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여아 성폭행 3년형’… 폭행·협박해야만 강간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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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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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세계] 강간죄 구성 요건 논란 언제까지


10살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학원장이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받은 것을 두고 여론이 들끓고 있다. 법원은 해명자료까지 내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논란은 쉬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30년 이상 이어져온 강간죄 구성 요건 논란에도 다시금 불이 붙었다.

◆法 “폭행·협박 인정 어렵다”… 8년→3년 감형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등) 혐의로 기소돼 1, 2심에서 각각 징역 8년, 3년을 선고받은 이모(35)씨와 검찰 모두 상고장을 제출하면서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최종 판단을 받게 됐다. 이씨는 이달 19일, 검찰은 하루 앞선 18일 각각 상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지난해 4월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알게 된 초등학생 A(당시 10살)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음료수에 탄 술을 먹인 뒤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당시 피고인이 일어나려고 하는 A양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른 뒤 간음했다며 강간 혐의로 기소했고, 1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지난 13일 이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유일한 직접 증거인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만으론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피해자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고, 조사관이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라며 “이를 통해 피고인이 피해자의 몸을 누른 경위와 부위,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 피해자가 느낀 감정 등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미성년자 강간’ 아닌 ‘의제강간’ 인정돼 논란

항소심 판결이 알려진 이후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아동 성폭행범을 감형한 ***판사 파면하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에는 현재까지 10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법정형 중 가장 낮은 형량”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해명자료를 내어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해 원칙적으로 ‘강간죄 무죄’를 선고해야 하지만, 직권으로 ‘미성년자의제강간죄 유죄’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는 폭행이나 협박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13세 미만 아동과 간음했을 때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다. 재판부는 이 같은 직권 판단을 내린 이유와 관련해선 “이번 사안에 무죄를 선고한다면 적정 절차에 의한 신속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형사소송 목적에 비춰봤을 때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가 여전히 ‘가해자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며 “10살짜리 초등학생에게, 그것도 술을 마신 아이에게 성인 여성과 같은 기준으로 폭행·협박 여부를 따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지적했다.

◆30년 이어져온 ‘최협의설’ 논란 또다시 ‘활활’

이번 판결을 계기로 강간죄의 구성 요소인 폭행·협박을 매우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最狹義說)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협의설은 대법원이 1992년 4월14일 선고한 강간치상 사건에서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보기는 미흡하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 환송한 이래 30년 넘게 논란으로 남아있다. 당시 피고인은 평소 알고 지내던 피해자에게 ‘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한 뒤 성관계를 맺었으나 재판부는 둘의 대화 등을 근거로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계는 물론 법조계 등에서도 최협의설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2001년 ‘아내 강간의 성부와 강간죄에서의 폭행, 협박의 정도에 대한 재검토’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여성의 ‘필사적 저항’이 있으면 강간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왜곡된 관념의 소산”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는 “최근 판례는 최협의설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여전히 매우 엄격하게 폭행·협박을 바라봄으로써 판례에 역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배 대표는 “형법에 성폭력의 개념이 정의돼 있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강간이나 강제추행 같은 행위만 놓고 보면 그 구성 요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성폭력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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