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남북관계, '깜짝쇼'보다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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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20. 오후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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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에 합수할 ‘한라산 물’까지 준비했는데…극적 효과에만 관심

북한과 ‘물밑 조율’ 피할 수 없다면, 지난 뒤에라도 있는 그대로 사실 전해야

청와대는 지난 19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백두산행을 ‘깜짝’ 공개했다. 문 대통령의 방북 기간 유일하게 ‘현지 브리핑 생중계’라는 방식까지 동원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평양 현지 프레스센터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0일 백두산 방문을 함께하기로 했다"며 "두 분의 백두산 방문은 김 위원장의 제안으로 문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방북길에 동행한 취재진과 문답에서 ‘김 위원장이 언제, 어떻게 제안했나’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날짜는 알 수 없는데 18~19일 사이의 일"이라며 평양에 와서 제안을 받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20일 공개된 백두산행 사진을 보면 청와대가 방북 전에 문 대통령과 수행원들의 백두산 방문을 매우 꼼꼼하게 준비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문 대통령과 함께 백두산을 찾은 경제인등 특별수행원들과 취재진은 모두 같은 외투를 입고 있다. 영상 18~23도의 평양과 달리, 추울 때는 영상 2도까지 떨어지는 백두산 온도를 고려해, 청와대가 미리 같은 디자인의 옷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백두산 천지의 물과 ‘합수(合水)’를 위해 한라산의 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김 여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에게 "한라산 물을 갖고 왔다"며 "천지에 가서 반은 붓고 반은 백두산 물을 담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20일 백두산 천지에서 물병에 물을 담고 있는 모습. 김 여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에게 “한라산 물 갖고 왔어요. 천지에 가서 반은 붓고 반은 백두산 물을 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사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평양에 내리기 전부터 백두산행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기 직전 밝힌 방북소감에서 "나는 백두산에 가긴 가되 중국이 아닌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그동안 공언해왔다"며 "중국 동포가 백두산으로 나를 여러 번 초청했지만 내가 했었던 그 말 때문에 늘 사양했었는데, (웃으며) 그 말을 괜히 했나보다 하고 후회하곤 했다"고 말했다. 백두산행을 염두에 둔 소회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 17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메인 프레스센터에서 평양 정상회담 일정을 발표하면서 "20일 마지막 날은 전날에 환송 만찬을 했기 때문에 따로 오찬은 예정되어 있지 않고, 공항에서 환송 행사를 마치고 오전에 서울로 향하게 된다"면서도 "한가지, 경우에 따라 이날 양 정상 간 친교 일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귀경 일정이 변경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각에서는 마지막날 백두산행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국고와 바쁜 국정 등을 고려해 일본이나 러시아 정도의 근거리 일정일 경우 현지 체류 일정을 최소화하고 늦은 밤이라도 귀국하는 강행군을 해왔는데, 특별한 일정 없이 하루 더 체류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백두산행’ 사전 협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징후들은 많았다. 문 대통령이 18일 평양 순안공행에 도착하기 직전 취재진 카메라에 이미 순안공항에는 공군2호기로 추정되는 우리 국기가 새겨진 비행기가 대기중인 모습이 포착됐다. 미리 평양에 간 이 비행기가 평양~백두산 간 항로를 체크했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 평양에서 백두산 정상 및 천지까지의 동선은 항공편, 차량편, 궤도차량, 케이블카등을 여러번 환승해야 해 사전 점검 과정이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 대통령은 이미 김정은에게 백두산 방문 의사를 밝힌 상태로, 김정은이 이를 수락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20일 백두산에서 김정은 등과 환담하면서 "위원장에게 지난 4.27 회담 때 말했다"며 "한창 백두산 붐이 있어서 우리 사람들이 중국 쪽으로 백두산을 많이 갔다. 그때 나는 중국으로 가지 않겠다, 반드시 나는 우리 땅으로 해서 오르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 세월이 금방 올 것 같더니 멀어졌고, 그래서 영 못 오르나 했었는데 소원이 이뤄졌다"고도 했다.

다만 청와대가 북측과 사전 조율된 방문을 ‘깜짝 발표’하면서, ‘평양에 도착한 뒤에야 백두산행을 제안받았다’고 밝힌 점은 아쉽다. 김정은이 공식 제안한 시점이야 문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한 이후일 수 있지만, 남북간에 관련 논의가 오간 것은 훨씬 오래 전일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양측의 조율 과정을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보다는 백두산 방문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보였다.

‘북한’이라는 상대방의 특수성 때문에 ‘물밑 조율’이라는 협상 형식을 피할 수 없다면, 지난 뒤에라도 공개할 수 있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두 정상의 ‘백두산행’을 계기로 남북간 협상이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더더욱 투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박정엽 기자 parkjeongyeop@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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