽음이 아닌가?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모르다가 중년을 넘어서자마자 우리는 마치 이자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 원금마저 가져다 쓰는 예금자처럼 되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비극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첫째로 인식은 탈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식물보다는 하등동물이, 하등동물보다는 고등동물이 고통에 대한 감각도 더 발달되어 있다.

똑같은 인간의 경우도, 인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고통도 더 많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천재는 가장 괴로운 사람에 속한다.

자살 역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자살은 한 개인으로부터 의지의 충동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의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의 환생 사상에 입각해 그 이유를 설명했는데, 의지는 즉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므로 자살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임시적인 해결책으로서 심미적 해탈(解脫)4)이고, 둘째는 영구적인 해결책으로서 윤리적 해탈이다.

먼저 우리가 의지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순수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면, 일시적이나마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의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 동물에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인간에게는 가능하다.

이미 인간의 신체 구조가 그것을 시사해 주듯이, 우리의 머리는 몸에서 뻗어나 있긴 하지만 그 몸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진 않다.

말 그대로 목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순수한 인식 주체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천재들의 예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궁극적인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좀더 엄숙한 자세로 돌아서야 한다.

여기에서 의지의 부정을 통한 윤리적인 해탈의 길이 열린다.

우리의 모든 고통이 끊임없는 의지의 발동에 의한 것인데, 아예 의지 자체를 억제하거나 없앰으로써 우리는 영속적인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명령한다.

이제는 소망할 것이 없는 열반(Nirvana)5)의 경지에서 우리 자신이 죽을 것과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십자가를 질 것이다.

서재에 장식품이라고는 칸트의 상반신 초상화와 청동불상 하나밖에 없었다는 쇼펜하우어에게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의지의 발동을 미리 막는 금욕을 통해서 우리가 무아경이나 황홀경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유럽사상의 전통에서 봤을 때, 쇼펜하우어는 아주 새로운 정신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인품은 특별했고,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아직 낯선 ‘인도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인간 의식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눈을 철학에 제공했으며, 또한 우리가 자연의 내면을 통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인도의 신비 사상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반의 경지에서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최대 관심사라고 하는 그의 가르침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한 은둔자의 불안과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세상의 일에 대해 눈을 감고 있기보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 노력할 때, 죽음의 위력도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관련 이미지3

전체보기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뿌리와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제시해 주기 위한 저자의 부단한 노력이 ...더보기

  • 지음
    강성률 대학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전남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으며, 이곳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칸트 철학에서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와 목포대학교 강사를 거쳐 현재는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헤겔학회․범한철학회․동서철학회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으며, 칸트 철학에 대해 깊이 연구한 국내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개론서에 해당하는 《철학의 세계》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연구 논문들이 있다. 철학의 대중화에 도움이 될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면서, 장차 대한민국의 초등교육을 짊어지고 갈 예비교사들에게 철학의 진수를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저자와의 미니 인터뷰】 Q. 이 책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철학’ 하면 대개 따분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시판되는 철학책들이 대체로 그 맥락을 따르는 것도 문제다. 비록 제목은 ‘청소년을 위한’이라고 붙였지만, 사실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읽는다 해도 흥미를 유지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책은 청소년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한층 차원 높은 교양을 쌓는 데 큰 보탬을 줄 것이다. Q. 시중에 나와 있는 일반 철학서와는 다른 차원의 책이라는데? 이 책의 장점은 읽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점이다. 우선 철학가의 초상이나 그 출생 도시를 찍은 선명한 컬러 사진, 사상의 핵심 내용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흥미로운 그림들,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날카롭게 서술한 주석 등은 독자들에게 페이지마다 색깔 있는 철학책이라는 신선함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철학가들의 엉뚱한 일상과 에피소드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독자의 눈과 두뇌를 잠시 쉬어가게 할 것이며, 대한민국 교육계의 화두인 논술문제에 대비한 ‘철학 논술’이라는 코너도 이에 일조할 것이다. 이는 서양철학의 핵심과 현실에서 부딪치는 시사 문제 사이를 연결하며, 독자들을 잠시 사색의 장으로 인도해 주는 마력이 있다. 이 책은 서양철학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생략하면서도 그 핵심을 짚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말을 줄인 대신,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은 빼지 않았다는 의미다. Q. 이 책을 읽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은 결국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철학이 대학에서만 강의되고 학회에서만 논쟁의 주제가 되는, 소위 소수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이란 누구나 배울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자신의 철학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의 철학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며,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철학적으로 행동하는 사회가 곧 성숙한 사회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꽃밭을 거니는 기분으로, 혹은 호젓한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이면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과 정신적으로 나눈 수많은 대화로 인해 독자들은 어느덧 스스로 ‘철학가’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보기
  • 그림
  • 제공처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