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푹 빠진 법률가…미술과 법의 조화 꿈꾸다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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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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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법 전문가’ 김영철 법무법인 정세 대표변호사/예술은 영혼의 안식처/ 30여년 법조인 ‘딱딱한 삶’/ 전시 보러 다니며 재충전/ 사법시험 공부하면서도/ 극장 찾을 정도로 영화광/ 미술법 강사로 유명세/ 우연히 대학원 출강 시작/“실무에 많은 도움 된다”
검사 출신인 김영철(60·사법연수원 14기) 법무법인 정세 대표변호사에게 예술은 영혼의 안식처다. 30여년간 딱딱한 법조인 생활을 지탱해 준 힘이다. 그중에서도 영화와 미술을 좋아한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다가도 극장을 찾았다. 한때 화실을 다닌 적도 있다. 검사 시절에도 영화와 전시회를 보러 다니며 재충전 시간을 가졌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변호사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예술적 자질이 있었던 것 같다”며 “영화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얘기할 수도 있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언이 아니었다.


김 변호사는 2007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나 변호사를 개업했다. 미술이 인생 2막을 열어 줬다. 2010년 지인 권유로 서울대미술관의 창의적 리더를 위한 예술문화과정(ACP)을 들었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이듬해 서울대 미술경영 협동과정 대학원에서 ‘미술법’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기회는 우연처럼 온다’는 말을 실감했죠. 특강인 줄 알았는데 강의를 16주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2012년부터 매번 2학기에 학생들에게 미술 문화 관련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의라면 자신 있었다. 검사 시절 2년간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냈다. 2011년부터 6년여간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사 변호사 실무도 가르쳤다. 다만 미술법은 처음이었다.

“당시 미술법 교과서가 2권 정도 있었는데 좀 달랐습니다. 미술법에 미술뿐 아니라 영화와 음악을 포괄하는 것도 있었어요. 범위를 미술에 국한해 미술과 관련된 사건들을 분석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미술법 분야를 정리해 커리큘럼을 짰죠.”

김 변호사의 강의는 이내 인기를 끌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반드시 수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학생 대부분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미술관이나 갤러리, 박물관 등 미술계 종사자입니다. ‘강의 내용이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끼죠. 미술법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접근하는 제자들도 많아졌습니다.”

그가 가르친 제자는 약 150명. 이 중 미술법을 주제로 석·박사 학위 논문을 쓰거나 전공을 바꿔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미술법 전문가인 김영철 법무법인 정세 대표변호사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미술계 종사자들도 미술 관련 법을 알아야 현명한 대처가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지난 7년간 서울대 미술대학원 미술법 강의를 토대로 저서 ‘법, 미술을 품다’를 최근 출간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최근 출간한 ‘법, 미술을 품다’는 7년간 강의의 결과물이다. 기회는 또 우연처럼 왔다.

“사실은 영화와 법에 대한 책을 써 보고 싶었어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미술법 책을 내게 된 거죠. 당분간 미술과 관련된 법적 문제들은 이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웃음)”

김 변호사는 사무실 책꽂이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보여 줬다. 각종 논문, 기사 등을 출력한 것이었다. 형광펜 표시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책 제목은 그가 직접 지었다. “법이 미술을 품어 줘야 하고 미술이 법의 품을 떠나 위대하게 비상하길 바란다”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책을 썼다. 미술 발전을 위해 법률가로서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첫 강의 때 얘기하는데 미술계 종사자들이 미술법, 법률 상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무적으로 현명한 대처가 가능합니다.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죠. 예전에는 해태가 법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또가 억울함을 다 해결해 줬죠. 지금은 다릅니다.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저울은 법익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이 법익을 재달라고 하면 그 무게를 정확히 재 어느 한 사람에게 손해가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평등의 정신이죠. 그러려면 당사자도 자기 권리를 알고 주장해야 합니다. 게다가 법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어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맞는 거죠. 미술법,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 됩니다.”

정의의 여신상이 책 표지를 장식한 건 이런 맥락에서다. 다만 법전이나 칼이 아닌 예술의 상징인 붓을 들고 있다. 김 변호사의 아이디어다.

미술과 법의 관계는 더 이상 갈등이란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오늘날 협조 또는 후원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것. 실제로 미술을 둘러싼 갈등 구조는 국가 대 개인에서 개인 대 개인으로 넘어갔다.

“과거에는 국가 안보나 사회질서가 창작의 자유와 대립했습니다. 법은 미술의 규제자였죠.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도난, 명예훼손, 음란 등이 대표적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있긴 했지만 이제는 개인의 창작 활동에 대한 국가 개입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대신 1990년대부터 개인 간 법적 분쟁이 많아졌어요. 자본주의 발전으로 미술이 상품화되고 미술 시장이 커지면서 여러 법적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험과 세법, 저작권법 등이 중요해졌죠. 또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되는 등 예술가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법이 미술의 후원자인 이유입니다.”

다만 미술과 법 사이 갈등의 소지는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미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선도적 역할을 하는 반면 법은 특성상 보수적이기 때문.

문득 김 변호사의 미적 취향이 궁금해졌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와 프란시스코 고야. 고야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해 스페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두 사람 모두 청력 상실 등 역경을 딛고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며 “이들의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고가의 미술품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감상만 할 뿐이다. 특히 신진 작가들을 눈여겨본다. 서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의 졸업 작품 전시회를 찾곤 한다.

“졸업 작품 전시회에 가면 미래 인재의 작품을 미리 살 수 있어요.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죠. 무엇보다 작품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비싼 그림이 집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있을까요.(웃음) 미술품 감상자와 수집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정부가 고가의 작품을 수집해 전시해 주면 우리는 감상만 하면 되죠.”

김 변호사는 이어 미술 대중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방안으로는 프린트 베이커리(print bakery)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 미술품 대여를 예로 들었다. 프린트 베이커리는 유명 작가들의 원화를 디지털 판화로 만들어 팔거나 미술품 대여 등을 담당하는 서울옥션의 미술 대중화 브랜드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려면 미술관 문턱이 낮아야 한다”면서 “미술 작품을 많이 접해야 안목이 높아져 미술관을 자꾸 찾게 되니 사람들을 미술관에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술 작품과 미술가, 나아가 예술가를 법적으로 어디까지 인정할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미술품은 일반 물품과 달리 관세와 부가가치세 면세 대상이다. 또 정부가 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면 예술인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하다.

“이를테면 웹툰 작가가 예술인에 해당하는지 논쟁의 소지가 생길 수 있어요. 인공지능(AI) 창작물의 저작권 문제도 단연 화두죠. 지난해 10월 AI의 그림이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43만2500달러(약 4억8800여만원)에 팔렸습니다. AI 창작물의 저작권자를 누구로 볼지, 업무상 저작물로 볼 건지 등이 굉장히 중요해질 겁니다.”

김 변호사는 결국 정부의 역할을 당부했다.

“국가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가급적 규제를 적게 하고 지원은 많이 해야 해요. 최근 ‘트럼보’란 영화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로마의 휴일’ 각본을 쓴 달턴 트럼보의 실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트럼보는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 속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퇴출당했습니다. 11개의 필명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차례 받죠. 예술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권력자, 가진 자들이 예술을 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또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관장이 소신에 따라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펼칠 수 있게 임기를 늘릴 필요가 있다”면서 “위작 여부를 감정하고 분석하는 능력도 키워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 변호사는 청년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로펌의 신입 변호사나 학생들에게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좌절하기 쉽기 때문이죠. ‘5년 정도 내다보고 기본에 충실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미술계 인재를 양성하고 제대로 된 미술법 방향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인터뷰를 끝맺었다. 미술과 법, 두 세계의 조화로운 발전에 기여하는 게 그의 꿈이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김영철 변호사는

△1959년 서울 출생 △198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사법시험 합격 △1984년 사법연수원 수료(14기) △1985년 청주지검 검사 △2000년 사법연수원 교수 △2006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 △2007년 변호사 개업 △2010년 서울대미술관 창의적 리더를 위한 예술문화과정(ACP) 이수 △2011년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2012년 서울대 미술경영 협동과정 대학원 겸임교수, 서울변호사회 조사위원회 위원장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진흥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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