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 내역까지 제출? 자소서보다 어려운 자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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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4.05. 오전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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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매수 때 자금조달계획서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 의무화
“편법 상속 증여 잡는다고
실수요자까지 투기꾼 취급”


직장인 이현주(28)씨는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10평짜리 소형 아파트를 3억원에 샀다. 셋방살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서 “관할 구청에 ‘자금조달계획서’(자조서)와 증빙 서류를 30일 이내에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파트 구입 자금원을 소명하는 절차가 남았다는 얘기였다.

이씨는 부모에게 빌린 1억원, 회사 대출 1억원, 저축 1억원으로 해당 아파트를 구입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모든 자금 출처를 철저히 밝히지 않으면 세무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다”고 했고, 이씨는 증빙 서류를 만드느라 진이 빠질 정도였다.

우선, 부모에게 빌린 1억원에 대해 이자율이 명시된 차용증을 썼다. 매달 부모 계좌로 원금과 이자를 입금하는 금융 기록도 남기기로 했다. 회사 대출 신청 서류도 챙겨 뒀다. ‘저축 1억원’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예금 계좌가 있는 은행 두 곳에서 예금잔액증명서를 떼서 부동산 중개소에 갖다 줬더니 “만 30세 미만인데 1억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직장을 다닌다는 사실도 증명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근로소득증명서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이씨는 생애 첫 주택 구입을 위해 자금조달계획서에 차용증, 대출신청서, 예금잔액증명서, 근로소득증명서 등 증빙 서류 4개를 제출해야 했다. 이씨는 “실거주를 목적으로 집을 샀는데 어떻게 돈을 벌어 저축했는지까지 입증하라고 하니 내가 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입사 자소서(자기소개서)보다 어려운 자조서”라는 푸념이 나온다. 지난 1월 경기도 성남시에 38평 아파트를 구입한 A(46)씨도 “자조서를 내면서 2년 전 집 판 계약서까지 찾아서 내느라 고생했다”며 “부동산 투기를 막아야 하는 건 맞지만 정부에서 개인 정보를 이렇게까지 가져가도 되는 건가 싶었다”고 했다. 작년 12월 서울에 9억원 미만 가격을 주고 아파트를 산 유모(32)씨는 예금잔액증명서와 대출증명서, 소득증명서 등을 발급받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유씨는 “일부 편법 상속과 증여를 막는 것은 정부의 의무인데 왜 그 입증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작년 10월부터 수도권 곳곳의 부동산 중개 업소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와 전쟁’을 선포하고 투기과열지구(서울 전역, 세종·과천·성남·광명·하남 등)에서 주택을 구입하는 모든 이에게 자조서와 증빙 서류 제출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청에서 이 업무를 하는 담당자는 “국토부 지침에 따라 금융기관 예금과 현금 등 자금에 대한 모든 증빙 서류를 필수로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보통 사이에 낀 부동산 중개업자가 증빙 서류들을 받아 대신 구청에 제출한다. 이후 정부가 이를 검토해 문제가 있으면 불시에 세무 조사도 하는 구조다. 혹시 잘못될까 봐 부동산 중개업자가 주택 매수자를 닦달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우리도 복비(중개비) 받고 하는 일”이라며 “서류 잘못 냈다가 고객이 세무 조사라도 받게 되면 큰일이니 꼼꼼하게 안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동산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자금조달계획서 관련 질문이 하루에도 10건 이상씩 올라온다. ‘신혼부부인데 혼인 신고를 아직 안 했다. 아내 돈으로 잔금 일부를 치르는데 차용증을 써야 하나’ ‘곗돈을 두 달 후에 받는데 자금으로 써도 되나’ ‘축의금을 주택 자금으로 써도 되느냐’ 등 각양각색의 질문이다. 한 세무사는 “증여로 의심될 만한 자금은 아예 기재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며 “축의금도 혼주와 결혼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돈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 지인이 낸 돈을 자금원으로 기재하면 증여가 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당국은 자조서 검증의 고삐를 단단히 죄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작년부터 50여명 규모의 ‘자조서 전담 조사반’을 임시 운영해왔다. 이달 중에는 이를 아예 정규 조직으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국세청도 최근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금융기관과 아버지에게서 돈을 빌려 아파트를 샀다고 자조서를 작성·신고한 이에 대해 소득도 별로 없고 아버지와의 차용 계약도 믿기 어렵다며 증여세를 추징한 사례도 발표했다.

[김윤주 기자 yunj@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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