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씻다? 그릇을 가시다, 부시다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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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5.27. 오후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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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33] '동사의 맛' 펴낸 김정선씨
20년 넘게 출판 교정자로 일하며 사라지는 動詞들 수집해 출간
"'실패하다'에 밀려난 '그르치다'… 死語 되기엔 아쉬운 표현 많아…'개좋아'보다는 '데좋아'로 써야"


보고서가 명사 위주 글이라면, 연애편지는 동사가 넘쳐나는 글이다. 출판 교정자로 20년 넘게 일한 김정선(54)씨는 문장에 감칠맛을 더하는 동사들을 모아 '동사의 맛'이라는 책을 냈다. 25일 만난 그는 "예전에는 무게 있고 딱딱한 글을 쓰기 위해 그럴듯한 한자어 명사를 공부했다면, 요즘은 자신을 표현하거나 공감을 얻는 글을 쓰기 위해 동사를 어떻게 쓸지 고민한다"고 했다. "한국어에서는 주어·목적어를 빼고 동사로만 문장을 구사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문장이 동사로 끝나요. 그럴듯한 명사를 늘어놓아도 문장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하면 글이 어색해지죠."

김정선씨는 "요즘엔 부사도 보기 어려워졌다"며 "빈도나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도 몹시·매우·정말·아주 등등 다양한데 '너무' 만 '너무' 많이 쓴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책 '동사의 맛'에서는 헷갈리기 쉬운 동사와 사라져 가는 동사를 모았다. 한자어에 '하다'를 붙인 동사보다는 고유어 동사들을 추렸다. 그는 "아직 사어(死語)가 되기엔 아쉬운 표현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르치다'도 충분히 쓸 만한데 '실패하다'에 밀려서 사라지고 있죠. 옛날에는 설거지할 때 '그릇을 가시다' '그릇을 부시다'라고도 많이 썼는데 지금은 '씻다'로만 뭉뚱그려 쓰고요."

영어식 표현이 늘면서 부사·동사 조합 대신 형용사·명사 조합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굿 모닝(Good Morning)!'을 번역해서 '좋은 아침!'이라고 하잖아요. 예전엔 미국에서 오래 일하다 온 잘생긴 직원이나 할 법한 말이었죠. 한국어에서는 '굿바이(Goodbye)'도 '좋은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잘 가!'라고 하잖아요. '좋은 주말 되세요'보다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라는 부사와 동사 조합이 우리에겐 더 자연스럽죠."

김정선씨는 1993년부터 잡지사 '한국인', 을유문화사 등에서 교정자로 일했다. 작가들조차 많이 틀리는 맞춤법이 '치르다'나 '부수다'의 활용형이라고 한다. '치르다'는 '치러, 치르니, 치렀다'로 쓰고, '부수다'는 '부숴, 부수니, 부쉈다' 등으로 쓴다. '너를 부셔 버리겠어!'가 아닌, '너를 부숴 버리겠어!'라고 써야 맞는다. 그는 "동사 활용형은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아서 정리해두기 위해 '동사의 맛'을 쓰기 시작했다"면서 "다른 품사와 달리 활용형이 다양해서 그에 따라 글의 느낌도 달라진다"고 했다.

/조선일보

많이 쓰진 않지만 맛깔스러운 동사들도 소개했다. 음식이 싱거운지 짠지 맛을 볼 때는 '간을 본다'고 하고, 남의 속을 떠보거나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가늠할 때는 '깐보다'라는 표현을 쓴다. '빨다리다'는 빨래를 빨아서 널고 다리는 모든 과정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동사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너그럽게 보거나 들어준다는 뜻의 '눌러듣다' '눌러보다'라는 다정한 동사도 있다. "요즘 아무 데나 접두사처럼 '개'를 붙이더라고요. '개더러워' '개좋아'…. 그런데 실제로 '몹시'나 '매우'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데-'가 있어요. 차라리 '데더러워' '데좋아'라는 표현을 알리면 젊은 친구들도 재밌게 쓰지 않을까요."

그는 "'모르다'라는 동사가 알고 보면 참 신기하다"고 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분이 서양 언어권에는 '모르다'라는 단어가 없는데 한국어에는 '모르다'가 있다고 재밌어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영어도 'don't know(알지 못하다)'고, 중국어도 부지(不知)를 쓰잖아요. 왜 한국어는 '알다'의 부정형을 쓰지 않고 '모르다'라는 동사를 만들었을까 생각해보게 됐죠."

모르는 동사를 발견하면 뜻을 찾아보고 메모해 두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김정선씨는 "눈뜨자마자 휴대전화를 켜 한국어 문장을 보게 되고, 자신이 쓴 문장을 제발 좀 봐달라고 소셜미디어에 자유롭게 올리는 시대"라면서 "남의 글에서 어떤 동사를 썼나 눈여겨보고 재미있는 단어들을 모아보면 자신의 글을 쓸 때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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