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광화문 집회, 정치는 사라지고 증오만 가득했다

입력
수정2019.10.04. 오전 8:16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288
자유한국당 “국민-당원 300만 이상” 주장
지역구에 총동원령 내리고 인증 사진 요구
황교안 대표 “대한민국이 하나 되고 있다”
집회 뒤엔 보수단체와 함께 청와대로 행진

참가자들 “서초동보다 우리가 많다” 자랑
얼굴엔 현 정부를 향한 증오가 ‘이글이글’


3일 오후 서울 시청 방향에서 바라본 광화문광장 주변이 자유한국당 정당 관계자, 범보수단체 회원, 기독교 단체 회원 등이 각각 개최한 여러 건의 집회로 가득 차 있다. 공동취재사진
태풍 미탁은 물러갔지만, 강풍에 학교 지붕이 날아갔습니다. 물 폭탄에 4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습니다. 도로와 자동차가 잠기고 비행기와 배가 멈췄습니다. 기차는 탈선했습니다. 태풍은 무섭습니다. 올해 유난히 한반도에 태풍이 자주 올라오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의 교만과 타락을 신이 바람과 홍수로 심판한다고 신화는 전합니다.

북한이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3형'을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습니다. 미국 언론은 북-미 실무협상을 앞두고 미국을 압박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의 시험 발사 10시간 뒤 미국 공군은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 기지에서 대륙 간 탄도미사일 ‘미니트맨3’을 발사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조국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오전 9시에 검찰청사로 비공개 소환했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이 정경심 교수에게 두고 있는 혐의는 입시 부정과 사모펀드 두 갈래입니다. 언론이 ‘1차 소환’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미루어 검찰이 정경심 교수를 한 두 차례 더 부를 모양입니다. 수사를 언제까지 끌고 가려는 것일까요?

오전 10시에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4351주년 개천절 경축식이 열렸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단군의 꿈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언급하며, 발전, 민주주의, 포용, 화합, 평화를 다짐했습니다. 네 번째 화합 부분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나와 너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서로 관용해야 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대립의 뿌리를 뽑아 갈등을 줄이고 화합을 키워야 이치가 세워집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집회 준비를 이유로 개천절 경축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2019년 10월 3일 개천절은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가 벼르고 별렀던 날입니다. 9월 28일 서초동 검찰청사 인근에서 열린 촛불 문화제 인파를 주최 측이 200만명이라고 주장하자,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시민단체 등에서는 10월 3일 개천절에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전국 당원협의회에 광화문 집회에 당원들을 동원하고 인증 사진을 첨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신문에는 ‘문재인 하야 국민재판 광화문광장’이라는 제목의 전면 광고가 계속 실렸습니다. 서울 종로경찰서에 미리 신고된 10월 3일 집회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종로서 10.3(木) 집회 안내》

※ 시간 및 인원은 신고 기준입니다.

○ 자유한국당

- 12:30∼23:59 세종로소공원 10,000명

- 집회명 : 한정유린타도 및 위선자 조0 사퇴 촉구 집회

○ 범국민투쟁본부

- 01:00∼23:59 교보빌딩→사랑채 5,000명

- 집회명 :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국민대회

○ 일파만파

- 09:00∼22:00 동화면세점·126맨션 2,000명

- 집회명 : 대한민국 체제수호 국민저항운동

○ 석방운동본부

- 10:00∼20:00 서울역→시청→동아일보→세종문화회관 50,000명

- 집회명 : 박 前 대통령 무죄 석방 촉구 집회 및 행진

○ 국본

- 08:00∼23:59 대한문·효자치안센터 50,000명

- 집회명 : 박 前 대통령 무죄 석방 촉구대회

○ 서울국학원

- 10:00∼13:00 광화문 중앙광장→보신각 600명

- 집회명 : 개천절 문화축제

○ 구국총연맹

- 13:00∼22:00 효자 치안센터 앞 40명

- 집회명 : 태극기 집회

○ 서울 겨레 하나

- 19:00∼21:00 트윈트리A동·소녀상 20명

- 집회명 : 강제동원 역사 사과 목요행동 및 행진



실제 광화문 분위기는 어떨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한겨레> 정치팀에서는 저하고 장나래 기자가 현장 취재를 맡았습니다.

여의도에서 이른 점심을 마치고 전철 5호선을 탔습니다. 12시 조금 지나 애오개역을 지나는데 전동차에 사람이 꽉 들어찼습니다. 심상치 않았습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자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승강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케이티 쪽 출구는 아예 막혀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1번이나 8번 출구를 이용해서 올라가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 나왔습니다. 사람들에 밀려서 겨우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광화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평소 집회 때는 사람이 오지 않던 세종문화회관 계단 위 공간도 자유한국당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한 쪽에 자리를 펼쳐 놓고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선교 의원이 “문재인 항복, 조국 구속”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당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습니다.

자유한국당 당원들은 손팻말과 함께 태극기나 성조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손팻말은 ‘문재인 하야’, ‘문재인 퇴진’, ‘문 정권 심판, 조국 구속’, ‘지키자 자유 대한민국’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북조선에 충성맹세 하나님의 심판시작‘, ’사탄졸개 공산좌파 비밀지령 체제전복‘이라는 개인 팻말도 보였습니다.

케이티 앞 집회장 쪽에서 전광훈 목사의 연설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집회를 위해 태풍을 쫓아내 주셨다”고 했습니다. 광화문에서 자유한국당 집회 참가자와 태극기 집회 참가자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파는 자꾸자꾸 늘어났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까치발을 해봤지만, 인파의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광화문 일대에서 차량 통행은 불가능했습니다. 전철 운행도 상당한 차질을 빚었습니다.

집회 참가자들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서초동보다 우리가 더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오후 1시께 집회 참가자가 국민과 당원을 포함하여 300만명 이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자유한국당 주최로 열린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오후 1시 10분에 전희경 의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자유한국당 집회가 시작됐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와 서울시청 앞 상황이 궁금했습니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너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흐름이 엇갈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밀려서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밀지 마!”, “질서 질서” 등의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엄마 품에 꼭 안긴 어린이의 눈에는 공포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 몇 사람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밀고 밀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고 있다”는 황교안 대표의 우렁찬 연설이 들렸습니다.

결국 저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차도를 멀리 돌아서 30분 만에 겨우 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앞, 동화백화점 앞에서는 각각 다른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못살겠다 끌어내자 조국 문재인 퇴진 국민행동’, ‘북진 멸공통일’, ‘탄핵 부역자 처벌’, ‘문재인 586 끝장내자’ 등의 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서울신문사와 조선일보사 사이 태평로에도 서울역 쪽에서 오는 사람들과 깃발이 가득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환한 얼굴이 그려진 대형 깃발에 ‘쾌유 기원’이라고 쓴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길가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장을 받아서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주술적 목적으로 쇠말뚝 4천701개를 박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가 반드시 망하는 특징 5가지’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 거짓 선동을 해서 나라를 망하게 한다.

2. 대기업의 소유주를 적폐 세력으로 보고 부를 대물림하지 못하게 하려고 상속세를 과다하게 부과해서 공산화시킨다.

3. 많이 가진 자의 재산을 놀고먹는 자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과 대기업을 무너뜨리는 정책으로 경제를 파탄시킨다.

4.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한다.

5.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를 적폐 세력으로 보고 대형교회를 공격하고 방송을 통해 불륜관계를 미화하는 드라마 연속극을 통해 가정을 파괴시키고 동성애 법을 만들어 더러운 세상을 만든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 지도부와 참석자들이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저는 광화문과 서울시청 근처에서 열리는 자유한국당 장외 집회나 태극기 집회에 비교적 자주 가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번 개천절에 열린 집회는 과거에 비해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집회 참가자들의 문재인 정부를 향한 증오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뭔가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사 근처를 지나는 데 인도에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보았습니다. 무속인 복장의 여성이 펄쩍펄쩍 뛰며 “문재인 죽어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인들의 선동이 훨씬 거칠어졌다는 것입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을 감싸는 이유를 “민정수석을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딸과 아들의 충격적인 치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장외 집회지만 제1야당 원내대표가 지라시 수준의 무책임한 막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건너편 집회에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개헌안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뺀 것은 사회주의 개헌을 시도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습니다. 홍준표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자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단체는 이날 광화문 집회를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대규모 인파를 동원하는 장외 집회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 같습니다. 반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을 최대한 자극해서 분노를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내년 4월 15일 총선을 치르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개천절에 제가 광화문에서 목격한 것은 어쩌면 ‘정치의 사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참 서글픈 날이었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동영상 뉴스 ‘영상+’]
[▶한겨레 정기구독] [▶[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정치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