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쪽에 가려두던 곳에서 깨끗한 화장실로 탈바꿈하기까지

뒷간

한국의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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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일생 동안 1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며, 사색과 독서의 공간으로 깨우침과 휴식을 주는 곳이 있다. 하지만 쉽게 언급하기조차 꺼리며 집 앞 쪽이 아닌 뒤쪽에 가려두었던 곳. 그곳이 뒷간이다.

1 뒷간의 기원과 종류

인간은 음식을 먹어 삶을 유지하지만, 소화시키고 남은 것은 반드시 배설해야만 한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류는 늘 이동을 했고, 이동 중에 강가나 산기슭에 배설물을 쏟아냈다. 흐르는 물은 똥오줌을 치워주었고, 흙과 낙엽은 이것의 자연분해를 도와주었으니, 특별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소변은 땅 위에서보다 땅 속에 묻힐 때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땅에 구멍을 파고 용변을 해결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똥과 오줌을 따로 모을 필요가 생겨났다. 인간의 배설물이 농작물 성장에 필요한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구덩이를 파거나 항아리를 묻고 그것을 모았다. 배설물은 이곳에서 숙성되어 거름이 되었고, 인간은 거름을 퍼내 농토에 뿌렸다.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재래식(푸세식) 뒷간의 역사는 농업의 시작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거름을 만드는 공간으로서 뒷간은 불쾌한 냄새와 청결상의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물로 변을 빠르게 처리하는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기원전 3천년 경 인더스, 수메르 문명권에서 배설물을 떠내려 보내는 장치가 있는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배설물을 처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휴대용 변기였다. 수레나 가마를 타고 이동할 때, 또는 밤에 화장실을 이용하고자 할 때, 밖에서 급히 용변을 보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휴대용 변기였다.

2 백제의 뒷간 유적

우리 역사에서 뒷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년)>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대궐 북쪽 뒷간(측청, 厠圊) 속에서 두 줄기의 연꽃이 피어났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고조선 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도 뒷간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뚜렷한 유적과 기록은 없다. 다행히 2003년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 발굴 현장에서 공방(工房)시설 남측에 위치한 3기의 뒷간 유적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의 뒷간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뒷간 모형. 왕궁리 유적 발굴 당시 뒷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궁의 서북쪽에 격리되어 있었으며 1.5~3미터 가량 깊이의 구덩이에 담긴 분뇨가 대형 배수로를 거쳐 궁 외부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이 익산지역에 세운 별궁(別宮)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여기에서 뒷간은 궁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유목민들은 게르(Ger: 이동식 집)의 서북쪽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궁의 서북쪽에 뒷간이 위치했다는 것은 더럽고 부정한 곳은 서쪽이며, 앞쪽이 아닌 뒤쪽에 뒷간을 두는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뒷간은 담장에 의해 다른 지역과 격리되어 있으며, 공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곳이라고 여겨진다. 뒷간은 깊이 1.5∼3.1m 구덩이에 일정기간 배설물을 저장했다가, 일정한 높이까지 차오르게 되면 배설물이 뒷간 수로와 인접한 대형 배수로를 거쳐 궁성 외부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3 뒤처리는 어떻게?

익산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있는 백제 뒷간의 재현 모습. 앞쪽에 뒤처리를 위한 나무막대(厠籌)가 항아리에 담겨있다.

육식을 많이 한 사람들은 똥이 덩어리가 지기 때문에 뒤처리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식물성 섬유질을 많이 섭취한 사람들은 뒤처리가 필요하다. 백제 사람들은 뒤처리를 위해 뒤처리용 나무막대(측주, 厠籌)를 사용했다. 왕궁리 뒷간에서는 길이 26〜30㎝ 크기의 뒤처리용 막대 6점이 출토되었는데, 신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어 있었다.

뒤처리용 나무 막대는 다시 물에 씻어 재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이가 비쌌던 과거에는 풀잎이나 볏짚 등으로 뒤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농촌에서는 용변을 본 어린아이의 밑을 개가 핥아 해결하도록 하는 일도 흔했다. 물론 왕실 가족이나 귀족들은 비단 등의 옷감으로 뒤처리를 했다.

4 이동식 변기

왕궁리의 배수로 조사과정에서 뒷간과 관련된 유물로 변기형 토기 2개가 출토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이 토기는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주로 이용한 휴대용 변기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부여군 군수리에서는 호랑이의 모습을 본뜬 형태에 아가리를 크게 벌린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호자(虎子)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휴대용 변기다. 호자는 부여 관북리, 여수 고락산성, 연천 호로고루 등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특히 고구려 전방의 군사시설인 호로고루에서 발견된 호자는 군 지휘관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볼일을 보기 위해 근무자가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거나, 오줌을 따로 받아 둔전(屯田: 군량 확보를 위해 군인이 경작하는 농토) 농사에 사용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1)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여성들이 사용했던 휴대용 변기
2) 호자(虎子)는 남성용 휴대용 변기다.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유적이다.
3) 요강은 주로 밤에 사용하는 이동식 변기로, 조선 후기로 올수록 장식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호자는 뚜껑이 없어 실내에 오래 두면 냄새가 난다. 이를 개선한 것이 요강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강은 고려시대 이전에 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강은 남녀 구분 없이 집집마다 사용했다. 특히 밤에 먼 거리에 있는 뒷간에 가기 어려울 때 요강을 이용했다.

여성들이 가마에 탈 때는 가마 안에 요강과 대야를 반드시 넣고 다녔다. 요강은 오지, 놋쇠, 사기, 양은 등으로 만들며, 조선시대에는 청자, 백자, 목칠 요강도 생겼다. 요강은 여성들이 시집갈 때 마련해가는 필수 품목이기도 했던, 안방 살림살이의 하나였다.

5 조선시대 임금이 쓰던 매화틀

조선 왕실에서는 이동식 변기인 매우틀을 사용했다. ‘매우(梅雨)’에서 ‘梅’는 대변, ‘雨’는 소변을 빗댄 것으로, 무척이나 향기로운 이름이다. 매우틀은 ‘매화틀’로도 알려져 있는데, 1527년 어린이들을 위해 지은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투(㢏)'를 ‘매우통 투’라고 새긴 것으로 볼 때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매화틀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앉기 편하도록 비단 등으로 감쌌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져 볼일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구멍 바로 아래에는 매화그릇을 두었다. 매화그릇에는 ‘매추’라고 불리는 잘게 썬 여물을 뿌려 놓아 분뇨가 튀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조선의 왕실가족이 사용한 매화틀과 매화그릇. 나무로 만든 후 앉기 편하도록 비단으로 감쌌다. 사대부 집인 강릉시 선교장에도 비슷한 매화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널리 사용된 듯하다. 사진은 고양 화장실 전시관의 전시품이다.
경복궁 동궁전 옆의 뒷간. 경복궁 내의 뒷간은 총 28곳이다. 조선 최고의 직장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던 궁궐 안에는 곳곳에 뒷간이 있었다.

경복궁의 뒷간은 28곳이고, 창덕궁과 창경궁에도 21곳의 뒷간이 있었다. 궁궐의 뒷간은 별채로 짓거나, 본채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 일부에 설치했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사는 내전이나 왕이 공식적으로 신료들을 만나는 외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뒷간이 없다. 그것은 왕실 가족들이 매화틀과 요강으로 용변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궁궐 안의 뒷간은 궁녀, 내시, 노비, 군인 등 궁궐에서 살거나 머물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주로 설치되어 있었다. 궁궐은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자, 최고ㆍ최대의 직장인만큼 많은 이들이 북적거린 곳이었으니 당연히 많은 뒷간이 있었던 것이다.

6 분뇨는 귀중한 자원

751년 경 창건된 불국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수세식 변기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불국사 극락전 옆 석재들을 살펴보면, 두툼한 돌 가운데를 참외꼴로 파내고, 그 앞쪽에 구멍을 내어 물을 부어 배설물을 구멍으로 흘려버리도록 만든 구조다. 사찰의 해우소(解憂所)는 텃밭에 뿌릴 퇴비의 생산처였다.

비탈 위에 설치된 뒷간 아래가 채마밭으로, 위에 떨어진 분뇨가 자연스레 거름이 되도록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수세식 변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뒷간은 백제 왕궁리 뒷간처럼 급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분뇨가 축적되는 재래식 뒷간이었다. 농민들에게 분뇨가 쌀과 같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남의 집에서 똥을 누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뒷간에 모아둔 분뇨는 거름이 되어 농사에 사용되었다. 뒷간은 쓸모없는 배설물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비료 공장인 셈이었다. 그런데 분뇨를 논밭에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면 효과가 적다. 뒷간에서 적당히 썩혀야 거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농민들은 뒷간에 가득 찬 분뇨를 똥장군과 오줌장군에 담아 논과 밭으로 날라다 뿌렸다. 따라서 재래식(푸세식) 뒷간에는그것을 쉽게 퍼갈 수 있도록 똥구덩이 위에 긴 나무판을 올려놓았을 뿐 윗면을 다 덮지 않았던 것이다.

7 잿간과 뒷간

‘똥오줌이 어떻게 농사에 이용되어 왔는가?’의 역사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분뇨는 처음에는 그대로 농토에 뿌린 후, 한참 후에 토지를 갈아 버리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분뇨를 숙성시켜 비료로 사용한 것은 이웃한 중국의 경우 가사협(賈思勰)이 6세기경에 편찬한 중국 최고의 농업서적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도 분뇨를 숙성시켜 농사에 이용하는 방법을 받아들여 사용했겠지만, 언제부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1429년에 정초(鄭招, ?~1434)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서적인 [농사직설(農事直設)]에는 여러 종류의 비료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의 똥(人糞)과 함께 똥재(糞灰-똥과 재를 썩은 것)가 언급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한 비료는 똥재였다. 하지만 똥재를 만들기 위한 재(灰)는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온돌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가에서는 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일부 농가에서는 재를 모아두는 잿간 한켠에 볼일을 보는 발판을 놓고 뒷간을 겸하게 했다. 용변을 본 후, 잿간에 쌓아둔 재와 왕겨 등을 뿌려 삽으로 떠서 잿간 한쪽에 쌓아둔 후 퇴비로 숙성시켜 쓰기도 했던 것이다. 똥재는 악취도 없고 다루기에 편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농업에 사용하는 거름의 양이 많아졌다. 또한 19세기에는 똥과 오줌을 별도로 숙성시켜 거름으로 만들면 비료로서의 효과가 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똥오줌을 효과적으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렇듯 분뇨는 농민들에게는 보물이었고, 뒷간은 보물창고였다.

8 똥장수의 등장

1778년 청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에 대해 적은 [북학의(北學議)]에서 거름(糞)에 대해 언급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거름을 금처럼 아끼고, 재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 안에 있는 분뇨를 전부 수거하지 못해 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분뇨를 수거해 가지 않고, 재를 함부로 길에다 버려 바람에 날려 불결하기도 하다. 시골에는 사람이 적어 재를 구하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도성 안의 재를 1년만 모아도 몇 만 섬은 되는데, 이를 버리고 이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몇 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고양 화장실 전시관에 전시된 똥장군과 오줌장군. 농부들은 분뇨를 여기에 퍼담아 지게에 싣고 논밭에 가서 뿌렸고, 이는 좋은 거름이 되었다.

농가 뒷간의 분뇨와 아궁이에서 생산된 재, 마구간과 외양간에서 생긴 가축의 배설물이나 축사에 까는 짚 등은 모두 비료로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도성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도시의 화장실과 아궁이에서 나오는 분뇨와 재는 골칫덩이였다.

따라서 도성 안의 분뇨를 퍼서 도성 근처의 논밭에 파는 똥장수가 생겼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에는 똥거름을 져서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십리의 무, 살곶이의 순무, 연희궁의 고추와 마늘 등 도성 인근의 밭작물들은 모두 예덕선생의똥을 가져다가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똥장수는 20세기 초까지도 존재했던 엄연한 직업이었다. 1910년대에 똥과 재를 섞은 똥재 한 섬은 10〜30전에 팔리기도 했다. 도시의 분뇨는 이렇듯 똥장수들이 처리했다. 과거 한양 사람들은 똥장수에게 똥을 팔았으나, 1935년 이후부터는 시대가 바뀌어 배설물의 처리비용을 따로 지불하는 것으로 변했다.

9 서양의 수세식 화장실의 도입

오늘날 화장실이 거실의 한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을 흘려 처리하는 수세식 변기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화장실은 집 뒤쪽에 가려두던 것에서 씻고 화장하는 기능까지 겸비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출처: gettyimages>

농촌과 달리 배설물의 처리는 도시에서 늘 문제였다.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대소변을 거리에 마구 버려 위생과 미관상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수세식 화장실이다. 1775년 영국의 시계 제조공 알렉산더 커밍스가 처음 발명했다고 알려진 수세식 화장실은 현대식 도시문명의 청결함을 가져다 준 위대한 발명품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변기 배수관에 S자 모양의 트랩을 만들어 악취가 관 밑에 머물러 실내 공기 중으로 배출되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배설물을 처리하는 장소(뒷간)를 실내의 한 공간에 둘 수 있도록 하였다. 20세기 후반 수세식 화장실은 우리나라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1972년 서울시내 화장실 중 수세식은 놀랍게도 7%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수세식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외형적 깨끗함과 달리 수세식 화장실은 똥오줌을 단순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분뇨를 처리하려면 그 50배에 달하는 물을 소비해야 한다. 많은 물을 낭비하며 처리된 분뇨는 하수처리 과정을 거쳐 정화되지만, 하천이나 바다의 수질오염을 포함한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고 배설물을 배출하고, 이것은 다시 거름이 되어 음식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뒷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은 이러한 고리를 끊어 버려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제 뒷간이란 이름은 낯설어지고, 용변뿐 아니라 씻고 화장하는 기능까지 겸비한 ‘화장실’이란 이름이 더욱 널리 사용되고 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과거와 같은 재래식 화장실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또한 농촌에서도 천연비료인 똥재를 사용하기 보다는 화학비료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음식 - 똥 - 거름 - 음식으로 이어지는 자연 순환의 고리는 단절되고 말았다.

10 뒷간과 화장실

언제부터인가 화장실의 청결도가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각 지자체별로 수억 원을 들여 고급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 경쟁처럼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하고 깨끗한 화장실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순환고리를 단절시켰다는 문제는 여전하다. 비록 많은 문제가 있지만, 재래식 뒷간이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이어주는 자연 친화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 들어 현대 화장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보다 자연 친화적인 순환식 화장실, 생화학 변기, 자연 발효식 화장실 등이 차츰 늘어가고 있다. 자연에서 발생한 존재인 인간의 배설물을 자연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변화의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다니엘 푸러 저, 선우미정 역, [화장실의 작은 역사], 들녘, 2005;전용호,「익산왕궁리유적의 화장실에 대한 일고찰」, [백제학보] 2집, 2009;홍순민, [궁궐의 뒷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11;김영진 외, [조선시대 시비기술과 분뇨 이용], [농업사연구] 7집, 2008;강준만, [한국화장실의 역사], [인물과사상] 102집, 2006;정연학, [뒷간 그 서구문화의 확실한 식민지], [실천민속학 새책] 3집, 2001.

  • 발행일2012.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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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