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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주록(漂舟錄) .1 표주록 서 (漂舟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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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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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주록(漂舟錄) .1



표주록(漂舟錄) 조선 영조 때 이지항(李志恒)이 표류한 경험을 쓴 일기체의 기록.

   부산에서 영해(寧海)로 가던 중 파선되어 일본의 북해도(北海道)까지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1756(영조 32) 4 13일부터 이듬해 3 5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약 1년여의 기록이다.

   표류되었던 동안의 기록이 많고 나머지는 어디에 머물렀다는 정도의 메모에 불과하다. 날짜도 정확한 날을 적지 않고, ‘다음날 6일 뒤’ 등으로 적고 빠진 날도 많다. 저자는 무관이었으나 일본에서 지은 몇 편의 시와 일기로 볼 때 학문도 상당수준이었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일행을 안정시키고, 물이 떨어지자 증류수를 만들어 마셨으며, 갑자기 물개가 나타나 요동하자 괘()를 풀어 위안하는 등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이들 일행은 부산을 출항한 지 16일째 되는 날 일본의 북해도 서해안에 표착하여 아이누족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가 마쓰다(松田)에 도착, 에도(江戶)와 오사카(大阪)를 거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가 이듬해 부산에 귀항하였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이들이 마쓰다에 있을 때 그곳 태수 등과 불교·신()·유교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교 포교에 관하여 필담한 것이 매우 많다.

   맨 끝에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가운데 에조(蝦夷)지방에 언급된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였고, 정유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왜상선을 타고 안남국(安南國)을 세번이나 내왕한 조완벽(趙完璧)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표주록 서 (漂舟錄序) 

李先達名志恒字茂卿。先祖以永川學士。寓居萊府。乙卯別試武科。

丁巳夏薦守門將。病不得取才。屬守禦軍官。仍授本廳將官。資至六品。遭父喪下鄕終喪。

丙子春有寧海往來之事。聞釜浦人孔哲金白善。與邑居人金汝芳。同事興販魚物。乘船往江原道。沿海各邑。當過其處云。故三斗糧米錢文二兩。到船頭落送奴馬

표주록

   이 선달(李先達)1은 이름은 지항(志恒), ()는 무경(茂卿)이다. 선조는 영천(永川) 출신의 학자로 동래부(東萊府)에 살아왔다. 을묘년(1735, 영조 11) 별시(別試)2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정사년 여름에 수문장(守門將)3으로 천거를 받았었다. 병으로 취재(取才)4에 응하지 못했고수어청(守禦廳)5의 군관(軍官)에 속해 있다가, 이어 본청의 정식 장관(將官)으로 임명되어, 자급(資級) 6()에 이르렀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상기(喪期)를 마쳤다. 그 뒤 병자년(1756, 영조 32) 봄에, 영해(寧海)에 왕래할 일이 있었던 차에, 부산포(釜山浦) 사람 공철(孔哲)ㆍ김백선(金白善), ‘읍에 사는 사람 김여방(金汝芳)과 어물(魚物) 흥판(興販 물건을 한 번에 많이 흥정하여 매매하는 일)을 같이 하는데,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을 다니려면 그곳을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서 말의 쌀과 돈 두 냥()을 가지고 뱃머리에 이르러 노복과 말을 돌려보냈다.


1. 이 선달(李先達) : 조선 시대,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선달이라 함.
2. 별시(別試) :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한 과거(科擧)로, 성종(成宗) 때부터 시작되었음.

3. 수문장(守門將) : 궁문(宮門)이나 성문을 지키는 무관직(武官職).

4. 취재(取才) : 조선 시대에 시행한 특별한 인재 등용 시험. 공신이나 고관 또는 특별한 양반의 자제로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않은 자나, 하급 관리로 있는 자를 지방 수령(守令)으로 삼기 위한 것이 주였으나, 다른 직의 관원을 뽑기 위해서도 시행되었음.

5. 수어청(守禦廳) : 인조 4년(1626)에 처음으로 설치했던 군영(軍營).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고, 그 부근을 중심으로 여러 진(鎭)을 지키기 위해서 설치했었던 것인데, 고종(高宗) 31년(1894)에 폐지되었음.
꽃향기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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