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조

金翅鳥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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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단편 소설
저자 이문열
출판사 현대문학
출판일 1981. 12.

작품해설

1981년 『현대문학』 12월호에 발표한 이문열의 단편소설.

1982년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 작품은 「들소」, 「시인」 등과 함께 작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신념을 소설화한 이문열의 대표적인 ‘예술가 소설’이다. 작중의 주된 갈등은 서예에 천부적 소질을 지닌 고죽(古竹)과 그의 스승 석담(石潭) 사이의 서로 다른 예술관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참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소설의 도입은 죽음을 앞둔 고죽의 유년시절 회상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개가로 숙부의 집에서 자라던 고죽은, 숙부의 망명과 함께 석담에게 맡겨진다. 석담은 고죽을 문하로 거두기를 한사코 거부하는데, 이는 도(道)보다 예(藝)가 센 고죽의 작품이 자신의 예술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죽은 석담과 애증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급기야 스승 몰래 서예를 익히게 된다. 고죽의 타고난 소질만은 무시할 수 없었던 석담은 마지못해 고죽을 제자로 거두지만, 스승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반발과 욕심으로 인해 문하를 뛰쳐나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나름대로의 성취를 이루게 된 고죽은 다시 석담의 문하로 돌아오게 되지만, 석담과 고죽의 예술관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급기야 서른 여섯 되던 해에 석담은 고죽의 문하를 완전히 떠나 함부로 서화를 흩뿌리며 방황한다. 결국 고죽은 석담이 죽은 후에야 스승이 자신에게 관상명정(棺上銘旌)을 맡길 만큼 자신과 자신의 글씨를 아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이러한 과정을 겪은 고죽이 자신의 죽음에 임박하여 과거 자신의 작품들을 회수하여 불태우는 것으로 맺어진다.

예술이 다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술관을 가진 고죽이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깨달음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불태우는 순간 금시조의 환영을 본다는 결말은 곧 작가 자신의 유미주의적 예술관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줄거리(사이버 문학광장 제공)

고죽(古竹)은 엷은 묵향을 맡으며 무엇이 스쳐 간 느낌에 눈을 떴다. 묵향으로 보아 추수(추수)가 다녀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고죽은 천장을 멍하니 보며 유년기의 아침을 추억한다.

다섯인가 여섯인가 되던 해 흰옷에 산발한 어머니가 그를 쓸어안고 혼절하듯 쓰러진 아침, 할머니가 와서 그를 쓸어안고 우시면서 "아이고, 내 새끼, 이 불쌍한 새끼를 어쩔고? 그 몹쓸 년이, 탈상도 못 참아서......"라고 울던 그 홀로 된 아침들.

생각이 유년으로 돌아가자 고죽은 지금과 같은 그의 삶 속으로 어린 그가 내던져진 일을 생각한다. 그는 열 살의 나이로 숙부의 손에 끌려 석담(石潭)선생의 고가를 찾았다. 숙부는 국외로 망명할 계획이었고 숙부와 동문이요 오랜 지기였던 석담에게 자신을 맡겼다. 하지만 석담은 몇 안 되는 선생의 문하생들 사이에서 소학만 읽히고 나이 열 셋 되던 해에 가까운 소학교로 데려갔다. 처음부터 문하(門下)로 거둘 뜻이 없음이었다.

열여섯에 소학교를 졸업한 고죽은 석담선생의 집안에 정식으로 입문하려 하였다. 하지만 석담선생은 처음 그를 숙부에게서 떠맡을 때부터 차가운 경계로 대했다. 고죽은 신학문에 대한 동경을 외면한 채 가망 없는 석담선생의 살림을 맡아 꾸려 나갔고 그를 사모하고 동경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석담의 태도는 냉담할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석담선생 내외가 나란히 집을 비워 홀로 빈집을 지키게 된 그는 선생의 서실을 치우다가 그때까지의 연마를 한 눈으로 뚜렷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는 곧 서탁을 펼치고 글을 써내려 갔다. 체본과 흡사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때 석담선생이 운곡(雲谷) 최선생과 갑자기 들이쳤고 석담은 호통을 치지 않은 채 글씨는 두고 가라고 하였다. 고죽은 야릇한 호기심으로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두 선생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운곡은 고죽이 천품을 타고났다고 하였고 석담은 재기(才氣)가 너무 승하여 그를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신학문이나 익혀 제 앞을 가리기를 바랬다면서 아이와는 악연이라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하였다. 고죽이 석담 문하에 정식으로 이름을 얹은 것은 그 다음 날 이었다.

스물 일곱 때의 일이다. 조급한 성취감에 빠진 고죽은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기 확인과 자기 과시의 기회를 찾아 문하를 빠져 나왔다. 그 뒤 석달 동안 그는 백일장에서 장원도 하였고 진객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석담은 고죽이 가져온 종이와 곡식꾸러미를 불로 태운 후 환쟁이라 욕하며 대노하셨고 스승의 용서를 받는데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2년 동안 고죽은 다시 농사를 돌보고 나뭇짐을 해 날랐지만 선생은 그와의 대면조차 꺼렸다. 그 뒤 다시 용서를 받고 지필을 만지는 것이 허락된 후에도 석담선생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고죽이 나이를 먹고 글씨가 무르익어 갈수록 선생의 차가운 눈초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까지 번쩍였다.

그들 사제는 본질적으로 예술관이, 서화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석담선생의 글씨는 힘을 중시하고 기와 품을 숭상했으나 고죽은 아름다음을 중히 여기고 정과 의를 드러내고자 힘썼다. 그림에 있어서도 석담선생은 서화를 심화(心畵)로 여겼고 고죽은 물화(物畵)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고죽과 석담선생은 매죽논쟁, 예도논쟁 등을 통해 점점 더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급기야 고죽이 서른 여섯 나던 해 두 사제가 돌아서는 날이 오게 되었다. 그 무렵 고죽은 석담의 문하로 돌아간 팔 년동안 몹시 지쳐 버렸다. 그 전의 십년이 오직 석담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한 십 년이라면, 그 팔 년은 석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팔 년이었다. 그 사이 그의 기법은 난숙해졌고, 그의 이름도 차츰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고죽은 그의 속절없이 흘러 가 버린 청춘과, 자신만을 위한 서예가의 삶에 대해 허망감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던 석담선생은 바삐 종이와 붓을 찾아 종이에 단숨에 글을 쓸 힘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고죽은 "설령 글을 단숨에 쓰시고, 여기서 금시조가 솟아오르며 향상(香象)이 노닌들, 그게 선생님을 위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 물었고 선생은 "그와 같이 드높은 경지는 글씨를 쓰는 어떤 누구든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이르러 보고 싶은 경지다"라고 대답하였다. 계속되는 고죽의 지지 않는 물음에 선생은 벼루 뚜껑을 집어 던졌고 결국 그 자리가 그들의 마지막이 되었던 것이다.

석담선생의 문하를 떠난 고죽은 서화를 흩뿌리며 술과 여자에 파묻혀 살았다. 이것이 비정한 스승에 대한 정당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물론 그도 자기가 즐기고 있는 세상의 대가가 지난날의 뼈를 깎는 듯한 수련을 보상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열한 쾌락은 그의 공허감을 자극하였고, 다시 그 공허감은 새로운 쾌락을 요구하는 악순환을 계속 해야만 했다. 그는 푼돈에, 갖가지 쾌락에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흘러 흘러 총독부의 고등문관을 아들로 둔 허참봉이라는 친일지주의 식객으로 있게 된 때가 있었다. 참봉은 서화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 묵객들을 불러 술잔이나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하루는 공교롭게도 석담선생의 몇 안되는 지인이며 고죽자신도 육칠 년 가까이 한학을 배웠던 운곡선생이 찾아 들었다. 고죽이 반갑게 맞으려 하자 운곡선생은 뜻밖에도 "석담이 죽을 때가 되긴 된 모양이로구나. 너같은 것도 제자라고 돌아올 줄 믿고 있으니...... 괘씸한 것"이라면서 되돌아 가버렸다.

고죽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죽은 그러한 떠돌이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나이도 어느새 마흔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고죽은 막연히 생각해 오던 늙은 스승에게로의 회기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음을 깨닫고 그에 앞서 자기정화를 위해 오대산의 산사를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법당 뒤 축대에 앉아 있던 그의 눈앞에 희미하게 바랜 벽화 하나가 들어왔다. 머리는 매와 비슷하고 몸은 사람을 닮았으며 날개는 금빛인 거대한 새의 형상이었다. 주지는 바로 그것이 금시조라고 하였다. 그때껏 고죽의 머리 속에 살아 있던 금시조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어떤 힘의 상징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퇴색한 그림을 대하는 순간 그 새는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되었고 고죽은 자기의 글에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광경을 보면 그것으로 그의 삶은 충분히 성취된 것이라던 스승을 이해할 것 같았다.

다시 스승을 찾아간 고죽은 스승을 다시 뵐 수 없었다. 이미 입관이 끝난 뒤였던 것이다. 그 뒤 석담은 거의 십 년 가까이나 두문불출 스승의 고가를 지켰다. 그리고 이미 다 거쳐 나온 것들로 여겨 온 여러 서체를 다시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고죽은 거인인 추사를 만나 추사에게 사로잡혔지만 곧 예술관의 다름으로 인해 그의 노선을 따를 수 없었다. 또한 스승의 전통적인 예술관과 화해도 시도했지만 끝내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늙은 고죽은 도심의 화랑가를 돌며 자신의 작품을 무조건 거두어들이는 중이었다. 그것은 명확한 죽음의 예감과 결부된 것이었다. 지금의 고죽은 그의 세포가 하나하나 파괴되어 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거두어 무엇에 쓰려 하느냐는 주위의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묵묵히 화랑가를 돌며 자신이 무심코 흘려 왔던 작품들을 모으려고 하였다. 그의 곁에는 방랑시절 인연을 맺은 매화라는 기생 사이에서 생긴 추수가 있었고, 그가 아끼는 애제자인 초헌이 있었다. 또한 고죽이 스물 두 살에 운곡선생의 중매로 인해 맞은 아내에게서 낳은 남매도 있었다. 지금 고죽의 죽음 앞에 그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고죽은 조용히 모아 놓은 자신의 글씨와 그림들을 꺼내 놓으라 하였고 하나하나씩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원수의 작품을 대하듯 준엄하고 냉정하게 평가를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왼편으로 제쳐놓도록 하였다. 그렇게 새벽부터 시작된 작업은 아침 열 시가 넘어서야 분류가 끝났다. 결국 오른쪽으로 넘어간 서화는 단 한 폭도 없었다. 고죽은 고개를 힘없이 떨구며 스르르 무너졌다. 결국 고죽은 금시조를 보지 못했다. 미적 완성을 향해 솟아오르는 관념의 새, 자기의 붓끝에서 날아가는 그 새를 보려 하였건만 그는 끝내 그 새를 보지 못했다.

고죽은 장독대 옆 화단으로 서화들을 싸가지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일생동안 저 그림들로 자신과 세상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말을 하였다. 결국 고죽은 자신의 서화들에 불을 놓았다. 그 때 고죽은 그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를, 찬란한 금빛 날개와 그 험한 비상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밤 8시경 향년 72세로 고죽은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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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권영민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1948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버클리에서 한국문학 초빙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현대문학평론상, 1992년 김환태평론상, 2006년 만해대상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서울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문학사』, 『우리문장강의』,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한국 계급문학 운동사』,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 정신』, 『월북 문인 연구』, 『한국문학 50년』, 『윤동주 연구』, 『작은 기쁨』 『문학의 이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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