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서 100명 넘게 죽인 이협우,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떵떵’ [한국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입력
기사원문
전현진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ㆍ처벌받지 않은 학살자들



학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죽인 사람은 밝혀진 것만 100명이 훌쩍 넘는다. 그는 한국전쟁 중 국회의원이 됐다. 4·19혁명과 함께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지만, 5·16 쿠데타와 함께 풀려났다.

그는 민보단,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단장을 지낸 자유당 출신 이협우 의원(2~4대·1987년 사망·사진)이다. 해방 후 학살이 벌어진 곳은 경주의 작은 마을 내남면이다. 이곳에서 유해 매장지로 꼽히는 곳은 4곳이 넘는다.

■ 좌익 협조 명분으로 총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의 김하종 경주유족회장이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경주 내남면 용장리 야산에 세워둔 깃발을 가리키고 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내남면은 경주에서 언양 방향으로 20분가량 차를 타고 가면 나온다. ‘지붕 없는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남산 서남쪽에 있다. 지역 대부분이 산지라 인구도 적었다. 2016년 기준 인구가 5148명에 불과하다. 이 작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은 해방 직후 학살이 벌어졌던 비극의 무대다. 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들의 투쟁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1일 경주시 유족회 관계자들과 함께 내남면 용장리의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향했다. 한 유족이 경주경찰서 내남파출소를 가리키며 “예전에 내남지서(파출소)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 말했다. 내남지서는 이협우 의원의 활동 근거지였다. 민간인이지만 허리춤에 권총을 찼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공공연하게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반공투사로 내세우며 마을 주민들에게 “골로 보내버리겠다”는 협박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를 두려워한 마을 주민들이 “(차라리 눈에 안 보이게) 서울로 보내버리자”며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고 유족들은 설명했다.

김하종 경주유족회장(85)은 일가친척 22명을 이 의원 일당의 손에 잃었다. 1949년 8월1일의 일이다. 또 다른 마을 주민 손모씨의 가족 8명도 김 회장의 친·인척과 함께 죽었다. 김 회장의 6촌 형은 소시장에서 소를 팔고 오던 중 끌려가 돈을 빼앗긴 뒤 내남지서 뒤편 골짜기에서 총살됐다.

같은 날 저녁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5촌 숙모 등 4명도 골짜기로 끌려갔다. 다음날 민보단원 10여명이 명계리 김 회장의 친척집 방안에 남아 있던 친·인척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시신은 용장리 골짜기에 묻혔다. 좌익 활동에 협조했다는 명분이었다.

김 회장의 증언과 1960년 국회가 발표한 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종합하면 학살은 내남면 곳곳에서 법적인 절차나 근거 없이 벌어졌다. 모두 좌익활동을 막겠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이뤄진 즉결처분이었다.

1949년 3월8일 내남면 망성리에 사는 20대 남성 2명은 남로당원이라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총살됐다. 가족인 10~60대 여성 5명은 그날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죄목도 따로 없었다. 실제 남로당원인지도 불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고 했다.

우익단체 단장 지낸 이협우

내남면서 ‘좌익 처단’ 학살

유아·노인·여성 등 안 가려

1948~1950년에 140명 희생


내남면에서 희생된 이들은 경주유족회 추산으로 140명에 달한다. 1948년 3월부터 1950년 8월까지 2년6개월 동안 죽은 사람 중 60세 이상 노인이 19명, 10세 미만의 유아는 35명이었다. 여성은 58명이다. 1950년 7월22일과 8월11일 이틀 동안 좌익분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사람만 67명에 달한다. 학살이 수년간 계속됐지만, 마을 주민들이 직접 한두 차례 발굴에 나선 것을 제외하면 유해발굴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

김 회장은 용장리 남산 밑자락의 도로변에 차를 세운 뒤, 물도랑을 건너 1~2분가량 짧은 거리를 걸어올랐다. 좁은 평지와 골짜기가 이어진 곳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입니다’라는 작은 팻말 4~5개가 눈에 띄었다. 경주유족회에서 세워둔 것이다. 오랜 시간 발굴이 이뤄지지 않아 세운 둔 팻말은 꺾이고 낡아버렸다.

김 회장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이고 묻었다더라”고 말했다. 경주시가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본 매장 추정지는 이곳을 포함해 내남면에 4곳이나 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정한 우선발굴 대상지에 포함되는 곳도 있다. 김 회장은 “구체적인 증언으로 발굴 가능성이 높은 곳만 4곳이란 뜻이고 실제 매장지는 이보다 더 많다”고 말했다.



■ ‘반공’ 정부, 민간인 학살 정당화

주민들 4·19 후 이협우 고소

1심 사형…5·16으로 물거품

군사정권, 유족회 와해시켜


학살을 주동한 이협우 의원은 이후에도 10년가량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내남면 일대에서 계속 생활했다. 학살을 목격하고 경험한 주민들은 4·19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이 의원을 고소했다. 그는 내남면 주민 85명을 살해한 혐의로 2차례에 나눠 기소됐다. 실제 학살 피해자는 더 많았다. 김 회장은 “유족회 간부들이 유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은 고소 내용에 일부러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은 1961년 2월24일부터 이듬해 5월15일까지 이어졌다. 검찰은 이 의원에 대해 상소심까지 모두 7차례 사형을 구형했다. 당시 재판 기록 등에 따르면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면서 “내남면 학살사건은 대한민국의 치욕적인 범죄이며, 아이히만의 유태인 학살사건에 버금간다”고 주장했다.

또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이라는 것에 편승해 좌익분자의 가족은 물론, 자신에 반대하거나 재산이 있는 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했다”고 했다.

1심에서 이 의원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직접 목격한 증인이 있는 일부 사건만 유죄로 인정됐지만, 김 회장은 “그래도 사형선고가 나와서 한시름 놓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형선고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처벌은 결국 실패했다. 1961년 5·16 쿠데타 때문이다. 소송을 주도했던 유족회 관계자들은 쿠데타 이후 용공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에 넘겨졌다.

유족회가 와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증언을 번복했다. 김 회장은 “유족회 관계자들이 혁명재판소에 끌려간 뒤, 주민들이 크게 위축됐다”며 “이협우의 부하들이 이곳저곳 다니며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고 협박해 증인들이 결정적인 증언을 번복했다”고 말했다.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것은 내남면뿐만이 아니다. 아예 법정에 세우지조차 못한 경우도 많았다. 1950년 ‘거창보도연맹사건’의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 때문에 4·19혁명이 일어나자 학살에 가담했던 마을 면장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해발굴과 진상규명은 더욱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됐다. 유족들은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억울한 죽음을 함구하고 살았다.

내남면에 추정 매장지 4곳

“장례 치르게 유해 발굴하고

국가가 유족들에 사과하길”


내남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운동을 연구한 이창현 서울역사편찬원 연구원은 “반공을 정체성으로 삼아온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오히려 정당화해온 측면이 있다”며 “이 때문에 민간인 학살 가해자가 처벌받은 사례 자체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 ‘빨갱이의 자식’이라 손가락질을 받아온 유족들은 가족이 왜 죽었는지, 어떤 경위로 어떻게 죽게 됐는지 사실관계를 알고 싶어 한다”며 “유골을 발굴해 장례를 치르고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게 되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유족들, 5·16 쿠데타 후 투옥·고문당해…국가폭력에 2차 피해

‘특수반국가행위’ 혐의로 8개 지역 유족회 간부 18명 기소

중정서 갖은 고문…실형 살고 나와서도 경찰 감시 이어져

김광호 비대위장 “발굴 거의 안돼…대통령이 의지 보여야”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지만,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은 도리어 옥고를 치르고 고문당했다.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유골 발굴에 나선 유가족들은 이듬해 5·16 쿠데타가 벌어진 뒤 다시 한번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특수반국가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유족들은 5·16혁명재판소로 넘겨졌다. 경상남북도, 경주, 경산, 마산, 창원, 밀양, 금창(김해·창원), 동래 등 8곳의 유족회가 직격탄을 맞았다. 재판에 넘겨진 유족회 간부는 모두 18명에 달했다.

1962년 1월 김하종 경주유족회장(85)에겐 징역 7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1960년 9월 ‘경주지구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김 회장은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는 구호를 내걸고 학살자 처벌과 피학살자 유해 발굴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학살에 가담한 군경 관계자나 우익단체의 회원들은 전국에 있는 유족회를 찾아가 사무실을 부수거나, 매장지를 훼손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매일같이 경찰이 찾아와 점심을 먹고 갔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당시 경주시장이 신원 보증을 서줘 지역 중·고등학교 교직원 자리를 겨우 얻게 됐지만,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신원 특이자라는 이유로 사찰 대상이 됐다. 김 회장은 전국유족회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18명, 1960년 전국유족회 발족에 서명한 33명 중 유일한 생존자다.

김광호 전국유족회 비상대책위원장(66·사진)의 아버지인 고 김영욱 선생은 당시 전국유족회의 총무 간사로 활동하다가 39세에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김정태다. 그는 1950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세탁·염색업을 하며 재산을 모은 아버지가 4·19혁명 이후 사비를 털어 학살당한 할아버지의 시신과 유골 272구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당시 9세였던 김 위원장도 상주 역할을 맡았다.

5·16 쿠데타 이후 김 위원장의 아버지는 1961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당했다. “김 선생, 그냥 (김일성) 만났다고 하고 도장 찍으면 풀어줄게.” 수사관들은 수감 생활로 굶주린 김 위원장의 아버지에게 짬뽕을 사주며 설득했다. 도장을 찍는 순간 사형당할 거라고 생각해 거부했다. 고문이 뒤따랐다. 거꾸로 매단 후 짬뽕 국물에 고춧가루와 식초, 각종 오물을 넣은 뒤 얼굴에 부었다.

의자에 묶어놓은 채 M1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발가락을 ‘탁탁’, 내려찍었다. 세번째로 발가락을 내려찍을 때 기절했다. 가장 약한 것이 전기고문이었다. “빨갱이를 장례 지냈기 때문에 너도 빨갱이다.” 혁명재판소는 김 위원장의 아버지를 다그쳤다. “해골에 빨갱이라고 써있기라도 합니까. 사람 도리로 죽은 사람 장례 지내는 게 죄입니까”라고 따져 물어도 소용없었다.

핍박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계속됐다. 어선이 납북되거나 북한에서 총이라도 쏘는 일이 생기면 김 위원장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낯선 장소에 버려졌다.

그가 고문당한 사실을 김 위원장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처음 알린 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고 나서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그 모든 게 민간인 학살을 알리려고 유족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6·25전쟁으로 숨진 군인들의 유해 발굴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 발굴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족회는 전국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이 1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면서 “여야는 물론 대통령 역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