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쓴 글

문답글 )철학적 깨달음과 연기적 깨달음

프로필

2017. 11. 25. 14:25

이웃추가

김왕근 선생님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을 해봤습니다. 


1. 철학적 깨달음과 열반적 깨달음에 대한 나의 견해. 

2. 철학적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열반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3. 개인의 깨달음이 집단의식의 깨달음으로 전개되면 저절로 비폭력 무소유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대한 추가 설명


철학적 깨달음과 열반적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이를 제안한 홍창성 교수님의 설명으로 정리해봅니다. 

(1) 철학적 깨달음 (philosophical enlightenment) 

- 무아와 연기의 진리에 대한 터득.

- 깨달음을 앎 또는 이해의 일로 본다.

-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는 깨달음을 이렇게 철학적 깨달음의 의미로만 쓴 것이다.

(2) 열반적 깨달음 (nirvanic enlightenment)

- 어떤 방식의 수행 또는 수양을 통해 모두 고뇌의 문제를 어떤 의미에서든 근본적으로 해결.

- 감각 현상의 초월까지 의미하지 않는다.

-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는 이런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열반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 평가나 분류에는 조금 다른 생각이 있지만 설명의 의도에 공감이 되어서 동의를 합니다. 공감되지 않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저는 깨달음과 관련된 의식을 이렇게 다섯 단계의 스펙트럼으로 나누겠습니다. [단편적인 이해-철학적깨달음-깨달음-열반적깨달음-신비주의]로 구분하고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1) 단편적 이해 

- 수학공식, 지동설, 원자의 구조를 이해하듯이 무아와 연기를 논리적으로 납득하고 수긍한다. 논리적인 사고 기능을 거치지 않고, 일상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직관적인 이해들도 포함한다. 

- 원자의 구조에서, 입자보다는 빈 공간이 비교할 수 없이 넓으며 입자조차도 파동에 불과하다고 이해하지만, 벽을 통과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 것처럼, 무아와 연기를 이해하고 수긍하면서도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태도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2) 신비주의 

- 초 현실세계를 믿는다. 초 현실세계를 주관적으로 경험하지만 이를 객관화시킬 수는 없으며 객관화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논리를 무시하고 맹신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정신 분열 또는 정신 지체를 겪는 사람과 구별할 방법이 없다.  

- 자기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신비주의자임이 드러난다.

(3) 철학적 깨달음 (열반적 깨달음이 결여된)

- 단편적 이해가 깊어져 무아와 연기를 자기 삶의 가치체계에 적용하여 살아가므로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다. 

- 감정적인 혼란이 남아 있다. 

(4) 열반적 깨달음 (철학적 깨달음이 결여된)

- 신비주의가 망상임을 알고 거리를 두지만 열반과 적정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남아 있다. 그러나 소통하지 않으면 문제가 안된다.

(5) 깨달음

- 열반적 깨달음과 철학적 깨달음이 깊이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저는 위에서 3,4,5번을 깨달음이라고 정의합니다. 5번은 통합적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것이 적당하겠지만 용어 창조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생략하였습니다. 


고오타마가 설명한 법등명과 자등명의 관점에 적용해 본다면 철학적 깨달음은 법등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등명의 결과로 얻는 것은, 열반적 깨달음이기보다는 5번의 깨달음입니다. 정사유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3,4번의 깨달음은 퇴행의 가능성이 있는데 반해 5번은 퇴행하지 않아 불퇴전이라고 합니다. 퇴행이란 깨달은 사람이 다시 깨달음 이전의 사고와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형태의 깨달음에는 경지의 차이가 아니라 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깨달음의 스펙트럼이라고 봅니다. 다만 5번의 깨달음으로 불퇴전을 이루지 않으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위없는 깨달음은 최고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무아와 연기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음이 되물릴 수 없이 완벽하게 확인된 것입니다. 이 확인은 우주가 붕괴되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단 번에 깊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열반적 깨달음의 결여나 철학적 깨달음의 결여 때문입니다. '경험'의 깊이가 부족하거나, '경험'을 해석하는 능력에 균형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견성이나 대오 등의 구분을, 깨달음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의 능력에 차별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적 소통이 필요하지 않다면, 열반적 깨달음은 개인에게 완벽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조차도 모르면서 여여하고 힘 있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완벽하게 그런 상태는 아니지만, 수행이나 진리에 일체의 관심이 없으면서 열반적 깨달음의 상태와 유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전해 들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얻은 안도감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수행이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이에 관한 업장(의문에 대한 에너지의 축적)이 없으므로, 깨어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소재로 타인과 소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종교에 입문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만 깨닫는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깨닫기 전에 수행과 진리에 대한 갈구나 탐구 과정이 있었던 사람들은 깨어난 뒤에 그 문제들을 풀어야 할 업장에 이미 젖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나면 모든 의문이 일체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예전에 갖고 있던 이론적인 혼란들이 자동으로 정리되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란이 씨앗으로 남아 있으면 '나'가 망상인 것을 깨치고도 '나'의 고정관념에 다시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용수 보살이 "공(空)을 설한 것은 모든 견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기 위함인데, 만일 견해를 다시 일으켜 그 공에 속박된다면, 구제하기 어렵다"한 바와 같이 허무주의나 막행막식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업장이 심하지 않다면 이론적인 모든 정리조차 내려놓고 열반적 깨달음에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진리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과 나누지 않는다면 허물이 없습니다. 


단편적 이해가 철학적 깨달음으로 발전하고, 열반적 깨달음이 동반한 '깨달음'으로 전개되려면 이해의 깊이가 생겨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사고 기능으로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넓고 깊은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무아와 연기를 이해했다면 실천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면, 해보기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고 기능의 이면을 알아 가는 것이므로 이런 것들을 사고 기능으로만 얻어내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해의 깊이를 얻는 과정이란, 무아와 연기를 연습해보는 실천이고 수행입니다. 무아와 연기의 실천은 닥쳐오는 사건들을 시비호오를 가리지 않고 일체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하라면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믿음으로나 가능하겠지만, 이럴 때 나오는 믿음은 그 본질이 거래이어서, 믿어주니 대가(깨달음이나 평안)를 달라고 신이나 운명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래는 궁극적으로 달성될 수 없습니다. 일체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전적인 신뢰를 통하여 열반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도 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믿어져야(수동) 가능한 일이므로 여기 설명에서는 제외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연습하면서 전적인 수용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저는 이에 관련하여 '개껌 던지기' 또는 '개껌 물기'라는 제목으로 설명을 했으니 제 담벼락에 링크된 블로그에서 검색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의 원리를 이해하는 핵심이므로 제가 제안한 방법을 그대로 해봐도 되고 염불, 명상, 화두, 호흡관, 위파사나 등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수행법들은 맹신과 미신이 방편이라는 핑계로 섞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문제점을 수행자가 구별하기는 어렵고 잘 가르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우니 '개껌 던지기'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시작을 그렇게 하지만 끝도 그것이 전부입니다. 달리 뛰어난 방편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생각과 생각의 여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연습을 해보면 당장에 얻어지는 효과들이 있습니다. 생각이 맹목적이고 관성적으로 전개되면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반짝하면서 상쾌하고 편합니다. 


자주 해서 습관이 되면 허깨비와 같은 생각에 빠져들어 가는 것들을 알아채는 힘이 생깁니다. 또한 생각의 개입과 상관없이 일체의 사건들이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점차로 시비호오 판단을 버리게 되고 전적인 수용이 가능해지는 단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 일련의 고비들이 나타나지만 간절함과 진지함만 놓치지 않는다면 넘어서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 방법은 제가 허투루 제안하는 것은 아니고, 지난 세월 명상이나 화두를 붙들고 씨름했던 저의 수행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원리로 정리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원리와 연습이 잘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주변에 몇 사람이 따라 해봤는데,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개껌 던지기'는 너무 간단해서 무슨 강좌나 책, 1개월 훈련과정 등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할 때 자기 눈에 콩 까풀이 씌운 것(생각에 붙들려 있으면서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어려우므로 그런 지적이나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 좋은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절함만 있다면 도움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깨달음은 개인적인 현상으로, 집단의식의 세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화에서 벗어나 완전한 개인으로 돌아가고, 개인이라는 분리조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은 집단의식의 세뇌가 선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도 집단의식의 결과물입니다. 집단의식이 선행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깨달음이 열반적 깨달음으로 그쳐버린다면, 개인의 탈 사회화는 이룰지언정 집단의식의 탈 사회화는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집단의식의 탈 사회화라는 것의 의미는, 개인이 사회화를 부정하고 벗어나 버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현실을 수용하여 사회 가치의 재구성이라는 변증법적인 합(合)의 결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고오타마와 선각자들이, 구제할 중생이 없다면서도 가르침을 펼친 이유는 집단의식의 프레임을 수정하기 위한 행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깨어나든 그렇지 않든 식탁에서 밥을 챙겨 먹고사는 한 여전히 꿈속의 일입니다. 개꿈이든 용꿈이든 같은 꿈이어서 차별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등장하는 부처와 자비와 사랑도 모두 꿈의 소재들입니다. 꿈인 줄 알기에 여여하지만 꿈임에도 불구하고 맞으면 아픕니다. 스스로 여여할지라도 그 아픔이 있기에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들의 아우성이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깨어난 사람도 감정과 탐진치를 갖고 여전히 꿈속에 남아 있기에 눈물이 흐릅니다. 자비는 깨달음의 열매이거나 경지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아픔이고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여기에 막행막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전혀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들 중에 일부는 철학적 깨달음이나 열반적 깨달음에 머물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냉담하거나 홀로 여여할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결국은 자비에서 만날 테니까요. 다만 자신들의 깨달음이 전부라고 주장하며 다른 길을 막아서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람마다 특성이 다양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모두 다릅니다. 정확한 깨달음보다는 많은 깨달음이 나오는 것을 열린 마음으로 용인해야 합니다. 의심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깨달은 사람들도 경험이 깊어지고 해석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오해하여, 탐진치가 멸하도록 평생을 수행하다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깨닫고, 제자 몇 명으로 명목을 잇게 하는 그런 깨달음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 꽃들을 감상하기에는 인류가 너무 절박한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단으로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그들이 기존의 가치와 다른 모습으로 잘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무아와 연기를 살아가는 핵심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지로 삶을 조작하거나 대비하지 않고, 저절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수용하며 사는 방법으로 인류가 돌아서야 합니다.


무아와 연기가 삶의 핵심이 된다면 비폭력과 무소유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만큼만 누리게 됩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집, '나'의 재산이라는 생각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저절로 흘러와서 잠깐 곁에 머물러있다가 저절로 흘러가 것을 '나'의 것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수명조차도 '나'의 수명이 아닙니다. 1년을 더 살든, 100년을 더 살든 차이가 없습니다. 흘러가는 강물에 금을 그어놓고 '내 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전도몽상에서 집단의식이 벗어나야 합니다.


현대 인류는 발전의 신화를 맹신하여 왔습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이 오래전에 가능해졌고 안전과 편리가 획기적으로 증대되었지만 그렇지 않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과 비교하여 행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설령 그들보다 조금 좋아졌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더 행복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상대적인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소유의 제한이 없는 한 고생의 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소유를 버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이미 소유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객체들로부터 주체를 구분하고 선을 그어 영역을 지키는 '나'가 있는 한 소유는 버릴 수가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소유를 버리고 살 수는 있겠지만 인류의 집단의식이 소유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유를 근간에 두고 성립된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로봇이라는 거대한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밀려오고 있습니다. 현대 인류는 과거 수십 년 동안 겪었던 엄청난 변화의 곡선과도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기술의 진보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이 필요 없는 공장은 소유자 한 사람만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사람이 필요 없는 군대는 소유자 한 사람만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인공지능에 연결된 강력한 로봇들은 인간보다 강력하고 감각 범위도 훨씬 넓습니다. 무한의 지식을 동원하면서도 감정이 없어 분노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일단의 수행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탐진치가 멸절된 존재들이 바로 인공지능 로봇들입니다. 감정과 주체의식이 없으면서 지혜가 가득 찬 것이 깨달음이라면 머지않아 우리는 길바닥에 가득 찬 깨달은 기계들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모방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역지사지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원시적이고 효율 낮은 유기체 알고리즘으로 파악할 것이기에 이를 수용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일단의 인간들도 그것을 없애려고 안달을 하겠습니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호모 사피엔스가 축적해온 대부분의 가치들이 파괴되고 재구성될 것입니다. 그것이 몇 년 뒤일까요. 완전히 그렇게 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과도기적인 현상들은 그리 멀지 않은 시간 내에 가시화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는 거대한 쓰나미를 등 뒤에 두고 모래사장에 누각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주행하고 있는 자동차보다 주차장에 서 있는 차량이 훨씬 많은 현실은 소유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가를 보여줍니다. 빈부격차, 착취 경제 등도 모두 소유제도에 기인합니다. 인공지능이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소유제도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나 평등주의를 의미하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인공지능이든 미래의 권력이든 인간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는 날이 온다면, 저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내 글들은 금서가 될 것입니다. 빛으로 말미암아 유기 생명체가 탄생하였듯이, 관념으로 말미암아 인공지능과 각종 기술이 탄생한 것이므로, 그것들은 인간이 '생각'너머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금기화 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유기 생명체를 모방하지 못하는 것은, 관념 너머의 생명의 세계를 그것 자체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기 지능체가 아무리 거대한 천국을 건축한다 할지라도 가상현실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기 지능체가 가상현실의 꿈에서 먼저 깨어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는 짐작이 안됩니다.


인류의 소유제도는 언젠가는 결국 소멸될 것입니다. '나의 것'이 사라진 인간은 무엇일까요? '나의 것'에서 소멸을 면하고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가족, 일, 꿈, 감정을 소멸한 인간은 무엇일까요? 문제의 핵심은 인류가 자발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가열되어 증발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전자 변형, 생명과 노화의 정복, 고도의 생물학 무기, 통제되지 않는 기술의 지배, 혼란과 공포에 빠진 대중, 우발적 전쟁 등의 위험 요소가 산재하지만, 대의 민주주의는 공익을 위하여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위기는 인류가 소유제도를 자발적으로 버리고 비폭력 무소유의 사회로 전환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은 인공지능의 지배와 집단의식의 깨달음(비폭력 무소유) 중에서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집단의식의 깨어남이란 모든 사람이 깨어난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무아와 연기의 원리가 대중의 일부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흐름이 일어난다면, 나머지의 사회적 전환 과정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집단 세뇌로 가능할 것입니다. 


현대는 무아와 연기에 대한 단편적 이해가 매우 쉬운 시대여서 철학적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대입니다. 고오타마가 인류의 집단의식에 뿌린 씨앗이 대량으로 발아하여 호모 사피엔스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전의 시대에 인류에게 깨달음이라는 것이 절박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깨달음의 불길이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길고 가늘게 유지만 되어 왔던 이유도 이 폭발을 향해 달려온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고오타마의 가르침은 최종 종착지가 결국 집단의식의 깨달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홀로 깨달아 여여함을 즐겨도 주변에 고통이 가득한 꿈속에 남아 있다면 열반적 깨달음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인류의 깨어남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깨어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학적 이해나 열반적 경험이 결여되었음에도 그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살아있는 의심과 진지함을 통하여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그래서 확실하게 깨어나는 것이 더 쉬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많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전에는 깨달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의 거실에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통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엄청난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여건 때문에 경전의 자구에 매달리고 수십 년을 수행에 매달리던 과거 시대의 설명과 수행방법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작정하고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는데 그러고도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세밀한 이야기들은 더 풀어나갈 시간들이 있으니 이 정도로 답변을 마칩니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공
소공 일상·생각

잠에서 깨어나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