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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우리꽃 산책Ⅲ[50회~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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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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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우리꽃 산책Ⅲ[50회~70회]


51. 순비기나무- 누가 바닷가에 보랏빛 카펫 깔았나


 

매년 맞는 계절의 변화지만 겪을 때마다 참 신기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이 지나고 나면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찬 기운이 섞여 있다. 누가 여인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했던가. 푹푹 찌던 8월 초까지만 해도 피하고 싶던 바다가 여름의 끝자락에 와서 문득 그리워지니 말이다.  

순비기나무는 그런 바닷가 모래땅에 지금도 피어 있을 키 작은 나무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현란한 해수욕장이 아닌 한적한 바닷가, 물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바닷가 모래땅이나 모래땅 위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바위틈에서 자란다.

주로 서해안이나 남해안 혹은 그 주변 섬에서 볼 수 있다. 자라는 모습 역시 독특한데 나무치곤 작은 편으로, 두 뼘쯤 되는 높이까지 자란다. 하지만 옆으로 뿌리줄기를 뻗으며 퍼져나가 대개는 커다란 무리를 이루며 자란다. 소복한 덤불처럼 혹은 보랏빛 카펫처럼.

분백색이 도는 잎엔 은은함이 있다. 잎 전체에 회백색 털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람을 다스리기 위함일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도 비교적 오래 피어 있는 작은 보랏빛 꽃 속에서 튀어나온 수술이며 이러저러한 색의 변화가 여간 재미난 게 아니다. 꽃이 지고 나면 이내 구슬처럼 둥글고 딱딱한 열매가 달리는데, 익을 때쯤이면 검은 자줏빛이 된다.  



순비기나무란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확하게 확인되진 않았지만 언뜻 듣기에는 해녀가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제주 방언 ‘숨비기’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순비기나무가 주로 바닷가에서 살고 뿌리가 모래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살아가는 모습과 그 의미를 연상하면 이내 즐거운 마음이 든다. 어쨌든 재미난 이름이다. 한자로는 만형(蔓荊)이라 하고 만형자나무, 풍나무, 숨베기나무라고도 한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까닭에 해풍 피해를 막는 지피(地被) 소재로도 관심을 두는 이가 많다. 상록성이니 월동에만 문제없다면 이 또한 아주 좋은 장점이다. 식물체에 향기도 있어 허브식물로 권하기도 한다. 솔향기 같은 것이 나는데 냄새를 맡다 보면 머리가 시원해진다고 한다.

욕실에 놓아두고 향료로 쓰기도 한다. 한방에서도 많이 쓰는데 두통약으로 쓰는 것을 보면 헛말은 아닌 듯하다. 한방에서는 여러 통증, 눈의 침침함과 충혈, 신경성 두통, 타박상 등 비교적 많은 증상에 처방한다. 밀원식물로도 알려졌다.

아직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순비기나무 군락이 있는 바닷가를 찾아가면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을 듯하다. 트인 바다도 바라보고, 그 바다를 바라보고 사는 순비기나무의 푸른 향기에 취하다 보면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순비기나무의 효능


풍열을 없앤다.  따라서 풍열에 의한 감기나 두통 치통 제질통이나 팔다리의 저림증과 마비증 등을 치료한다.

머리를 맑게 한다두통. 편두통. 치통 또는 뇌속이 윙윙 울리는 소위 뇌명증 이라고 불리는 경우에도 좋고 귀가 윙윙 울리는 이명증에도 좋다.

눈을 밝게 한다. 눈물이 나는 경우 눈이 충혈 되고 아프며 눈이 침침한 것을 다스린다.

풍기를 없앤다. 거풍. 산풍 작용이라고 하는 데 풍기를 없애고 몰아낸다는 뜻이다. 관절을 순조롭게 하며  근골사이를 부드럽게 하여 저린 증상을 다스리고 류머티스성 근골통 등을 다스린다.

피부 .모발을 윤택하게 한다. (명의별록)에는 익기( 기운을 돋우는것)하고 피부를 윤나게 해준다고 했으며 (약성론)에는 콧수염과 모발을 자라게 한다.고 했고 (신농본초경집주)에는 모발이 빠지는 것을 다스린다.고 했다. 



52. 금불초- 노란 꽃 속에서 미소 짓는 부처님



조형물처럼 깔끔하게 단장해놓아 좀체 눈길이 가지 않던 아파트 단지 내 화단이 갑자기 환해졌다. 살짝 다가가 보니 금불초(金佛草)가 피었다. 더위와 일상에 찌푸렸던 얼굴이 금세 펴지며 밝아진다. 오래 못 본 옛 동무라도 만난 듯 친근한 생각이 든다. 관리인이 잡초라며 뽑아버렸다면 어쩔 뻔했는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게 드물고,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 이가 없을 터. 보통의 꽃이 그러할진대 금부처만큼 밝은 금불초는 오죽하랴. 무척 환하고 아름다워 마음까지 밝아진다. 금물결을 이루듯 무리지어 핀 금불초를 바라보며 마음을 밝히고 있노라니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스쳐간다. 이렇게 가을이 오려나 보다.  


금불초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습기가 있으면서도 햇볕이 잘 드는 산 가장자리에서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다 자라면 두 자 정도 될 만큼 크다. 손가락 길이쯤 되는 길쭉한 피침형의 잎은 마주나며, 밑부분이 갑자기 좁아져 아예 잎자루가 없거나 원줄기를 감싸고 있는 게 특징이다.

꽃은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핀다. 꽃차례 지름도 3~4cm나 된다. 금색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 노란색이 아주 선명하고 참 곱다. 가장자리에 달리는 뾰쪽한 혀 모양의 설상화(舌狀花)는 아주 가는 편으로 이 또한 금불초의 특징이다.

이 꽃에 금불초란 이름이 붙은 것은 실제 꽃 모양이 금으로 만든 부처상을 닮아서인데 노란색으로 피는 꽃이 금부처처럼 환하다. 좀 더 오래 꽃과 사귀며 들여다보면 부처 얼굴처럼 잔잔하면서 평화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질척한 땅이나 마른땅이나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습성은 흙탕물에서도 꽃을 피우는 연꽃의 특징을 닮은 듯도 하다.

금비초(金沸草), 여름 국화라는 뜻의 하국(夏菊), 누렇게 익은 꽃이라고 황숙화(黃熟花), 동그란 꽃 모양이 금화(金貨)를 닮았다 해서 금전화(金錢花) 또는 금전국(金錢菊), 선복화(旋覆花) 등으로도 부른다. 영어로는 ‘Chinese elecampane’이다.  

예전에는 산 가장자리 혹은 논과 밭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어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듯 말이다. 하지만 개체수가 줄어든 요즘은 관상 야생화로 많은 관심을 받는다. 여러 포기를 모아 심으면 무척 아름답다.

특히 개화시기와 꽃 모양, 키가 비슷하면서 보라색 꽃이 피는 벌개미취와 나란히 모아 심으면 멋진 화단을 가꿀 수 있다. 이 꽃은 드물게 습기에 잘 견디는 식물이면서 동시에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는 장점이 있다.  

한방에서는 꽃 말린 것을 선복화라고 부르며 금불초와 그 유사종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약으로 쓴다. 기침, 천식, 소화불량, 딸꾹질, 배에 가스가 찰 때 등 다양한 증상에 긴히 쓰인다. 4~5월 싹이 돋아나면 어린순을 먹기도 하는데, 맵고 쓴맛이 있어 데쳐 찬물에 하루 정도 우려낸 다음 나물로 무쳐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 먹는다.

금불초로 시작한 환한 마음이 금물결처럼 이어져 오늘 하루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길 기원한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53. 익모초- 어머니와 아내 위한 고운 꽃



이맘때 들판에 가면 익모초 꽃을 볼 수 있다. 익모초는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 듯한 식물이지만, 어찌 보면 쑥과 비슷하고 들판이나 시골길 가장자리 수북한 풀밭 틈새에서 자라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눈여겨보지 않게 되고, 실제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여름 내내 그 속에서 줄기를 쭉 돌려내고 층층이 홍자색 꽃들을 매달고 피워내니 이즈음이 이름만 들어 알았던 익모초를 익힐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 하겠다.

 


익모초는 꿀풀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다. 이즈음 꽃대가 달리는 줄기가 쭉 올라오면 1m까지도 자란다. 꿀풀과에 속하는 풀들이 그렇듯, 익모초도 줄기는 둔하게 네모지고 흰 털이 나서 전체적으로 희뿌옇게 느껴진다. 잎은 마주난다. 3개로 가늘게 갈라진 조각은 다시 2∼3개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어 다소 특별한 모습이다. 그래서 한 번 알고 나면 다음엔 꽃이 없어도 알아보기 쉬워진다.  

꽃은 한여름에 핀다. 하나하나 보면 작은 꽃들이지만, 몇 개씩 모여 층층이 달리는 진한 분홍빛 꽃들은 초록 일색의 풀숲에서 제법 눈길을 끈다. 뜻밖에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좀 더 관심 있게 다가가 그 작은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꽃의 꽃잎 끝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가 헤프게 입술을 벌린 여인처럼 보인다. 오목조목 재미나다. 

많은 이가 알고 있지만 익모초(益母草)는 어머니들을 이롭게 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육모초라고도 하고, 한방에서는 씨앗을 충위자, 잎과 줄기를 합쳐 충위경엽이라는 약재로 사용한다.

눈비애기라는 우리말 이름도 있다. 이름에서 알려주듯 당연히 임신을 돕기도 하고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여러 병을 잘 낫게 하는 등 부인병에 두루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모든 약재가 그러하듯 사람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니 잘 알아보고 올바르게 써야 한다.  

민간에서는 술에 익모초를 넣어 약술로도 먹는데, 월경을 조절하고 혈독을 푸는 데 좋다고 한다. 차로 끓여 마시기도 한다. 익모초차는 혈액순환이 잘되게 도와주고 어혈을 풀어주며 자궁 수축력을 높여주고 신장염으로 몸이 붓거나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올 때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좋다는 기록도 있다. 또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맞히고 그 이슬과 함께 짓찧어 즙을 내 마시면 한여름 더위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도처에 널린 수많은 식물은 제각기 그 모습과 아름다움을 달리하고 그 식물이 품고 있는 성분도 각각이다. 우리는 그중에 아주 일부를 알아내 병을 다스린다. 뜨거운 여름 볕이 한풀 꺾인 어스름한 초저녁쯤 혹은 이른 아침 들길을 산책하다 만난 익모초 꽃송이들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할 만큼 곱고 신선하다.

낮에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익모초는 그늘지지 않은 곳에서 자란다. 약으로 쓰는 익모초는 단오 즈음에 거둔다. 부인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나 아내가 있을 경우 차라도 끓여 나눠 마시면 그 마음으로라도 낫지 않을까 싶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54. 투구꽃- 한가위만큼 풍성한 보랏빛 자태



가을이다. 국화과 식물 일색인 가을 숲 속에서 그 특별한 자태를 뽐내며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꽃이 있다. 이제 막 꽃피우기를 시작한 투구꽃. 신비한 보랏빛과 함께 덩굴도 아닌 것이 비스듬히 자라는 독특한 모양은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누구나 눈여겨보게 되고 이름도 궁금해진다. 그러다 투구꽃이란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 꽃 모양이 마치 머리에 쓰는 투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투구꽃은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다른 물체에 기대어 비스듬히 자라는 것을 바로 세워보면 높이가 1m를 조금 넘는다. 잎은 전체적으로는 둥근 모양이지만 손바닥처럼 깊게 다섯 혹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9월쯤 피기 시작해 10월이면 전국 어디서나 절정을 맞는다. 꽃 한 송이 길이가 3cm도 더 되는 꽃송이가 이삭 모양으로 모여 주렁주렁 달린다.  


 


사실 투구꽃은 약용식물로 더 유명하다. 초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깊은 산에 가면 이 식물의 덩이뿌리를 약으로 쓰려고 찾아다니는 약초꾼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이야말로 잘 쓰면 약이요, 잘못 쓰면 독이라는 이야기가 꼭 들어맞는다. 초오는 통증을 가라앉히고 경련을 진정시키며 습기로 허리 아래가 냉해지는 증세나 종기로 인한 부기를 다스리는 등 다양한 곳에 사용한다.  

하지만 많은 미니라아재빗과 식물이 그러하듯, 약재로 사용하는 덩이뿌리에 맹독 성분이 들어 있어 전문가 처방 없이 그저 약초라는 이름만 듣고 복용하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사약을 만드는 그 유명한 부자(附子)가 이 투구꽃과 형제 식물이라는 점만 봐도 투구꽃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는 이 식물에서 독을 뽑아내 화살촉이나 창끝에 발라 독화살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독성을 없애려고 입이 마비되는 느낌이 없어질 때까지 소금물에 반복해서 우려내거나 증기로 찐다고 한다.

투구꽃은 약용으로뿐 아니라 관상용으로도 훌륭한 꽃이다. 정원에 심어보는 것도 시도해볼만하다. 꽃 모양과 늘어지는 줄기에 매달리는 분위기가 독특해 꽃꽂이 소재로도 개발 가능성이 있다. 화단에 심을 때는 인공적으로 만든 정원보다 낙엽이 지는 큰키나무 밑에 퍼져 자라도록 심으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추석이 되면 모두 떠나온 고향집으로 발길을 향한다. 그런데 투구꽃도 이동한다. 식물은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 동물처럼 뛰어다니는 건 아니지만 덩이뿌리가 썩고(괴근) 인근 다른 뿌리에서 새싹이 올라오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자리를 움직인다. 뿌리 크기만큼 옆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한자리에서 몇 년씩 양분을 빨아들이는 것보다 더 기름진 옆쪽 토양으로 이동하는 것이 이득일 테니 투구꽃으로선 아주 현명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성묘를 위해 찾은 고향 마을 뒷산자락에서 행여나 이 신비한 꽃을 만날 수 있다면 한가위가 주는 또 하나의 행복이리라.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55. 진노랑상사화- 가을의 그리움 노랗게 물들었나





대지의 기운이 이미 서늘하다. 가을은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아릿아릿 서글픔마저 들게 한다. 세상 끝까지 갈 것 같던 뜨겁던 여름이 너무 급속히 밀려나간 허전함도 한몫하는 듯하다. 여전히 푸르지만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숲 속에서 때 아닌 노란 꽃들이 눈에 보인다. 진노랑상사화다. 가을의 애잔함 때문일까. 지난여름부터 피기 시작한 그 꽃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상사화도 아닌, 진노랑상사화. 이름이 좀 생소하다.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상사화는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없어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사연을 담은 아름다운 꽃이다. 식물이 결실을 보는 데 필요한 인연의 두 주체는 꽃과 잎이 아닌 수술의 꽃가루와 암술머리지만, 형태적으로 볼 땐 잎과 꽃은 바늘과 실 같은 존재다.

어찌 됐든 상사화는 한여름에 꽃을 피우고 이미 져버렸다. 알고 보면 우리 땅에서 난 자생 토종 꽃도 아니다. 반면, 상사화가 질 무렵부터 꽃을 피워 지금까지 만날 수 있는 진짜 귀한 우리 꽃이 바로 진노랑상사화다.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꽃 색깔도 다르다. 진노랑색이라기보다 우윳빛이 아주 많이 섞인 은은한 노란색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 몇 포기씩 무리지어 피어난다.  

혹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토종 우리 꽃 이름에 왜 외지에서 들어온 꽃의 이름인 상사화가 붙었는지 의아해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진노랑상사화는 우리 땅에서 자란 지 오래됐고,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이다. 다만, 식물학자들이 이 꽃에서 기존 상사화와 다른 무엇이 있음을 발견하고 최근 새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노랑상사화뿐 아니라 주황색 꽃이 피는 백양꽃, 진한 주홍색 꽃을 피우는 꽃무릇(석산)이 모두 꽃과 잎을 동시에 볼 수 없는 상사화와 한 집안 식물이다.


 


이 집안 꽃들은 백합과 식물답지 않게 한쪽이 깊게 패이고 벌어져, 마치 부챗살이 펼쳐지듯 꽃이 피는 공통점을 지닌다. 주로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땅속에 있는 비늘줄기를 약으로 쓴다는 점도 닮았다. 이 비늘줄기에는 알칼로이드가 함유돼 있어 그냥 먹으면 독이 될 수 있지만 잘 쓰면 약이 된다. 해독, 가래 제거, 종기 치료는 물론, 소아마비 등 마비로 인한 통증에 예부터 처방해온 약재라는 점도 같다.

여러해살이풀인 진노랑상사화는 꽃자루가 올라왔을 때 키가 가장 큰데, 다 자라면 60cm 정도 된다. 잎은 봄에 나왔다 지고, 느지막이 꽃대를 올려 그 끝에 큼지막한 꽃송이를 몇 개씩 사방으로 매단다. 성큼 다가선 가을바람에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면, 영광 불갑사 같은 전라도 지방의 사찰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지금쯤 그 주변에 가면 마지막 남은 진노랑상사화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꽃이 질 무렵이면 다시 새로운 붉은색 꽃무리가 장관을 이룬다. 바로 석산이다. 이번 가을, 진노랑상사화를 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56. 구절초- 수줍은 자태에 향기도 좋아라



가을이다. 남쪽에서 전해오던 꽃 소식과는 반대로 북쪽에서 단풍 소식이 날아든다. 국립수목원에도 계수나무 잎사귀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숲은 이 나무가 내어놓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내음으로 가득하다.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밀려온다. 옮겨 딛는 걸음걸음 사이로 핀 수줍은 꽃. 바로 구절초다. 더도 덜도 말고, 정말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구절초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산국, 감국과 같은 속(Chrysanthemum)이지만 이들 들국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는 데 반해 구절초는 흰색 또는 연분홍색 꽃을, 그것도 훨씬 큼지막하게 피워낸다. 우리 국토 어느 곳에서든, 멀리는 만주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뿌리를 내려 아름드리 꽃을 매어단 채 고운 자태를 자랑한다. 못 이룬 남북통일의 꿈은 물론, 옛 고구려의 영광까지 생각게 하는 꽃이다.   



구절초는 본래 한방 또는 민간에서 약용식물로 이용해왔다. 생약명도 구절초로, 글자 그대로 9개 마디를 가졌다는 뜻이다. 9월 9일에 꺾어 모아 쓴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들은 선모초라고도 부른다. 구절초는 주로 부인병을 다스리는 식물로 유명하다. 더러는 꽃을 술에 담가 그 향기를 즐기기도 하는데, 피를 만들고 원기를 돋우는 보혈강장제로 쓴다. 이 밖에도 여러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요즘엔 이 구절초 꽃을 말려 베개를 만들어 베고 자면 두통이 사라진다고 해 유명해지기도 했다. 나무 아래 큰 무리를 지어 심어놓으면 그곳이 명소가 된다. 아름답고 풍성하며 향기롭고 이로운 꽃이다.




 

우리나라엔 아주 비슷하게 생긴 형제 구절초가 몇 종류 더 있다. 그중에서도 높은 산 바위틈 같은 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살랑대는 모습이 마치 가녀린 여인을 연상케 하는 흰색 산구절초가 백미다. 사실 산에 가면 구절초보다 훨씬 자주 만나는 것이 바로 산구절초다. 잎이 국화 잎을 닮은 구절초에 비해 가늘게 갈라져 있으며 꽃대가 스러지지 않고 바로 서서 자란다. 그 밖에 바람 많은 높은 산 정상에 사는 바위구절초도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바람에 일렁이며 천지의 깊은 물빛을 바라보는 꽃, 키는 작지만 분홍색 꽃이 유난히 곱다. 한탄강 주변에서 자라는 포천구절초는 잎이 산구절초보다 더 가늘어 코스모스 잎처럼 보인다. 흔히 서양 꽃 마거릿과 혼동하는데, 여름에 피는 이 꽃은 이미 지고 없으니 지금 보일 리 없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빼어난 모습으로 자라는 구절초를 보노라면 새삼 이 땅의 자연과 그 속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한 경이로움에 절로 경건한 마음까지 든다. 내 삶도 가을 들녘, 혹은 가을 숲 속의 구절초처럼 맑고 향기로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57. 물레나물- 누가 바람개비를 만들어놓았을까




지천에 가을꽃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의 그윽한 향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자유롭고 넉넉하게 한다. 이른 봄 언 땅을 녹이고 올라오는 오종종하고 탱글탱글한 봄꽃들하고는 모습도, 때깔도, 향기도 사뭇 다르다. 가을꽃의 빛깔은 지난 계절의 색깔들을 덧입힌 듯 그 깊이가 이를 데 없다.  

이 아름다운 가을 꽃밭에서 문득 지난여름의 흔적을 만난다. 물레나물이다. 한여름 햇살 아래 물레나물은 그저 개성 있는 야생화 가운데 하나려니 싶었는데, 이 가을 숲길에서 만나니 느낌이 훨씬 색다르다.  

물레나물이란 이름은 길쭉한 꽃잎 5장이 마치 바람을 타고 도는 바람개비처럼 한 방향으로 휘어진 데서 비롯했다. 그 모양이 빙글빙글 돌리는 물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계절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들이 물레를 돌려 천을 짜듯 엮어낼 때가 됐다는 뜻일까. 가을 숲길에 핀 물레나무는 말이 없다.  

물레나물은 물레나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숲 가장자리 산기슭의 물가 혹은 논이나 밭이 산과 이어지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다. 어디서나 잘 자라지만 건조하고 메마른 곳보다 기름지고 촉촉한 곳을 더 좋아한다. 다 자라면 키가 어른 무릎 높이쯤 되며 네모진 줄기엔 어른 손가락 길이쯤 되는, 가장자리가 매끈한 잎이 자루도 없이 마주난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그 끝에 아이 주먹만한 꽃이 달리는데 그 모양이 일품이다. 진한 노란색 꽃빛은 여름에 피어 가을까지 이어진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레나 바람개비 같은 꽃이 핀다.

독특한 모양 때문일까. 물레나물은 한 번 보고 이름을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하는 식물이 된다. 꽃잎 가운데 튼실하고 강한 암술과 붉은색 수술이 많이 있는 게 특징이다. 꽃이 지고 나면 로켓 끝부분처럼 끝이 뾰족한 짧은 원통형의 열매가 맺히는데, 처음엔 초록색을 띠다가 익을수록 갈색으로 마르고, 급기야 그 끝이 벌어져 아주 작은 씨앗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씨앗을 들여다보면 그 표면에 그물 같은 맥이 있다. ‘물레로 짠 결실’이라 생각하니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름에 ‘물레’와 함께 ‘나물’이란 단어가 들어가 대략 짐작했겠지만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물레나물의 어린순을 살짝 데쳐 헹군 후 양념해서 무친 나물은 맛도 좋다. 누군가는 이를 ‘나물의 왕자’라고 했다. 왕도, 아버지나 어머니도 아닌 왜 하필 왕자란 말인가. 그만큼 나물로 훌륭하다는 뜻일 터이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이용하는데, 생약명으로는 홍한련(紅旱蓮)이라고 부른다. 간 기능에 이상이 생긴 증상을 비롯해 피를 멈출 때 처방하며, 종기 등이 나면 상처에 식물체를 찧어 붙이기도 한다.  

꽃이 좋아 정원에 심는 이도 생겨나고 있다. 씨앗을 뿌리면 비교적 빠른 기간 안에 큰 꽃이 피는 데다, 자라는 곳도 크게 가리지 않아 빈 공간을 채우는 녹화용 식물로 좋다.

어느 한 방향으로 휘어 돌아 피지 않는 물레나물 꽃처럼 우리네 삶도 둥글둥글해졌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게 물레나물 주위를 감싸고 도는 가을바람이 서늘하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58. 층꽃나무- 가을에 만나는 꽃이라 더욱 예뻐라





가을이 깊어가면서 풍성하던 가을꽃들이 어느새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나무의 단풍 빛은 밤의 찬 기운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들지만 꽃들은 하나 둘씩 스러져간다. 수목원의 가을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보랏빛 꽃송이를 아름답게 피워내는 꽃나무가 있다. 바로 층꽃나무다. 여름 끝머리부터 피기 시작했을 텐데 여전히 그 자태를 유지하고 버티는 모습이 새삼 반갑고 대견하다.  

식물 가운데는 나무 같은 풀이 있고, 풀 같은 나무가 있다. 층꽃나무는 정말 풀 같은 나무다. 자그마한 포기를 만들면서 줄기 가득 꽃송이를 매단 모습은 나무와 다름없지만, 한겨울같이 기후나 환경이 자신의 섭생과 맞지 않으면 땅 밖으로 나온 부분이 모두 죽어버리므로 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나무가 주로 자라는 시골에선 정식 이름보다 층꽃풀, 난향초(蘭香草)라고 부른다. 

층꽃나무는 꽃 모양만 자세히 보면 왜 ‘층꽃’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답이 나온다. 작은 꽃들이 잎 나오는 겨드랑이 부근에 한 무더기씩 층층이 달리기 때문이다. 보통 20~30송이 정도가 한 층에 모여 나오며, 전체적으로는 조건만 좋으면 20층씩 달리기도 한다. 남보라색 꽃송이를 자세히 보면 꽃은 통꽃으로 중간에서 5갈래로 갈라져 거의 수평이 되게 벌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꽃잎 5장 가운데 아래 한 장만 특별히 크고 가장자리가 아주 가늘게 갈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즈음엔 열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붙어 있는 꽃받침 안에 열매가 5개씩 들었다.  

식물체 전체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층꽃나무의 영어 이름은 블루 스피레아(Blue Spirea)로, 푸른 조팝나무라는 뜻이다. 식물학적으로 조팝나무와 전혀 무관하지만 줄기 끝에 꽃송이들이 층층이 달리는 모습이 마치 꽃으로 만든 방망이 혹은 휘어지는 채찍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층꽃나무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관상용이다. 정원이나 길가 화단에 넓게 심어놓으면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군락을 이뤄 심어놓으면 나비와 벌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밀원식물로 이용하기도 한다.  

더욱이 층꽃나무는 꽃이 여름에 피기 시작해 가을까지 이어지는 아주 긴 개화기를 갖고 있어 관상수로서의 개발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같은 무렵 꽃이 피는 구절초류와 색을 배합해 심으면 더욱 화려한 화단을 만들 수 있다. 꽃이 달린 부분이 길기 때문에 꽃꽂이용으로 잘라 쓰기에도 적합하다. 한방에서는 난향초라고 해 약으로 쓴다.

층꽃나무가 자라는 곳은 따뜻한 지방의 산지이다.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남쪽 해안이나 섬지방의 볕이 잘 드는 산에서 볼 수 있다. 남쪽지방 산자락을 오르다 햇살 좋은 사면에 멀리 바다를 보고 피어 있는 층꽃나무를 만난다면 그 또한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59. 단풍취-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피는 설상화





하루하루가 너무 다르다. 봄 햇살 받고 태어난 신록과 여름의 짙푸름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했는데 이제 단풍 빛이 완연하다. 이번 가을 단풍 빛은 유독 빠르게 무르익는다. 늦더위가 오래도록 머물러 가을이 늦춰지다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형국이다. 매일 아침 만나는 광릉 숲의 풍광은 하루 자고 일어나 돌아보면 확 바뀌어 있다. 성큼성큼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또 아쉽다. 

사람들은 나무만 단풍이 드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풀잎에도 단풍이 들 수 있고 실제 들기도 하지만, 풀 대부분이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싶으면 지상부가 사라져버려 낙엽이니 단풍이니 느낄 겨를이 없을 따름이다. 식물 이름에 단풍이 붙은 것이 여럿 있다. 먼저 당단풍, 중국단풍, 섬단풍, 설탕단풍 등 단풍나무 집안이다.  

그런데 단풍이 들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빌려온 식물들도 있다. 돌단풍, 단풍마, 단풍제비꽃 등이 있으며 단풍취도 그중 하나다. 이들 식물들은 정말 식물학적으로 ‘단풍’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고, 단풍나무 집안의 계통식물학적 특징과도 무관하다. 다만, 잎이 단풍나무 잎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붙은 이름이다. 

단풍취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공기 좋은 활엽수 숲에서는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오래전 대도시나 공단처럼 대기오염과 관련 있는 지역 주변의 숲과 오염과는 무관한 그야말로 청정지역 숲에 사는 식물들을 비교해본 적이 있다. 당시 깨끗한 지역에는 없고, 대기오염이 심한 지역에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기오염 지표종 같은 식물을 찾으려고 했는데 끝내 찾지 못했다. 반대로 공기가 깨끗한 지역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식물을 발견했는데, 그 풀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단풍취다.

그러니 단풍취가 발아래 펼쳐지는 숲길을 걷고 있다면 크게 기지개를 켜고 마음껏 숨을 쉬어도 좋다. 가을이라 단풍취가 떠올랐지만 어찌 보면 이 풀을 가을보단 여름 풀로 구분하는 이가 많을 듯하다. 꽃이 한여름에 피기 때문이다. 단풍잎을 닮은 잎사귀 틈에서 꽃대가 쭉 올라와 달리는데, 자세히 보면 아주 가느다란 설상화들이 개성 넘치게 피어 있다. 그러고 보니 천연림 속에 그토록 현대적인 감각의 잎과 꽃을 가진 단풍취가 자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멋지다.  

봄에는 어린싹을 나물로 먹는다고 하는데, 국화과 식물 대부분이 연하고 독성이 없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한방에서 약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문헌들을 살펴보니 단풍취는 산나물을 개발하는 연구에도, 식용기름 관련 연구에도 등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항염증 작용을 비롯한 이 식물의 여러 약용 효과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어 의약계의 주목을 받는다.

단풍취는 괴발땅취, 괴발딱지, 장이나물, 좀단풍취 같은 독특한 별칭이 있다. 그만큼 예전부터 우리 곁에 있던 정겨운 식물이란 증거일 터다. 단풍 색깔에만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단풍취처럼 단풍을 닮은 잎이 어떻게 가을을 나는지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0. 백서향 - 미인의 향수 냄새 천 리를 가네



이 세상에는 향기로 한몫하는 식물이 많다. 은은히 퍼지는 수선화의 향기, 발끝에 묻어 그 향이 백 리를 가는 백리향…. 그런데 백리향보다 더 진한 향기로 천리향이란 별명을 가진 꽃나무가 있다. 바로 백서향이다.  

백서향은 팥꽃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수로 잎은 넓지만 키는 작다. 그윽한 꽃향기와 함께 순백의 꽃송이, 반질반질하고 늘 푸른 잎사귀, 오래도록 달리는 붉은 열매 등 정원 한쪽에 심어놓고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꽃나무다.  

원래 백서향이 사는 곳은 전남 맥도와 흑산도, 경남 거제도, 그리고 제주에서 바다가 가까운 숲이다. 상록수이지만 추운 곳에서는 겨울을 나지 못한다. 그래서 백서향의 꽃향기와 자태에 매료된 사람은 화분에 심어놓고 즐긴다. 더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얻으려고 품종개량도 계속하고 있다.  

남쪽에선 겨울이 다 가기 전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 봄인가 싶으면 벌써 활짝 핀다. 어른 손가락 길이쯤 되는 길쭉한 잎은 늘 푸르게 반질거리고 가지 끝에서 돌려가며 아주 촘촘히 자란다. 그 사이로 백색의 작은 꽃들이 둥글게 모여 달려 마치 신부의 부케를 보는 듯하다.

백서향의 꽃은 언뜻 통꽃 같지만 사실 이 나무의 꽃잎은 퇴화하고 꽃받침 잎이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다. 백서향은 꽃을 일찍 피운 만큼 열매도 일찌감치 만든다. 다른 식물들이 꽃피우기에 열중할 5~6월이 되면 꽃이 있던 자리에 붉고 둥근 열매가 달린다. 열매조차 아름답다. 하지만 앵두처럼 열리는 이 열매를 먹음직스럽다고 해서 덥석 먹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독성분을 지녔기 때문이다.  

백서향 뿌리는 사촌인 서향과 함께 지혈제, 백일해 치료제, 가래 제거제로 사용되고 강심제와 타박상 치료제로도 쓰인다. 워낙 희귀한 데다 보고 즐기기에도 아까워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 각 섬에 자생하는 백서향은 개량해서 키우는 나무들로, 실제 멸절한 곳이 있을 만큼 귀하다. 제주 천제연폭포 주변에는 증식해둔 나무들을 심어 복원했을 정도다.

서향은 원래 중국이 고향으로,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고려시대쯤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하다. 강희안은 “한 송이가 겨우 피어 한 뜰에 가득하더니 꽃이 만발해 그 향기가 수십 리에 미친다. 꽃이 지고 앵두 같은 열매가 푸른 잎사귀 사이로 반짝이는 것은 한가한 중에 좋은 벗이로다”라고 칭찬한다. 

게다가 서향은 꽃 가운데 가장 상서로운 행운의 꽃인 화적(花賊), 즉 꽃들의 적이라고도 불린다. 서향의 향기는 밤길에서도 서향인 줄 알고, 잠을 자다가도 알 수 있을 만하다고 해서 수향(睡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또 미인의 향수 냄새라고도 했다고 한다. 꽃향기에 대한 칭찬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하지만 보라색 서향보다 꽃빛마저 순백으로 순결한 우리의 백서향이 더 아름답고 길하다.  

두 달도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을 백서향의 향기, 꽃빛과 함께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누가 아는가. 기대치 않은 상서로운 일이 벌어질지.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61. 차나무- 찬 서리 맞고 더 빛나는 하얀 꽃



늦은 가을비가 한차례 내리더니 단풍 들었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기온이 낮아져 이내 손이 곱을 정도다. 어느새 따뜻한 차 한 잔이 소중한 계절이 됐다. 오미자차, 구기자차, 커피…. 여러 차가 있지만 그냥 ‘차’ 하면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가 먼저 떠오른다. 녹차, 홍차 같은 것들 말이다.  

나라별, 산지별, 찻잎을 따는 시기별로, 또는 말려서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차 맛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이는 많지만, 아마도 차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더욱이 차나무가 겨울을 눈앞에 둔 11월, 바로 이 스산한 계절에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키 작은 차나무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희고 소담스러운 꽃잎에 동백처럼 노란 수술이 유난히 곱다. 10월부터 12월까지 찬 서리를 맞으면서 더욱더 영롱해진다. 차나무 꽃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본 시인들은 이를 운화(雲華)라고 불렀다. 나무들이 대부분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리지만, 지난해 맺어놓은 열매가 여무는 이즈음 한쪽에서는 꽃이 피어나니, 아름다운 흰 꽃과 조랑조랑 매달리는 귀여운 열매가 함께하는 이즈음이야말로 차나무의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차나무는 꽃과 열매가 마주 본다고 해서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도 한다. 


차나무는 원산지를 두고 논란이 많다. 신라 왕자 김교각(金喬覺)이 신라에서 가져간 차 씨로 당나라가 차밭을 일궜으니 우리 식물이라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들여와 즐겨 마셨다는 기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으로 미뤄 중국에서 들어왔다고도 한다.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후자가 맞는 듯하다. 어쨌든 예전엔 재배했던 것이 야생으로 자라면서 스스로 씨를 맺고 싹을 틔우니 적어도 귀화는 한 셈이다.

차나무는 늘 푸른 작은 키 나무로, 꽃빛만 다를 뿐 동백나무와 같은 집안이다. 차나무의 꽃은 깨끗한 흰색 꽃잎을 5장 갖고 있다. 차 꽃의 흰색은 우리 민족에게는 백의민족을, 군자에게는 지조를, 여인에게는 정절을 상징해왔다. 꽃잎 5장은 녹차가 가지는 5가지 맛에 비유된다. 쓰고(苦), 달고(甘), 시고(酸), 짜고(鹽), 떫은(澁) 맛이 그것이다. 인생을 너무 인색(鹽)하게도, 너무 티(酸) 내지도, 복잡(澁)하게도, 너무 쉽고 편(甘)하게도,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苦)도 살지 말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또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에 차를 넣어 보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시집온 며느리에게 차 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는 차나무가 곧게 자라는 데다, 옮겨 심으면 쉽게 죽어버리는 성질이 있는 까닭에 차나무를 본받아 한평생 해로(偕老)하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남도에 가면 몇 곳에 다원(茶園)이 있다. 자연스럽게 울타리가 쳐져 곱고 가지런한 느낌이 드는 정경은 잘 가꿔놓은 정원처럼 아름답다. 골골이 다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차나무 꽃도 만나고 인생도 더듬어보는 초겨울 여행을 권한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2. 광릉요강꽃- 숲의 초록요정 다시 살아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희귀한 꽃은 무엇일까. 제주 한라산 서북 벽에서만 붙어사는 돌매화? 멸절 직전에 놓인 자생 풍란 혹은 나도풍란? 이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광릉요강꽃이 아닐까 싶다. 이름도 독특한 광릉요강꽃. 이 꽃은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난초과에서도 희귀하고 까다로우며 독특한 모양으로 유명한 시프리페듐(Cypripedium)속에 포함된다.

큼직한 잎(10~20cm)이 마치 치맛자락을 펼쳐놓은 듯하다. 잎자루도 없이 줄기에 마주보고 두 장씩 달려 시원하고 보기에도 좋다. 이름을 보고 짐작했겠지만 국립수목원이 자리한 광릉 숲에서 처음 발견됐다. 거기에 봄에 피는 꽃은 더욱 특별하다. 줄기 끝에 길이가 5~8cm 될 정도로 큼직한 꽃송이가 고개를 숙인 듯 또는 옆을 보는 듯 한 송이씩 달린다.

‘요강’은 순판(난초과 꽃잎의 아랫부분이 혀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말)이 마치 부풀어 오른 주머니 또는 항아리 모양 같다고 해서 옛 어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 귀하고 우아한 꽃에 요강이라니,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도 혹 있겠지만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여기면 즐거워진다.  

꽃 빛깔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독특하다. 꽃에서는 보기 어려운 연녹색, 갈색, 흰색, 연분홍색이 함께 있다. 모양이 신기한 데다 꽃이 희귀하기까지 하니 그 가치가 한층 높다 하겠다.

이 꽃을 이리도 보기 힘들게 된 것은 숲의 여건 변화도 한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희귀 난초를 수집하는 사람들의 남획이 가장 큰 원인이다. 푼돈에 양심을 판 사람들, 희귀한 난초면 반드시 자신이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집증적 수집가들이 광릉요강꽃을 자생지에서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로 내몰았다.  

몇 해 전만 해도 광릉요강꽃을 한두 포기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국립수목원 연구자들이 열심히 자생지를 찾아내고 보전해 지금은 아름다운 포기가 곳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최근에는 싹이 터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기까지 1년간의 기록을 미속촬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이 경이로운 모습은 방송을 타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보람이고 감동이다.

이런저런 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지만, 이 땅 한구석엔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희망적인가. 숲을 숲답게 만드는 ‘초록요정’ 광릉요강꽃이 오래도록 우리 땅에서 우리 모두와 함께 살아가길 소망한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3. 수선화- 따뜻한 남도 섬마을에 ‘함박웃음’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게 있을까. 하지만 아름다운 데다 고귀하기까지 한 꽃을 꼽으라면? 선뜻 대답하기 힘들지만, 내 나름의 기준으로 보면 일단 향기가 지나치지 않고 그윽하되 맑아야 할 것 같다. 외관상으론 풍성하기보다 단아한 기품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거기에다 지천으로 꽃이 피는 계절보다 남보다 일찍 혹은 늦게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피어나면 더욱 돋보일 듯하다.  

과연 이런 조건에 맞는 꽃이 있을까 하고 찾아보니 수선화가 떠오른다. 우리가 요즘 만나는 수선화 품종은 대부분 서양에서 들어온 종류로 여러 색깔과 모습으로 개량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토종 수선화는 겨울 언저리 따뜻한 남쪽 섬에서 만날 수 있다. 남도지방 바닷가의 양지 바른 무덤가에서 무리지어 피곤 한다.

그 여린 줄기와 맵시 있게 뻗어 나온 부드러운 잎 사이로 활짝 웃으며 피어나는 연노랑 꽃송이의 청초함이라니…. 연한 꽃잎 가운데 동그랗게 자리 잡은 진한 노란색을 띠는 또 하나의 꽃잎. 그리고 그 고운 꽃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 정말 꽃이 가져야 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조화 있게 한 송이에 빚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도 함부로 자랑하지 않고 기품을 간직하니 그 누가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선화는 수선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이다. 양파처럼 겹겹이 쌓인 비늘줄기가 땅속에 묻히고 그 아래로 가는 수염뿌리가 달린다. 늘씬하고 파란 잎 사이로 겨울이 한창일 때 이미 꽃대가 올라오고, 그 위에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꽃송이가 피어난다. 수선화는 기본적으로 꽃잎을 여섯 장 달고 있으며, 그 가운데로 마치 금으로 만든 술잔 모양의 샛노란 꽃잎이 또 하나 올라와 얹혀 있는데 이를 두고 부화관(副花冠)이라고 한다.

수선화를 두고 흔히 금잔옥대(金盞玉臺)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그 모양이 꼭 옥대에 받쳐놓은 금 술잔 같기 때문이다. 재미나는 사실은 거문도에서 절로 자라는 수선화는 모두 이 금 술잔을 닮은 금잔옥대인 데 반해, 제주 해안가에 자생하는 수선화들은 술잔 모양 대신 꽃잎이 오글오글 모여 색다른 멋을 낸다는 점이다.  


 

수선화의 고향은 중국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옛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지 자못 오래됐다. 실제 거문도나 제주에 가면 누가 심지 않았어도 오래전부터 곳곳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수선화가 있었다. 아주 오래지 않은 옛날, 제주에서는 밭에 수선화가 너무 많이 피어 뽑아내 버릴 정도였다는 기록도 있어, 그곳 사람들은 수선화를 귀화한 식물이 아닌 우리 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선화는 그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애착을 가리키는 ‘나르시시즘’이란 용어의 유래가 된 그리스신화가 유명하다.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이 요정 네메시스의 저주를 받아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사랑한 나머지 결국 물속에 뛰어들어 죽는데, 그 호수 옆에서 미소년의 혼을 담아 피어난 꽃이 수선화라는 이야기다. 수선화의 라틴어 속명(屬名)이 ‘나르키수스’가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가오는 연말, 수선화와 관련한 그리스신화를 반면교사 삼아 너무 자기 자신만 챙기지 말고 주변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남은 한 해를 보내길 바란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4. 가는털백미- 북쪽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 손님



우리 같은 산림생물 연구자는 이즈음이 아주 중요한 시기다. 한 해 동안 산과 들로 다니며 혹은 실험실에서 땀 흘리며 노력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분석해 평가받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내년의 연구 계획을 마련하는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멸종 직전 식물을 증식해 복원하는 일, 새로운 생물을 찾아내는 일, 식물종의 주권을 찾고자 오래된 문헌이나 표본과 씨름하는 일 등 수많은 성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득 가는털백미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식물은 몇 해 전 강화도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가는털백미는 좀박주가리라고도 하는데, 박주가리보다 백미꽃 집안에 속하는 식물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분포지역은 몽골과 만주 일대, 평안남도 지역까지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좀 더 남쪽인 강화도에서 발견됨으로써 분포 지역이 더 넓어졌다. 원래 북부지방 식물이니 본 사람도 없고, 기록으로 접하기도 어렵던 식물이 남한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며 언론을 타기도 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50m2(15평) 남짓한 곳에 100여 개체가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룬 모습만 확인됐다. 이 발견으로 가는털백미의 남쪽 분포 근거가 더 튼실해졌으며, 특히 남한 내에서 어떻게 보전할지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식물을 공부하다 보면 식물이 사람보다 낫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 작은 욕심을 버리고 큰 세상을 엮어내는 틀…. 가는털백미가 우리 땅에 사는 모습도 그러하다. 기후 변화에 따라 식물의 분포 한계가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거꾸로 남쪽에 새로운 분포를 만드는 일도 그렇고, 사람은 경계를 만들어 이리도 엄정하게 대치하는데 낯선 땅에 와서 자유롭게 자리 잡아 잘 살아가는 모습도 그렇다. 누가 보든 말든 서쪽 바닷가에서 맑은 꽃을 피우는 의연함도 돋보인다. 이 가녀리고 고운 꽃송이의 의연함을 보면서 문득 동동거리고 쟁쟁거리는 우리 일상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꽃은 언제나 참으로 장하다.  

가는털백미는 여름이 시작할 무렵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여름내 볼 수 있다. 순백의 아름다운 꽃이 피는데, 자세히 보면 수술과 암술이 약간 뒤틀려 발달하는 꽃잎 모양이 개성 있다. 심장형의 마주 달리는 잎 모양도 귀엽고, 덩굴식물이라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어 키울 수 있는 장점도 지닌다. 식물 전체가 예부터 감기와 오한 치료를 위한 약용으로 쓰였다.

한 해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후회도 많은 열한 달이었겠지만, 이 흰 꽃의 맑음과 의연함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갈무리를 잘하는 연말이 됐으면 한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65. 인동 꽃-  겨울 나무에 옛이야기 주렁주렁




한때 ‘인동(忍冬)’이란 꽃 이름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졌던 시절이 있다. 인동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그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 향기를 온 사방에 퍼뜨리는 식물인데 왜 참을 ‘인(忍)’, 겨울 ‘동(冬)’, 풀이하면 ‘겨울을 이겨낸다’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걸까.  

오래전 겨울, 전남 어느 들판을 기웃거리던 나는 갑자기 날씨가 나빠진 상황에서 그 이름의 참된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됐다. 눈발마저 흩날리기 시작한 그 들판 가운데 인동 잎이 파랗게 살아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느 상록수처럼 항상 푸른 모습만 보여줬더라면 겨울을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진정으로 장한 ‘인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동은 이 땅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살며 우리 선조와 많은 이야기를 엮어낸 나무다. 인동초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인동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인동 꽃은 ‘금은화’라고도 하는데, 꽃 색깔에서 비롯된 재미난 이름이다. 옛 기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며 생약명이기도 한다.  

인동 꽃을 보면 흰 꽃과 노란 꽃이 한 나무에서, 그것도 바로 나란히 붙어서 핀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란색 꽃을 일러 금화, 흰 꽃을 두고 은화라고 해 금은화라고 부른다. 이름이 이러하니 인동이 길조를 상징하는 식물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실 인동은 흰색 꽃과 노란색 꽃이 각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흰 꽃이 피었다가 시간이 지나고 개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한 나무에서 흰 꽃이 많이 보이면 이제 막 개화가 시작됐다는 것을, 노란 꽃이 많이 달렸으면 꽃이 지는 시기가 다가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꽃 색깔만 봐도 어느 꽃에 꿀과 향기가 얼마나 풍부한지 짐작할 수 있다. 벌 처지에서 보면 어느 꽃에 가야 할지를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셈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자연 이치다.  

옛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선조가 시집간 정숙옹주의 아이들이 감기에 걸린 것을 걱정해 “인동초를 달여 마셔라”고 조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전해 내려오는 민간요법에는 인동 잎을 비벼 종기에 붙이기도 하고, 줄기나 잎을 달여 해독제로 쓰거나 화상 부위에 붙여 새살을 돋게 하는 등 다양한 쓰임새가 등장한다. 인동 삶은 물에 목욕하면 피부병이 낫는다고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인동 덩굴과 잎에 생감초를 넣고 끓인 물을 ‘인동주’라 부르며 약으로 썼고, 신장병을 고치려고 인동 꽃으로 빚은 술을 복용했다고 한다. 인동물 목욕이나 인동술보다 더 운치 있는 게 인동차다. 노랗게 변한 꽃잎을 따다 밝은 그늘에 말려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면 향기나 풍류가 재스민차 부럽지 않다.

인동은 동아시아가 원산지며, 현재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널리 퍼져 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인동이나 그 집안식물들은 고대 문화예술에서 한때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고대 이집트를 시작으로 그리스, 로마, 인도, 중국 등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던 많은 곳에서 건축이나 공예의 장식문양으로 인동 꽃을 썼다는 점이다. 이 조각 기법이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평안남도 강서지방 고구려 중묘 벽화에도, 중화지역 진파리 1호 고분 벽화에도 인동 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인동당초평와당이라 해서 기와에 인동 꽃 문양이 있는 등 인동 꽃 무늬를 아로새긴 기와나 청자도 볼 수 있다. 생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알면 알수록 인동 꽃의 매력은 더해간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향긋한 인동차로 몸과 마음을 녹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연말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66. 호랑가시나무 - 행운 부르는 크리스마스 ‘사랑의 열매’



눈으로 봐도 아름답고, 마음으로 봐도 아름다운 꽃이 있다. 한파로 온 세상이 얼어붙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이즈음에 더욱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식물이 있다. 바로 호랑가시나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온갖 장식으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거리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우리는 트리 가운데에 있는 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 나무에 얽힌 사연과 의미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호랑가시나무는 바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나 카드에 등장하는 나무로, 가장자리가 가시처럼 뾰족한 잎을 갖고 있으며, 열매는 붉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로 아는 붉은 열매가 열리는 바로 그 나무다. 호랑가시나무가 크리스마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예수와 관련한 자기희생의 사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가시관의 날카로운 가시들에 찔려 피를 흘리자, 로빈(지빠귓과에 속하는 새로 티티새라고도 한다)이란 작은 새가 날아와 부리로 그 가시들을 뽑다가 가시에 찔려 가슴이 온통 붉은 피로 물든 채 죽었다고 한다. 로빈의 가슴이 지금까지 붉은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 새가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 호랑가시나무 열매였다. 이후 사람들은 이 열매를 함부로 따면 나쁜 일이, 소중히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고 귀히 여기는 한편,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소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은 흔히 호랑가시나무의 잎과 줄기, 열매를 둥글게 엮어 만든다. 둥근 장식 자체는 예수가 썼던 가시관을, 붉은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을, 우윳빛 향기로운 꽃은 예수의 탄생을, 나무껍질의 쓰디쓴 맛은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호랑가시나무가 나쁜 일과 병마를 막고 좋은 일을 불러온다는 믿음은 예수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로마시대부터 비롯됐다. 농경 신을 기리는 축제를 맞아 선물을 보내면서 존경과 소망의 상징으로 호랑가시나무를 장식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위험한 일을 막아준다고 해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민속에도 음력 2월 영등날 호랑가시나무 가지를 꺾어다 처마 끝에 매달아 액운을 쫓는 데 이용했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의 영어 이름은 모든 종류를 통틀어 홀리(Holly)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호랑가시나무는 차이니스 홀리(Chinese Holly)다.

그렇다면 호랑가시나무란 이름은 어찌 붙었을까. 가시가 너무 드세고 무서워 호랑이도 무서워하는 가시를 가진 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잎 모양이 호랑이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의 뾰족한 발톱과 발을 닮아서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중국에선 ‘노호자(老虎刺)’ ‘묘아자(猫兒刺)’ ‘구골(狗骨)’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골은 개뼈라는 뜻인데, ‘본초강목’에는 ‘나무가 단단하고 나무껍질에 흰빛이 돌아 마치 개뼈처럼 생겼다’고 적혀 있다. 모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동물의 이름인데, 이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울타리 재료로도 많이 쓰였다.

‘본초강목’에서는 잎과 열매를 술에 넣어 마시면 허리가 튼튼해진다고 했으며, 나무껍질은 염료나 끈끈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인디언 풍속에 이 나무로 만든 차를 마시면 홍역에 좋고, 잎으로 주스를 만들어 마시면 황달이나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7. 미선나무- 새 희망을 품은 진짜 ‘우리 꽃’





 


한 해를 마감하고 다시 한 해를 준비하는 때다. 휘몰아치듯 마음을 흔들었던, 혹은 소소하게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상들은 처음 그 상황을 대면했을 때와 달리 인생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일은 기쁨이나 보람으로 각인되고, 또 어떤 일은 실수나 회한으로 남는다.  

왠지 모르게 바쁘면서도 가슴 한쪽에 자리한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 이때, 어떤 꽃과 함께 산책할까 생각하다 떠올린 나무가 있다. 바로 미선나무다. 맑고 그윽한 향기가 유별나고, 아름다우나 현란하지 않아 마음에 쏙 스며들며, 알고 보면 지구상에 오직 우리나라 땅에서만 사는 특산식물로, 진짜 ‘우리 꽃’이다. 식물 집안인 한 속(屬)에 오직 한 종(種)만 있는 외로운 가계의 꽃이어서 위로해주고 싶기도 하고, 이런 귀한 의미의 꽃을 아는 이가 드물어 더욱 소개하고 싶은 그런 나무다.

미선나무는 낙엽성 작은 키 나무다. 높이 자라지 않고 옆으로 가지를 많이 만들며 퍼져 나간다. 봄이 오면 겨우내 마치 죽은 듯 메말랐던 가지에 살며시 물이 오르고 잎보다 꽃이 먼저 피기 시작한다. 꽃 모양은 개나리를 닮았지만 좀 더 작고 하얀 꽃이 달리며, 개나리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우는 봄의 화신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미선나무를 두고 하얀 개나리라 부르기도 한다. 가지마다 작은 꽃송이를 가득 매달고 꽃을 피운다. 작은 초롱처럼 생긴 꽃이 함께 모여 달리는데, 하얀색을 기본으로 연한 분홍빛을 띠는 꽃은 분홍미선이라 부르고, 상아빛을 띠면 상아미선이 된다.  

미선나무라는 이름은 이 나무의 열매 때문에 붙은 것이다. ‘아름다운(美) 부채(扇)’라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꼬리 미(尾) 자에 부채 선(扇) 자를 써서 미선이 됐다. 실제 미선(尾扇)은 대나무 줄기를 잘게 쪼개어 가는 살을 여러 개 만들고 이것을 둥글게 편 뒤 종이나 명주천을 붙여 만든 부채를 가리킨다.  

미선나무는 파랗게 달리기 시작하는 열매의 모양 자체도 보기 좋지만, 열매가 발그스름하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다운 미선 부채 모양 그대로다. 열매 안에는 종자가 두 개씩 들어 있다. 양묘에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조경수시장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미선나무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가치 있다.  



미선나무의 자연 서식지는 대부분 흙조차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하는 돌밭인 경우가 많다. 어려움 속에서 자랐으나 곱고 향기로운 귀한 존재로 커 나가는 이 꽃나무, 혹 지난 한 해 동안 어려움이 있었다면 미선나무처럼 새봄의 아름다움을 피우려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희망을 품으며 새해를 맞길 기원해본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68. 모데미풀- 깊은 계곡에 흰 별들 쏟아졌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나날이다. 꽃 가운데서도 특별한 꽃이 생각나는 때다. 모데미풀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만 뭔가 특별함이 있는 식물이다. 그 특별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모데미풀은 이 너른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종(種)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특산속(特産屬)인 참 귀한 존재다. 그 아름다움도 특별하다. 봄 냄새가 한창 몰려오는 아름다운 숲 속에서, 또는 졸졸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깊은 계곡에서 만날 수 있는 모데미풀의 자태는 순결한 흰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자리 잡은 듯 더없이 곱고 아름답다.  

모데미풀은 낯설다. 산림보호법에 희귀식물로 정해두고 보호할 정도로 드문 풀이다. 우리나라 한라산, 지리산, 태백산, 설악산, 소백산, 점봉산 등에 분포하는데 워낙 이른 봄에 꽃이 피고, 깊은 숲 속 물가 혹은 습한 지역에서 피어나는 진짜 우리 꽃 가운데 하나다. 오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깊은 산골에서 아주 드물게 모습을 보인다.

모데미란 이름 또한 그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낯설다. 지리산 자락인 남원군 운봉면 모데미 마을 개울가에서 처음 발견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동네 이름도, 이 동네에 살았던 모데미풀도 지금은 찾기 어려워졌다.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모데미풀은 긴 잎자루 끝에서 잎이 3개로 완전히 갈라진 후 다시 2~3개로 뻗어나간다. 잎 자체는 또다시 톱니모양을 이루거나 잎 가장자리가 깊이 패어 들어가는 결각이 생기는 매우 독특한 모양을 가진다. 봄에 피는 꽃은 꽃자루가 다 올라오면 그 높이가 한 뼘쯤 된다. 줄기 끝에 백색 꽃잎(꽃받침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달리고, 이 꽃이 지면 열매가 골돌(여러 개 씨방으로 이뤄져 익으면 벌어짐)처럼 달리는데, 별빛 같은 조각들이 방사상으로 매달린 모습이 마치 우주 신비를 담은 듯 특별하다. 이 부지런한 식물은 벌어진 열매 사이로 튀어나온 종자를 멀리 보내고 다른 식물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할 무렵, 벌써 한해살이를 마무리하곤 한다.


 



꽃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이 뽑아다 관상용으로 키우려 하지만 까다로운 재배방법을 습득한 이가 드물어 죽이는 경우가 흔하고, 이는 모데미풀의 전체 개체수가 적어지는 더 큰 이유가 된다. 그러나 높은 고산지대 녹화용 지피식물이나 고산식물원(alpine garden)에는 꼭 필요한 식물이라 고급 분화로 키워볼 만하다. 일반인이 쉽게 키우려면 적합한 재배방법이나 개체선발 같은 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잘 만나기조차 어려운 작은 꽃이지만 모데미풀은 참 아름답고 의미 있는 꽃이다. 그냥 놓아두면 사라질 수 있는 만큼 잘 찾아내 보전해야 하는 그런 꽃이다.

새해엔 모데미풀을 되살리듯, 우리의 둔함으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보자. 그것이 자연이든, 역사든, 스쳐간 인연이든, 물건이든 그 의미를 알아보고 소중히 하는 그런 따뜻한 한 해였으면 싶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9. 머위- 하나는 미약하나 모이면 특별한 자태



꽃, 풀, 나무, 열매, 나물…. 이들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먼저 이들은 모두 식물이다. 그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식물은 크게 풀과 나무로 구분되며, 꽃과 열매는 나무나 풀에 달리는 기관 가운데 하나다. 나물은 식물의 잎 혹은 뿌리 등으로 만든 먹을거리를 가리킨다. 오늘은 ‘머위’를 소개할까 하는데, 혹자는 ‘우리꽃 산책’이라는 코너에서 왜 나물 이야기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머위도 식물인 만큼 꽃이 핀다. 알고 보면 그 꽃은 신기하고 지혜롭다.  

머위는 우리나라 산 가장자리, 인가나 농로, 물가 주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마을이 가까운 전국 어디에서든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화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이른 봄에 꽃이 먼저 핀다. 그런데 겨울이 그리 매섭지 않은 아주 남쪽 섬에 가면 지난겨울부터 성급하게 핀 꽃송이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연한 녹황색 꽃송이들은 아주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꽃이라고 인식하기 어려운 작은 꽃들이 모여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작은 꽃차례를 이루고, 이들이 둥글게 다시 모여 인형머리만큼 큼직한 꽃차례를 또 만든다. 하나하나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서로 합쳐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유기적으로 모여 가장 큰 효율을 발휘한다. 곤충의 움직임이 극히 제한된 이른 봄 한 번의 방문으로 수정을 하니 그 생태 자체가 지혜롭다 하겠다. 

꽃송이가 달릴 때는 키가 어른 손 한 뼘쯤 되고, 그때쯤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잎자루는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마구 올라와 주변 땅을 덮고 어른 무릎 높이까지도 자란다. 잎은 자루가 길고 그 끝에 큰 콩팥 모양 잎이 달린다. 그 긴 잎자루가 바로 우리가 나물로 먹는 머윗대다. 제주에서는 꼼치, 영남지방에서는 머구, 강원 일부 지방에선 머우라고도 한다. 사람과 친하게 지냈으니 이름이 다양한 것은 당연하다. 학명 ‘페타시테스 자포니쿠스(Petasites japonicus)’에서 속명은 차양이 넓은 모자를 뜻하는 희랍어 페타소스(petasos)에서 유래했다. 물론 넓은 잎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머위를 이용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식용이다. 잎자루는 삶아 물에 담근 후 아릿한 맛을 우려내고 껍질을 벗겨 양념을 해 먹는다. 잎은 우려서 나물, 볶음, 장아찌, 조림, 정과로 만들어 먹는다. 머위로 하는 요리는 무궁무진하다. 꽃송이는 찹쌀가루를 묻혀 튀겨 먹기도 하고, 된장에 박아뒀다가 먹기도 한다. 무기염류가 많아 봄에 먹으면 몸이 나른하고 늘어지는 것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알칼리성 식품인 데다 열량이 없어 다이어트 음식으로 제격이다. 머위에 곱게 간 들깨를 넣어 함께 끓이는 탕은 별미다. 차나 약술을 담가도 좋은데 주로 꽃봉오리를 이용한다.  

한방에선 ‘봉두채(蜂斗菜)’라 한다. 해독약으로 주로 쓰는데, 목에 염증이 생겼을 때 이 즙으로 양치질을 하기도 한다. 이것을 달인 물은 기침을 멎게 하거나 가래를 없애는 데 사용된다. 유럽에선 머위가 탁월한 항암치료제 성분으로 관심을 모은다고 한다. 하나는 소소하지만 모여서 특별해지는 머위 꽃, ‘더불어 살라’는 새해 가르침이다.

머위 나물 무침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70. 처녀치마- 봄 기다리며 수줍은 치마 펼쳤네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고 보니, 새봄이 더욱 간절히 기다려진다. 숲엔 지난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속에선 이미 지난가을부터 생명의 씨앗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을 터인데, 부디 새봄에 기쁘게 만나길 기대해본다. 

식물은 대부분 한겨울보다 겨울 끝, 봄 시작점에 ‘동해(凍害)’를 입는다. 추운 겨울은 미리 예견하고 준비하기 때문에 괜찮은데, 봄이 온 줄 알고 섣부르게 연한 순을 내밀었다가 뒤늦은 추위에 호되게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곳에선 식물이 더욱 풍부하고 건강하게 자란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심하게 불어닥칠 무렵 숲에 쌓여 있다 서서히 녹는 눈이 수분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처녀치마는 쌓인 눈 속에서 꽃이 피는, 새봄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꽃 가운데 하나다. 보랏빛 꽃송이가 참 예쁜 꽃이다. 처녀치마의 가장 큰 장점은 땅 위에 방석처럼 펼쳐지는 잎들이 겨울이 올 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묵은 잎 위에 다시 새잎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서 꽃대가 쑥 올라와 꽃이 핀다. 성급한 꽃송이는 꽃대를 미처 올리기도 전 불쑥 올라와 꽃대가 자라는 동안 함께 꽃을 피운다. 새봄을 어수선하게 한다.

봄이 한창 아름다운 어느 날, 처녀치마 꽃송이가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0개까지 꽃대 끝에 모여 달려 땅을 향해 핀다. 길쭉한 꽃잎들이 펼쳐지면 꽃들이 매어 달린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져 전체적으로 마치 작고 아름다운 아가씨의 짧은 치마처럼 보인다. 이 꽃이 ‘처녀치마’라는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다.  

연보랏빛 꽃잎은 개체에 따라 좀 더 진하기도, 여리기도 하다. 꽃잎의 다양한 색감과 함께 꽃잎 사이로 좀 더 길게 뻗어 나오는 수술은 장식처럼 포인트가 된다. 처녀치마 꽃송이들은 치마 중에서도 아주 현대적이면서 귀엽고 아름다운 치마가 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치맛자락풀’ ‘성성이치마’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자화호마화(紫花胡麻花)’라고 한다.

여름쯤 익는 열매는 삭과로 마른 화피에 싸여 있으며, 익으면 3개 능선으로 벌어지는데 그 안에 길쭉한 씨앗이 들었다. 꽃이 필 때 한 뼘쯤 되는 키는 기온이 오르면서 점차 자라 열매가 익을 때쯤에는 성인 무릎 높이까지 크기도 한다. 키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조금이라도 높이 자라 씨앗을 좀 더 멀리 보내려는 처녀치마의 노력이 안쓰럽다.

처녀치마는 봄 산행을 떠나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지만, 야생화를 찾는 이에게는 관상자원으로 주목받는다. 봄철 꽃구경이 좋은 것은 물론, 오랫동안 화단에 남은 잎이 지면을 덮는 것도 처녀치마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화분이나 수반 같은 곳에 키우는 작은 꽃 소재로도 인기 있다.  

처녀치마는 백합과에 속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야생화다. 활엽수 낙엽이 수북이 쌓여 비옥하고 습윤한 숲 비탈면을 눈여겨보면 꽃은 없어도 방석처럼 땅에 펼쳐진 처녀치마 잎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봄철 처녀치마의 보라색 꽃을 구경할 수 있다면 더 큰 행운이다.  

이렇게 여리고 고운 처녀치마 꽃송이도 모진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올라온 장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지금 한겨울 같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눈 속에서 피어날 처녀치마처럼 아름다운 내일이 준비돼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71. 산마늘 - 기력 회복 최고 잠에서 깬 곰 가장 먼저 찾아





입춘(立春)이 지난 지 오래지만 겨울 숲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흰 눈이 내리고 난 뒤 숲의 정적은 더 깊이 마음에 와 닿는다. 겨울엔 깊은 숲에서 곰이 겨울잠을 자듯 식물들도 잠을 잔다. 살아 있지만 죽은 듯 때를 기다린다. 풀은 땅속에서, 나무는 겨울 눈 속에서 새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한다. 
 
곰은 겨울잠에서 깨면 먼저 먹을 풀을 찾는다. 독성이 강한 앉은부채를 먹기도 하는데, 이는 일부러 배탈을 내서 겨울잠을 자는 동안 장속에 쌓인 노폐물을 배출하기 위해서다. 겨울잠을 자는 은신처로 요긴하게 사용했던 조릿대에 순이 오르면 거기에 고인 깨끗한 물을 먹기도 한다. 곰은 삐죽삐죽 올라오는 산마늘 새순도 좋아할 것 같다. 산마늘이 기력을 회복해주는 아주 유명한 풀이라는 사실을 곰도 잘 알 터이기 때문이다.

산마늘을 잘 모르는 이라면 먹는 ‘명이나물’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고급스러운 산채음식점 식탁 위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장아찌로 만들어 팔기도 하는 명이나물의 진짜 이름이 산마늘이기 때문이다. 산마늘을 ‘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예전 울릉도 사람들이 춘궁기에 이 나물을 먹고 목숨을 구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명이에 목숨 명(命) 자가 쓰인 이유도 그 때문이며, 흔히 ‘맹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에선 ‘신선초’ ‘족집게풀’이라고도 하는데, 신선초란 이름이 몸에 좋고 귀한 여러 풀에 붙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산마늘이 몸에 좋은 식물이란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산마늘은 백합과 부추속(Allium)인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가 잘 아는 부추, 파, 마늘, 양파가 같은 집안식물이다. 식물학적으로는 작은 꽃이 공처럼 둥글게 모여 피는 것이 공통점이고, 모두 매콤한 맛이 나는 향신채로 몸에도 좋다. 자양강장 효과가 높다고 알려졌다.

단군신화를 보면 우리 조상인 곰, 즉 웅녀는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을 견뎌 인간이 됐고 이후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먹는 마늘의 원종은 알타이 산맥에 자생하는 종류로 반만년 전 한반도에는 분포하지 않았으니, 혹시 그때 웅녀가 먹은 것이 마늘이 아니라 산마늘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산마늘이 우리나라 깊은 산에서 자라고,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식물이니 말이다.

한방에서도 산마늘을 오래전부터 이용했는데, 자양강장과 해독 효과 외에도 소화 및 신경계 질환, 부인병 등 여러 증상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재배 농가도 늘고 쌈채, 장아찌, 나물 등 다양하게 이용한다.  

산마늘은 이른 봄 새순도 귀엽고, 한여름 핀 흰 꽃도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시시때때 먹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식물이다. 남는 땅이 조금 있다면 봄에는 산마늘 가꾸기를 권한다.



 


[출처]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이유미의 우리꽃 산책> /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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