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회용 컵처럼 버려졌다"...삼성전자 '메탄올 실명' 피해자의 유엔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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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6.11. 오후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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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인권이사회에서 연설하는 ‘메탄올 실명’ 피해자 김영신씨(유엔 라이브 웹TV 캡처)


“이곳에 계신 여러분 중 다수가 삼성이나 엘지의 핸드폰을 갖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핸드폰을 만들며 시력을 잃고 뇌 손상을 입었습니다”

지난 9일 오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35차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장에서 김영신씨(29)가 약 2분간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김씨는 삼성전자의 휴대폰 부품 하청업체에서 일한 지 3주만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김씨의 연설이 시작되자 회의장엔 정적이 흘렀다.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적어도 5명의 젊은이가 저와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런 응답도, 사과도, 보상도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일회용컵처럼 사용되다가 버려졌습니다. 아무도 제조업 파견이 불법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메탄올이 위험하다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장은 저에게 보상을 해줄 돈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메탄올이 인체에 유해한 것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장으로 향하는 김영신씨(노동건강연대 등 제공)

김씨는 이날 연설을 위해 한글로 큼직하게 적어놓은 영문 발음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는 종이를 코 앞에 갖다 대야만 글이 보였다. 김씨는 긴장했지만 끝까지 해냈다.

“저는 삼성과 엘지의 핸드폰을 만들다가 실명을 했는데 삼성과 엘지는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삼성과 엘지가 책임을 지기를 바랍니다. 한국 정부 또한 이 사안에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 우리의 삶은 기업 이익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씨와 동행한 노동건강연대의 활동가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김씨의 연설이 끝나고)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김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면서 “옆에 있던 활동가들의 두 손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모두가 울면서 영신씨를 끌어안고 손을 잡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들은 이어 “오후 토론회에서 영신씨는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했으며, 어느 누군가는 영신씨에게 ‘브레이브 맨! 존경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8일 유엔인권이사회는 이사회 산하의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한국을 방문하고 작성한 보고서에 대해 논의했다. 이 보고서에는 김씨가 겪은 삼성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메탄올 실명사건과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1000여명의 사망, 삼성전자 반도체·LCD 디스플레이 공장에서의 백혈병·뇌종양 및 난소암 등 직업병, 탄소배출율 증가폭이 전국 대비 4.5배에 달하고 주민들의 암 발병율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충남 당진 지역의 석탄발전소·현대제철소 문제, 유성기업의 노동조합 탄압, 울산 조선산업 노동자들의 치명적인 부상사고 등이 언급돼 있다.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은 이 보고서에서 삼성, 엘지 등 원청기업의 책임에 대해 거론했다. 이들은 “기업 활동 전반에 걸쳐서 인권이 존중되도록 원청기업들(lead companies)이 취해야할 조치들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라” 등 93가지의 권고사항을 보고서에 명시했다.

‘메탄올 실명’ 피해자 김영신씨의 유엔 연설문 (노동건강연대 등 제공)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의 한국방문 보고서가 공개되자 한국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답변서를 제출하고 구두답변까지 덧붙여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답변을 내놨다”는 평가가 나왔다.

노동건강연대와 국제민주연대를 비롯한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방한 대응 한국 NGO 모임’(NGO 모임)은 논평을 내고 “한국 정부의 답변서는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왜곡을 포함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으로 점철되어 있어 대한민국의 현실을 전혀 담아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부 답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NGO 모임에 따르면 이날 정부는 ‘한국 정부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무관용 입장을 확고히 해왔다’고 밝히면서, 유성기업 사안에 대해 ‘일부 기소’ 의견으로 검찰 송치했고 현대차에 대해서도 부당노동행위 수사를 계속 한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NGO모임은 이에 대해 “정부가 부당노동행위를 사실상 방조하거나 수사를 포기해 온 작금의 관행을 고려해볼 때 구두발언에서 힘주어 강조하기까지 한 ‘무관용 원칙’은 터무니 없는 허위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정부가 언급한 ‘일부기소’는 노조파괴의 핵심 사실관계가 아닌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안이며, 현대차의 부당개입은 2012년 압수수색 과정에서 검찰이 확보했음에도 추가 수사 없이 묵혀두다가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뒤늦게 공소제기를 한 것”이라면서 “(이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정부가 부당노동행위 무관용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NGO모임은 또한 “정부가 현대중공업이 하청업체 직원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주체로서 사용자가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 이후에는 원청 회사가 계약해지 등의 방식으로 사내하청 노조 활동에 개입하면 형사처벌을 받고 또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를 통해 노동3권을 보장받고 있다고 주장했다”면서 “무슨 근거로 그러한 답변을 제출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원청에 의한 하청노조의 약화 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당장 지난 달 광화문 고공 농성을 한 구미의 아사히초자화인테크노한국 지회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면서 “아사히의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자 사측이 11년간 갱신을 반복해 온 도급계약을 중도해지 했고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단했음에도 고용노동부와 검찰은 고소사건에 대해 2년째 ‘묵묵부답’”이라고 지적했다.

NGO모임은 또 “정부가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은 폭력·파괴행위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장했으나 철도노조 파업(403억 청구), 엠비씨 파업(195억 청구) 등에서 보듯 여전히 소극적 노무 제공 거부 자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나아가 나아가 정부가 주장하는 폭력, 파괴행위란 쟁의행의 목적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하여 사용자들이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로 인하여 어떠한 압력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으로서, 오히려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쟁의행위할 권리가 아주 취약함을 반증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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