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정부가 "조용히 기다리라"는 동안 탈북민 14명, 베트남서 중국으로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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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알리지 말라"던 외교부, 탈북민 추방되자 발뺌

베트남, 中공안에 넘기려했지만 일부 탈북민 쓰러지며 일시 중단
"한-아세안정상회의 기간이라 김정은 눈치보느라 소극적" 비판


한국으로 오려던 탈북민 14명이 29일 베트남 공안에 체포돼 중국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이에 놀란 탈북민 여성이 쓰러져 있다. /북한인권단체 관계자 제공


한국으로 오려던 탈북민 14명이 지난 23일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로 향하던 중 베트남 하띤 지역에서 검문에 걸려 체포됐다가 28일 중국으로 추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29일 오전 베트남 입국을 다시 시도하다 체포돼 중국 공안에 넘겨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들을 돕던 가족과 탈북민 인권단체들은 23일 체포 직후 우리 정부에 구조 요청을 했지만 현지 대사관과 우리 외교부는 "조용히 기다리라"는 대답만 되풀이하다 추방을 막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생사기로에 놓인 탈북민들의 안전 확보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들이 중국 공안에 넘겨질 경우 강제 북송(北送)될 가능성이 크다.

체포된 14명의 탈북민은 지난 21일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행을 위해 라오스로 이동하다 베트남-라오스 국경 지역인 하띤에서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10대 어린이도 1명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최근 북한을 탈출하거나 이미 중국에 숨어 살다가 한국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한국행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탈북에 관여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이들은 현재 베트남-중국 국경에서 중국으로 송환될지도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계속 '걱정하지 마라' '믿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결국 추방됐습니다. 28일 추방 직후 외교부에 다시 전화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했습니다."

탈북민의 한국행을 돕던 인권 단체 관계자 A씨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후문 앞에서 "차라리 정부를 믿고 기다리라는 말이나 하지 말았으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 구조했을 것"이라며 분노했다.

탈북민 14명은 23일 체포돼 조사를 받다가 5일이 지난 28일 저녁 버스에 태워져 자신들이 넘어왔던 중국 광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핑샹(憑祥) 인근 국경 지역으로 추방됐다. A씨는 "23일 체포 직후 외교부와 현지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베트남과 우리 정부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최소한 공관에는 데려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언론에 알리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면 해결하겠다'고 했다"며 "그런데 28일 저녁 10시경 탈북민 14명 전원이 중국으로 추방당했다"고 했다. 그는 "탈북민들이 추방되고 나니 외교부 사람들이 '우리도 최선을 다했는데 할 게 없다'는 식으로 발뺌했다"고 했다.

28일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추방된 탈북민 14명은 베트남-중국 국경에 숨어 밤을 지새웠다. 29일 오전 7시경(현지 시각) 베트남으로 재진입을 시도하다 1시간 만에 베트남 공안에 다시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베트남 공안은 이번에는 탈북민들을 추방하지 않고 중국 공안에 직접 송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탈북민 3명이 놀라 쓰러지면서 베트남 공안이 송환을 잠시 중단하고 의사를 불러 치료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관계자는 "일행 중에는 가족도 있고, 북한에서 최근 넘어온 탈북민도 4명이나 있다"고 했다. A씨는 기자에게 "탈북민들의 상태가 호전되면 베트남 공안이 당장 중국 공안에 송환할 것"이라며 "원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데 다급한 마음에 외교부에 긴급 구조를 요청하러 왔다"고 밝혔다.

동행한 인권 단체 관계자 B씨는 외교부 청사 로비에 내려온 외교부 관계자에게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빨리 손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이 외교부 관계자는 "책임자도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외교부 관계자는 "정부 방침은 오는 사람은 다 받으라는 것"이라며 "우리도 현재 이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며 (구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A씨는 "외교부 관계자를 별도로 만났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과는 알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며 "생사기로에 처해 있는 탈북민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한·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리는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어서 베트남 정부의 충분한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음에도 결국 탈북민들이 추방되는 사태를 맞았다"며 "정부가 김정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 아니냐"고 했다. 조영기 국민대 초빙교수는 "정부가 김정은을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초청하면서 북한 선원 2명의 송환을 제의하고, 포승줄에 결박한 채 재갈을 물리고 안대를 씌워 판문점으로 끌고 간 사례와 오버랩 된다"며 "정부가 김정은의 눈치를 보느라 헌법상 우리 국민인 탈북민 보호를 외면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긴급 대책을 세워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tongilvis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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