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65.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보는, 꽃목걸이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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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아사나(mala asana)’는 꽃목걸이 자세, 화환 자세라 한다. 쪼그려 앉아 발바닥과 발뒤꿈치를 바닥에 붙인다. 두 무릎을 벌리고 두 팔로 무릎을 감아 등 뒤로 돌려 둥근 꽃목걸이처럼 양손을 등 뒤로 돌려서 놓거나 맞잡는다. 장운동을 돕고 아킬레스건과 종아리 근육을 단련시켜 준다. 시연 조현정.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눈을 들어 밖을 보면 꽃 사태, 꽃 멀미가 날 지경이다. 문을 나서면 발걸음 딛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꽃물이 배어 나와 온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꽃은 꽃의 형상을 한 창문인 듯싶다. 꽃을 통해 꽃 너머 혹은 아득한 시간 저편을 보게 되니 말이다.

가뭇없이 사라져간 지난봄의 꽃향기처럼 잊혔다가 올봄에 되살아나는 순수의 순간이 돌연 꽃을 통해 사바세계에 그 그림자를 다시 홀연히 나투는 듯하다.

꽃은 관상 가치가 있어 아름다움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식물학적으로 속씨식물과 겉씨식물 등 종자식물의 생식기관을 꽃이라 한다.

“꽃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는 순간순간의 절정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겨나서 서로 맺어지며 살아가다 마침내는 스러져 가는 모든 생명들의 순간의 가장 순수한 몸짓이다. 나아가 돌 바람 물과 뭇별 등 모든 무생물들의 내밀한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 꽃은 내 마음 속 가장 순정한 순간의 표현이다. 꽃은 나와 남 아닌 그 모든 것을 그 간절함의 절정에서 맺어주게 하는 의미이다.”(이경철)

꽃은 시를 읊게 하고 노래를 만들고 이야기를 낳았다. 게다가 한 떨기 국화꽃은 봄부터 소쩍새를 또 그렇게 울게 하였다지. 꽃은 어느 누구에게나 친근한 소재로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대변해 줌은 물론 생활 속에 작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 더욱이 인간의 편리함에 우선한 산업개발로 환경 파괴가 위험 수위에 이른 현시점에서 꽃 사랑은 곧 자연과 환경의 사랑이라 할 것이다.

‘꽃 속을 들여다보면 황홀한 세계 억겁의 고요를 만난다. 그 꽃 속에 들어가 한 천년 자고 싶다’고 읊은 어느 시인의 혜안에 감탄한다. 그래서 ‘화개견불(花開見佛)’, 꽃을 보니 부처를 본다 했던가. 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은 청정한 부처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꽃의 곁에만 있어도 꽃이 눈을 주지 않아도 꽃의 숨결이 전해짐을, 순간 가슴이고 얼굴이고 온통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얀 꽃물이 들어옴을, 그러면서 알지 못하는 에너지가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느낌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꽃의 진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의 보편적인 상징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물이나 사람을 지칭할 때, 흔히 꽃 화(花)자를 그 말에 붙였다. 아름다운 얼굴을 화안(花顔) 또는 화검(花瞼)이라 한다.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화의(花衣), 아름다운 족두리를 화관(花冠), 신부가 혼례 때 타는 꽃가마를 화교(花橋)라 하였다. 꽃은 여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화인(花人),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화태(花態)라고 했다. 어린 처녀를 꽃봉오리라 하고 여인의 젊음이 가려 할 때 ‘꽃이 시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꽃은 점점 풍요, 존경과 기원의 매개, 사랑, 미인, 재생, 명예 등 더 높은 미적인 존재로 의미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꽃은 마침내 인간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언어가 되었다.

꽃은 영예와 소망의 상징이다. 아름다움에서 출발한 꽃은 영예로움과 고상함, 그리고 으뜸을 표상으로 하고 번영 풍요를 바라는 인간의 소망을 상징하기에 이른다. 경사스럽고 영화로운 일이 있을 때 ‘웃음꽃이 피었다’라고 하였고, 실패에 좌절하고 있을 때 ‘언젠가는 그대도 꽃필 때가 있을 거야’라고 격려했다.

또한 꽃은 존경과 경배, 숭배, 친애의 표시로도 쓰여 왔다. 꽃을 바치고 꽃을 선사하는 것은 사람들의 존경이나 외경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꽃은 신을 경배하거나 신에게 소망을 빌 때 바치는 예물이었다.

꽃은 사랑의 정표이다. 사랑은 아름답다. 그래서 꽃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상징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의 부인 수로에게 한 노인이 철쭉꽃을 꺾어 바치며 헌화가를 읊고 있다. 또 고려 충선왕은 몽고를 다녀올 때 사랑했던 몽고 여인에게 정표로 연꽃을 꺾어 주었다. 구운몽에서는 주인공이 팔선녀에게 던진 꽃 이야기가 나온다.(*이상희의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참조)

꽃은 우리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다. 순간순간의 삶을 아름답고 진지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좋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국 축제 등이 있을 때 일상에 쫓겨 미루다 얼마 후에 그곳에 가 보면 벌써 시들었거나 꽃이나 꽃잎 꽃봉오리들이 이리저리 바닥에 나뒹구는 허망한 모습에 아연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꽃은 언제든 생각나면 바로 그 순간에 찾아가 그 꽃을 보아야 하고, 언제든 만났을 때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꽃들은 결코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여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끌어올릴 뿐이다. 꽃에겐 피는 일도 지는 일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그때그때의 소중한 삶의 순간인 것이다.

“오늘의 일을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내일을 믿지 마십시오. 내일은 결코 당신의 시간이 아닙니다. 있다면 지금 이 순간순간이 있을 따름입니다. 부디 이 순간을 열심히 사십시오”라며 꽃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를 열어야겠다.

산길이나 동네 골목길을 걷다 보면 발밑에도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작은 풀꽃 한 포기가, 잠시 발걸음 멈추고 좀 보고 가라고 말해 주고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항상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꽃과 나무들이지만, 우리 마음이 그것들과 마주치는 것에 무심하다면 그 존재는 우리의 생활에서 무의미하다는 말일 테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풀꽃, 나태주)

꽃의 이용은 사용 방법이나 의미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인류 역사에서 함께 공존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꽃은 아주 옛날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선물에 사용되었고, 여러 개의 꽃을 묶은 꽃다발·꽃목걸이 형태로 사용하는 관습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꽃은 예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묶어주는 메신저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누구나 기뻐하는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통일 신라 때 설총이 지은 설화(說話) 화왕계(花王戒)가 전해지고 있다. ‘꽃나라를 다스리는 화왕 모란은 자기를 찾아오는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다가, 할미꽃 백두옹의 충직한 모습에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간곡한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道理)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설총이 신문왕에게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킬 것을 경계한 글이다.

꽃은 그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리고 그윽한 향기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의 정취를 더욱 깊게 해준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면 너무 좋아 정신이 몽롱해지네’라고 노래했는가 하면, 매천 황현은 ‘꽃은 천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인 김동리는 ‘꽃을 보고 그렇게 충격을 받는 것은 거기서 곧 신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1983년 충북 청원의 두루봉 동굴 흥수골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4~5세의 어린아이 뼈의 화석이 평평한 돌 위에 누워 있는 상태로 드러났다. 그 주변에 여섯 종류의 식물 꽃가루가 채집되었는데 흥수 아이의 가슴과 주변에서 국화 가루가 확인되었다. 흥수 아이 곁에서 발견된 꽃가루는 먹고사는 생존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선사시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죽은 자를 위해 국화 한 아름 따다 꽃향기 가득한 공간에서 애도 의식을 치른 한반도 초기 사례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꽃과 함께하였던 것이다.”(박은경)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꽃이다. 꽃은 모든 인류가 생활하면서 가까이했고 아름다운 것 중 하나였다. 원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꽃이 있는 곳이야말로 정서적으로 풍요를 느꼈기에 언제나 활짝 핀 꽃밭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무릉도원을 복사꽃이 만발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신들이 또 다른 생명을 창조할 때마다 새로운 꽃이 태어난다. 그만큼 꽃은 정신의 창조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 있기에 신들이 태어나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꽃들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들인가.

필자가 오래전 인도에 갔을 때 오성급 호텔 정문에 서 있는, 장애를 막아주고 번창함과 풍요를 선사한다는 가네쉬 상 앞에 매일 아침 ‘말라’, 꽃목걸이를 걸어두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첨단 문명과 전통의식이 만나는 시점이다. 호텔 출입구에 도열해 선 종업원들이 투숙객들이 입장 시 일일이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는 모습도 신기했다.

길거리에서 구걸(‘박시시’)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그 돈으로 꽃목걸이 꽃다발을 사서 자기가 즐겨 찾는 신 앞에 바치는 가난한 인도인들의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될까?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꽃은 신을 경배하거나 신에게 소망을 빌 때 바치는 예물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꽃은 아름다움, 화려함, 번영, 영화로움 등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아름다운 여인이나 좋고 영화로운 일에 곧잘 비유됐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의 머리에 꽂은 어사화는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꽃 같은 얼굴, 꽃 같은 시절이라는 말도 젊음과 사랑을 표상한다. 그뿐만 아니라 꽃은 국화(國花), 시화(市花), 교화(校花), 사화(社花) 등 한 집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이나 풀 그리고 나무에 우의성(愚意性)을 부여하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행해진 습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 국화 등을 상서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에선 소나무를 백 가지 나무의 우두머리라 하여 굳은 절조를 나타냈으며, 성서에는 뜰에 핀 백합을 청렴무욕에 비유하고 있다. 불가(佛家) 역시 처처에 연꽃이 등장한다. ‘염화시중의 미소’도 그중 하나다.

꽃은 정서적으로 메마르기 쉬운 현대 사회에 교육적 가치는 물론 빛깔과 모양, 그윽한 향기 등 우리의 감정에 긍정적 자극을 주며, 공기정화 능력, 정신 치료학적 효과 등 생활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유익을 선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실내 원예 또는 녹지 공간 등에 꽃을 많이 심어 인간의 고독감과 산업사회의 긴장감을 해소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어떤 꽃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에, 어떤 꽃은 소나기 내리는 무더운 여름날에 어떤 꽃은 산들바람 불어오는 가을날에 그리고 어떤 꽃은 함박눈 펄펄 날리는 추운 겨울에 핀다. 어디 그뿐이랴. 정열적인 붉은 꽃, 온화한 노란 꽃, 순결한 흰 꽃, 또 서러움을 머금은 듯한 자줏빛 꽃 등은 저마다의 빛깔로 각기 제 모습을 자랑한다.

인간의 모습이 백양백색이듯이 꽃 역시 그렇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꽃에도 어울리는 말일 듯하다.

법정스님의 토굴 당호가 ‘수류화개실’이다. 이 수류화개(水流花開)란 말은 초의선사가 자주 애용했다고 하는데, 송나라 때 황산곡(黃山谷)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만리장천에 운기우래하니, 공산무인한데 수류화개라’(萬里長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가 내리누나, 텅 빈 산에 사람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난다.’

어느덧 실체적 존재에 이르면 내면에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신비함처럼,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그 ‘수류화개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말라 아사나(mala asana)’를 ‘꽃목걸이 자세’ ‘화환 자세’라 한다. ‘말라(mala)’는 화환(花環)이라는 뜻인데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된다. 꽃 장식 ‘말라’는 봉헌의 의미로 제단이나 성자상 앞에 놓거나 존경 혹은 환영의 의미로 영적 지도자에게 바쳐진다. 묵주 ‘말라’는 명상이나 기도에 사용한다. 이런 두 가지 뜻의 ‘말라’는 모두 원형(圓形)의 형태다.

두 발을 모으고 쪼그려 앉아 발바닥과 발뒤꿈치는 바닥에 붙인다. 두 무릎을 벌리고 두 팔로 무릎을 감아 등 뒤로 돌려 마치 둥근 꽃목걸이처럼 양손을 등 뒤로 돌려서 놓거나 서로 맞잡는다. 또는 양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는 앞쪽으로 몸통을 숙이면서 머리를 바닥에 닿게 한다.

이 자세는 복부 기관을 자극함으로써 장운동을 돕고 등 부분을 편안하게 해주며 아킬레스건과 종아리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화환 자세는 두 팔이 마치 화환처럼 몸을 감싸는 데서 그 이름이 나왔다.”(B.K.S 아헹가)

꽃은 빛깔이며 향기며 모습이 모두 황홀하다. 아울러 그런 생명의 신비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들 사랑이 우주에 닿아야만 완성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꾸고 꾸민다 해도 사람의 외형 자체가 꽃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사람이 꽃과 같이 아름다울 때는 꽃의 본질을 닮을 때이다.

꽃은 사랑이다. 미래를 위한 실존적 사랑이다. 따라서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 삶이 사랑의 꽃향기 가득 품어 마음의 향기로 빛나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제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도 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물러갈 때가 되면 스스로 꽃잎을 떨어뜨리고 다음에 필 꽃에 자리를 양보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눈부신 색깔과 맑은 향기로 가득 채우다가도 때가 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는 꽃을 본다. 그 단호함에 때론 가슴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꽃은 자연의 섭리를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

가야 할 때를 알고 실천하는 그들의 뒷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끝까지 추한 그림자를 떨구기도 하는 인간들에게 비하면 얼마나 깔끔한 모습인가.

이는 곧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대한 명제까지 안겨준다.

때로는 이러한 꽃들을 우리가 사는 동안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더 애틋하고 더 예쁘다. 순간 피었다가 져 버리는 꽃은 꼭 오늘 하루를 닮았다. 오늘이 내 생애 단 하루인지도 모르고, 금방 져 버릴 줄도 모르고 종종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곤 한다. 무럭무럭 자라서 애쓰며 피어날 자신이 얼마나 예쁘고 귀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사는 게 바쁘다고 힘들다고 바닥만 보고 걷다가 그럭저럭 그냥 하루를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속상한 것 힘든 것 잠시 내려놓고 한 번쯤 온 천지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은 장미꽃 송이에 눈길을 맞추고, 짙은 향기도 흠흠 맡아보면 좋겠다.

“아가, 꽃 봐라. 속상한 거는 생각도 하지 말고 너는 이쁜 것만 봐라.” 이은희 작가의 단편에서 할머니가 아가에게 들려주는 대목이다. 이참에 자신에게도 토닥토닥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그대도 힘들고 아픈 것만 보지 말고 이제 이쁜 것만 보라”고. “꽃길만 걸어라”는 말보다 사뭇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하지 않은가.

‘말라 아사나’를 통해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보는 심성을 갖춘,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어 본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의 ‘꽃밭에서’ 동요도 흥얼거려 보아도 좋고, “당신은 한 송이 꽃 속에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를 거예요”라는 노랫말이 담긴 이탈리아 윌마 고이크의 ‘꽃의 속삭임(In un flore)’ 칸초네 곡이라도 감상하면서 이 자세를 취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꽃에 대한 속삭임 / 최진태]

천공에 꽃비 흩날리는 날/ 문득 바람처럼 스쳐 지냈던/ 한 송이 꽃에게 다가간다

그대 눈높이로 자세 낮춘 후/ 그대 눈동자에 눈 맞추고/ 그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대 가장 깊은 곳에 안착한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나의 심장의 고동 소리 들리는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오/ 그대 눈 속에 무지개 되어 빛나는/ 눈물방울 하나면 족하거늘

지나온 생의 구비마다/ 그대는 묵묵히 피고 지고 있었는데/ 돌아보면 어느 순간에나/ 그대는 그 자리를 지켰건만/ 참으로 무심했구려

지나온 흔적 흔적이/ 그대 아닌 적 없었는데/ 제대로 미소 한번 못주었구려/ 하는 일 이리도 어리석었도다

그대에게 제대로 눈길만 주었어도/ 그대 손깃만 온전히 스쳤어도/ 그대 곁만 살갑게 지켰어도/ 그대 숨결을 느꼈을텐데/ 그대 영혼의 향기를 맡았을텐데

향기롭다니 아름답다니/ 달콤하다니 부드럽다니/ 달달하다니 아릿하다니/ 영롱하다니 경외롭다니/ 눈부시다니 떨려온다니/ 벅차온다니 황홀하다니/ 아득하다니 탐스럽다니/ 새촘하다니 상큼하다니

이제와 뒤늦게 아무리 외쳐봐도/ 미치지 못하는/ 그대에 대한 노래/ 그대에 대한 찬송/ 다하지 못해/ 그 어떤 것으로도 흡족치 못함은/ 아마 그대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하는가 보우

때늦은 후회 속 비로소 오늘에야/ 그대는 나의 영혼에/ 꽃물로 번져와 안기더니/ 한 송이 꽃봉오리로 태어나/ 드디어 화사한 꽃으로 만개했구려

그 꽃이 내가 되고/ 내가 곧 그 꽃이 되는/ 장엄한 세계/ 그대 가슴 속에서 태어나/ 그대 가슴 속에서 마치고 싶은/ 애틋한 속삭임이/ 그대 들리시는가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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