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소통] 하멜과 아이돌 그룹의 공통점, 수평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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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은 카리스마 대신
토론·경청으로 동료 이끌어
투명성·신뢰로 13년을 버텨
리더십은 주장 아니라 행동


요즘 제주도 출장이 잦다. 이번에는 한창 뜨고 있는 남자 아이돌 그룹 AB6IX(에이비식스)와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의 제주도 자취를 찾아가는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서였다. 돌이켜보면 하멜은 조선에서 활동한 최초의 엔터테이너였다. 제주의 행정기관이 모여 있던 제주목 관아와 서울의 궁궐에 불려 가 노래를 부르고 서양 춤을 추어야 했으니까.

"조선 왕은 우리에게 네덜란드 춤을 추어 보고 노래도 불러 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 왕이란 효종을 말한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바람에 최초로 해외 경험을 한 조선 왕으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하멜의 조선 방문은 여러 가지 최초의 기록을 양산한다. 조선에 최초로 서양 와인을 선물한 사람도 하멜이었다. 최소한 몇 달 동안 먼바다를 항해해야 했던 대항해 시대에 와인은 안전한 음료였다. 반면 그가 조선으로부터 받아 마신 것은 '아락(ARAK)'이라고 기록했던 전통 소주였다. 각각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술이었고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만남을 상징하였으니 문명 교류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하멜은 조선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기록한 최초의 서양인 골목길 여행자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서양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주인공이었다.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것 말고도 하멜과 아이돌 그룹은 공통점이 많았다. 하멜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23세, 우연하게도 함께 녹화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 한 명과 나이가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36명 하멜 일행의 평균 나이도 아이돌 그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배를 탄다는 것은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스타트업과 마찬가지였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다. 꿈이 크고 담대한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이유다. 아이돌 그룹 에이비식스 멤버들에게 누가 리더인가 질문을 던졌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저희 그룹은 따로 리더를 두지 않습니다. 네 명이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의견이 다르면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깜짝 놀랐다. 36명이 살아서 제주도에 도착했던 하멜 일행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멜은 원래 리더가 아니었다. '스페르베르'호가 난파되면서 배에 타고 있던 선장이 숨졌기 때문에 갑자기 공동 리더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하멜은 흔히 생각하는 '카리스마형 리더'와는 다르다. 목소리가 크고 남을 지배하려는 성격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토론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수평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낯선 땅에서 동료들과 재산을 모으고 이를 공평하고 투명하게 나누면서 신뢰를 얻었다. 그가 전라도 강진에 체류하던 시절 3년 연속 극심한 흉년으로 먹을 것이 모자랄 때도 먹을 것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하멜 표류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외출에서 얻어 온 것들을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졌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법이다. 재물의 절대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눔의 투명성과 신뢰성이다. 재물뿐 아니라 아픔과 슬픔도 나누었다. '상상력 사전'에서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기쁨이 아닌 고통에서 연대 의식이 생기고, 즐거운 일을 함께한 사람보다 고통의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 더 친근함을 느끼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공감(sympathy)이란 단어도 어원적으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그리스어 'soun pathein'에서 왔다고 한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와 같은 현실과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하멜 일행은 리더를 신뢰하고 굳게 의지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단단한 연대 의식이 탄생한 이유다. 리더는 출구전략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13년28일 만에 여수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뒤에도 조선에 있는 동료들이 모두 풀려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귀국행 배에 탈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리더십은 말과 주장이 아니라 행동이다.

[손관승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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