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필름` 끊겨도 의식 있다…"심신미약 적용 신중해야" 법원행정처 보고서

입력
수정2020.06.27. 오후 3:09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잔인한 강력범죄를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심신미약)"고 주장해 감형을 받은 판결들이 여론의 질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술에서 깼을 때 기억이 없는 '블랙아웃' 상태에 있어도 의식은 남아있기 때문에 감형은 신중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제출됐다. 연구팀은 블랙아웃 상태 의식 여부를 법관의 재량에 맡기는데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진단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일 성균관대 산학협력단이 법원행정처에 제출한 '형사재판에서 블랙아웃 현상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연구팀은 "주취상태는 이후 블랙아웃 여부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무의식 상태에서는 목적을 갖고 행동할 수 없지만 주취상태에서는 목적과 의도를 갖고 행동한다"고 덧붙였다. 또 "나중에 블랙아웃 상태로 판정되더라도 행동 순간은 완전한 의식 상태로 판정된다. 자발적으로 눈을 뜨고 싸움이나 성폭행을 하는 등 의도적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이 "필름이 끊겨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범행 당시에는 의식이 있어 심신미약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은 형법에 규정돼 있다. 형법 제10조 제2항은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처벌을 할 수 없다. 이로 인해 만취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에게 범죄의 책임을 한정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두순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8년 8세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두순씨는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돼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피고인이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범행 당시 의식이 있었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 주장이다. 블랙아웃 상태는 △ 단순 블랙아웃 △ 패싱 아웃(의식이 사라진 상태)로 나눠진다. 단순 블랙아웃 상태는 기억만 나지 않을 뿐 의식이 정상이다.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이 적용될 여지가 없는 셈이다. 반면 패싱 아웃은 잠잘 때와 같이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다. 이 경우에도 의식을 잃으면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와 의식을 잃은 상태에 자발적으로 이르렀는지에 따라 범행에 대한 책임이 따를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피고인이 술로 인한 블랙아웃 상태에서 범행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더라도 형사 책임을 줄여주지는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만취 상태가 심신미약으로 인정돼 감형 받는 사례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에는 형법 제10조 제2항에 규정된 심신미약자에 대한 감경규정을 임의로 적용하도록 변경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기도 했다. 개정 전에는 심신미약이 인정될 경우 법관이 감형을 해야만 했다면, 이제는 피고인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더라도 법관의 판단에 따라 감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한 재경지법 판사는 "술로 인한 심신미약 감형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 추세이고 피고인이 블랙아웃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행위에 비춰봐서 심신미약 정도를 판단한다"고 밝혔다. 또 "심신미약이 인정 되더라도 법 개정으로 재량에 따라 감형하지 않을 수 있어 실제 감형되는 사례는 더욱 줄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연구팀은 음주정도에 대한 판단이 법관에게만 맡겨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이 상태에 대해 정확히 진단한 것을 토대로 해야 법관이 법률적 책임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감정결과에 대해 법관이 자유롭게 판단을 할 여지가 넓게 인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일반 병원에서 작성된 진료기록이나 소견서만 보고 심신장애를 판단하는 것도 부정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알콜 블랙아웃의 경우 전문감정인의 감정을 거치지 않고 책임을 판단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며, 판단 경계에 위치한 케이스는 감정을 반드시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희영 기자]

▶네이버 메인에서 '매일경제'를 받아보세요
▶'매일경제' 바로가기 ▶뉴스레터 '매콤달콤' 구독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