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면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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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김소민의 아무거나]‘불을 지피다’와 <그래비티>에서 배우는 생존을 위한 사투, 그 의미의 무의미함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잭 런던의 단편소설 ‘불을 지피다’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남자는 무속인이다. 청바지를 입고 귀를 다 덮는 헤드폰을 썼다. 머리는 짧게 쳐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숨진 공군 조종사를 모신다고 했다. 40대 초반인 그가 무속인이 되기까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사업에 손만 대면 쪽박을 찼다. 주머니에 달랑 1만원이 남은 날, 그는 한적한 바닷가로 갔다. 죽자고 결심했다. 탈탈 털어 소주 세 병과 참치캔 하나를 샀다. 그 와중에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놓고 고민했다. 노을을 보며 소주를 병째 마셨다. 바다로 뛰어들려고 주섬주섬 일어서는데 한 낚시꾼 행색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불 있어요?” 손으로 바닷바람을 막고 라이터를 켜주네 어쩌네 하다 죽기로 한 걸 잠시 잊었다. 낚시꾼이 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싹싹 비운 참치캔이 눈에 들어왔다. “죽겠다면서 안주는 왜 사고, 또 그걸 싹싹 비워 먹을 건 뭐야. 게다가 왜 그렇게 맛있어.” 입맛을 다시며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죽기 전 먹은 참치캔의 맛은



그는 나한테 5월에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4년 전이다. 이번 5월도 다 가는데 좋은 일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별로 영험하진 않은 거 같다. 5월에 대한 기대는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가끔 그 참치캔 맛을 상상한다. 아침에 눈을 뜨기 괴로운 날 특히 그렇다. 사표를 내고 1년이 넘어가자 불안이 덮쳤다. 흰머리가 쑥대밭이다. 이제까지 싼 똥만 해도 트럭 한 대분은 될 텐데 나는 대체 뭘 했을까? 뭔 놈의 방황을 40년 동안 하나. 천직이 방황인가. 왜 살까? 일어나기 싫어서 이런 생각까지 내달리는지, 이런 생각 때문에 일어나기 싫은 건지 헷갈린다. 이불이 모루(쇳덩이)처럼 느껴질 때면 그 바닷가 참치캔을 떠올린다. 배가 고프다.

잭 런던의 단편소설 ‘불을 지피다’에서 그 남자는 불을 못 피워 죽었다. 이름도 없다. 알래스카 근처 클론다이크강 주변이다. 해가 뜨지 않는 낮이 이어졌다. 침을 뱉으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영하 50도에 그는 동료들이 있는 채굴지까지 걷고 있다. 개 한 마리가 따라온다. 온통 눈밭이다. 발을 헛디뎠다간 10㎝ 물웅덩이 때문에 죽는다. 언 강과 눈 사이로 보이지 않는 샘물이 흘렀다. 그는 헛디뎠다. 젖은 신발을 말려야 한다. 불을 피우려 장갑을 벗자 손이 얼어붙었다. 성냥을 쥘 수가 없다. 두 손목을 맞대 성냥을 붙들어 무릎에 대고 그었다. 불이 붙었다. 장소를 잘못 잡았다. 가문비나무 아래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들이 떨어져 불씨를 덮었다. 다시 시도한다. 잔가지를 쥘 수가 없다. 손을 허벅지에 쳐봐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구 달렸다. 넘어졌다. 일어나 또 달렸다. 넘어졌다. 흰 눈밭에 점처럼 죽어버렸다. 그때까지 그가 생각한 건 한 가지다. ‘정말 춥다.’ 개는 살아 계속 걸었다. 그 남자는 개보다 터무니없이 약하다.

이 단편집엔 징글징글한 생존 투쟁이 이어진다.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추위, 무릎을 꺾어버리는 가난이다. 주인공들이 죽건 말건 눈밭은 이어지고 경기는 계속된다. 40대 퇴물 복서 톰은 빵 한 조각으로 저녁을 때우고 링 위에 올랐다. 권투로 청춘을 보냈다. 손가락이 망가져 이제 공사판에서도 일할 수 없다. 스테이크 한 장만 먹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살 돈이 없다. 상대는 팔팔 나는 20대다. 톰은 최대한 힘을 아껴가며 경기를 이어가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맞고 고꾸라졌다. 휴게실에서 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비가 없어 3㎞를 걸어야 한다. 왜 그는 질 싸움을 계속하나. 이 고통에 의미가 있나? 그런 질문이 비집고 들어올 새가 없다. 톰은 지금 더럽게 배가 고프다.

첫 탄생은 수동태, 이번은 능동태



영화 <그래비티> 속 주인공의 이름은 라이언 스톤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원해서 여자애인데 남자 이름을 지었다. 라이언은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핍을 경험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살 딸은 술래잡기를 하다 머리를 다쳐 죽었다. 그렇게 어이없게 사라졌다. 그 후 라이언의 삶은 궤도를 이유 없이 도는 돌덩이다. 퇴근한 뒤엔 아무 라디오나 들으며 계속 운전했다. 아이가 숨질 때 그는 운전하고 있었다.

라이언은 지금 지구로부터 600㎞ 상공, 기온이 125도에서 영하 10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곳, 소리도 산소도 중력도 없는 우주에서 일주일째 통신 설비를 수리하고 있다. 동료 맷이 우주에서 좋은 게 뭐냐고 물으니 그녀는 “고요함”이라고 답한다. 라이언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그런 우주에 살았다. 그녀를 삶에 묶어둘 끈이 없었다.

미사일에 맞아 위성이 파괴되고 잔해 폭풍이 휘몰아쳐온다. 무엇이든 부여잡아야 한다. 손을 놓치면 끝이다. 맷은 “갠지스강에서 태양을 봐, 환상적이야”라는 말만 남기고 우주 멀리 밀려가버렸다. 라이언만 남았다. 산소는 떨어지고 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죽을 둥 살 둥 도착한 소유스호에 연료가 없다는 걸 알게 된 라이언은 눈을 감았다. “시스템을 끄면 상처도 없잖아.” 우주는 잔인하게 무덤덤하고 환장하게 아름답다.

그때 라이언을 다시 지구로 끌어당긴 건, 맷의 환영을 한 자신의 목소리였다. 라이언에겐 여전히 죽고 난 뒤에 울어줄 한 사람이 없다. 그녀는 기도하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자기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중요한 건 지금 무엇을 선택하느냐야.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 집에 갈 시간이야.” 이 이야기는 상처로 조각난 한 여자가 자신을 재조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목숨을 앗아갈 지경의 고통을 뚫고 라이언은 다시 태어난다. 첫 탄생이 수동태였다면 이번 탄생은 능동태다. 우주선 안에서 둥둥 떠 웅크린 자세를 펼치는 라이언의 모습은 그대로 태아다. 지구로 돌아갈 아무런 이유가 없더라도 라이언은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자기 목소리가 그렇게 명령한다.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엄청난 여행일 거야.” 아기처럼 다시 땅 위에 선 라이언을 거인처럼 찍으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그 첫걸음에 상찬을 바친다.

“오늘 하루도 살았다 장하다 그러고 그냥 잔다”



라이언 안에 그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오는 건지 알 수 없다. 성냥불을 못 켜 죽어버릴 수도 있는 한 사람이 고통을 견디며 스스로 자신을 태어나게 하는 힘은 우주만큼 불가사의하다.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온종일 민원 업무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친구가 내게 되물었다. “야! 하루를 살아내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는 매일 오늘 하루도 살았다 장하다 그러고 그냥 잔다.” 왜 사냐고? 오만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불을 걷어차고 참치캔을 까먹어야지. 오늘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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