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와인의 신화가 되다

  와인 1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카베르네 소비뇽은 검은 포도의 왕이다. 하지만 탱탱하게 영글기 전에는 성질이 고약하여 포도의 왕이라는 자태가 묻어나지 않는다. 검고 작은 두꺼운 껍질에 쌓인 카베르네 소비뇽은 어린 시절에는 거칠고 날카로운 쓴맛을 내지만, 지하 저장고에서 10년 이상의 숙성을 거치면 위대한 와인으로 변모한다. 복합적인 맛과 향이 가히 포도의 지존이라 할 만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레드와인의 재료로도 가장 널리 쓰인다. 프랑스 보르도가 원산지이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양조할 때부터 강한 타닌을 길들여 만든다. 그리하여 캘리포니아 와인은 원산지와 판이한 성격의 부드러운 와인으로 태어난다. 같은 종이라도 주인의 손길에 전혀 다른 맛을 지닌 와인이 된다.

메를로(Merlot)는 매력적인 포도다. 포도의 껍질은 진한 보랏빛을 띤다.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당분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으나 타닌은 적다. 그 맛과 향이 여성스러워 ‘메를로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갓 담갔을 때는 친절하고 쉬운 맛과 향을 지녔고, 질감 또한 부드럽고 감미로워 인기가 높다.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찰떡궁합을 연출하며 보르도 와인의 대표가 되었다.

피노 누와는 포도의 여왕이라 불리며 그 맛이 세련되고 우아하지만, 변덕스러워 범접하기가 무척 힘들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품에서 자라는 피노 누와는 비가 많고 일조량이 부족한 고향의 기후 때문에 매년 훌륭한 맛을 기대하는 애호가들을 계속해서 실망시킨다. 하지만 10년에 두세 번 제대로 익을 때에는 그 어떤 포도보다 황홀한 매력을 내뿜기에 영원한 포도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산지오베제의 변종인 브루넬로.
ⓒ Brunello di Montalcino Consorzio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라틴어로 ‘제우스의 피’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포도로서 과거에는 별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몬탈치노에서 브루넬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면서부터 과연 ‘제우스의 피’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실크 같은 질감과 꼿꼿한 타닌 그리고 적당한 산도를 지닌 산지오베제는 토스카나의 태양과 자연을 가장 많이 닮은 포도로 꼽힌다.

시라는 남프랑스 론(Rhone) 계곡에서 만날 수 있는 포도다. 호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이름이 쉬라즈로 바꿔 불리게 된 시라는 카베르네 소비뇽 못지않은 거친 맛과 강한 타닌, 그리고 특유의 향신료 같은 향이 특징이다. 호주의 대표 품종이 된 쉬라즈는 뛰어난 숙성력과 쾌활함을 바탕으로 이제는 신세계 최고의 포도가 되었다.

샤르도네는 청포도의 일종으로, 피노 누와처럼 프랑스 부르고뉴가 고향이다. 타고난 풍부함과 섬세함으로 최고의 화이트와인을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맛과 향이 다른 청포도에 비해 중립적이라 지역에 따라 상이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태어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샤르도네는 오크통 숙성의 흔적이 덜 보이면서도 육중한 질감을 유지하고 있는 몽라셰(Montrachet)다.

소비뇽 블랑은 풋풋한 풀 향기가 나는 상큼하고 신선한 청포도로서, 오크통 숙성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는다. 루이 비통 계열이 뉴질랜드에 조성한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는 오크통이 아닌 스테인리스 강철 통에서 숙성시키는데, 그래야 제 맛도 나고 맛이 좋다는 세간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야생화가 만발한 풀밭 길을 긴 머리 날리며 달려가는 청순한 소녀가 떠오르는 포도다.

세미용(Semillon)이 없었다면 화이트와인의 숙성력은 끝내 증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짝이는 투명한 지푸라기 색에서 진화를 거듭하다가 점점 진한 색을 띤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갈색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여준다. 두꺼운 껍질이 귀부 곰팡이의 공격으로 벌어져 포도알의 수분이 빠지면 드디어 포도는 흉측한 모양으로 변한다. 박씨 부인 같은 못난이 세미용은 나중에 달디단 화이트로 변신하여 애호가들이 잊지 못하는, 톡 쏘면서도 벌꿀 향 가득한 귀부 와인이 된다.

리슬링(Riesling)보다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드는 포도가 세상에 또 있을까. 리슬링은 천의 얼굴을 가진 청포도다. 깔끔한 드라이한 맛에서부터 새콤달콤한 맛, 나아가 디저트를 대신할 만한 단맛까지 다양하게 탈바꿈하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지녔다. 고향인 라인 강을 떠나 많은 나라에 두루 퍼져 있지만, 리슬링은 여전히 독일의 리슬링이 최고다. 누구나 다 맛있다는 아이스와인 역시 독일 아이스바인(Eiswein)이다. 원조의 힘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포도가 신의 축복이라는 와인으로 재탄생하게 된 데에는 미식의 측면만이 고려된 것은 아니다. 포도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상한다. 그래서 빨리 빨리 팔아야만 했다. 농부는 포도농사만으로는 항상 불리한 형국이었다. 그러나 와인은 두고두고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와인은 포도가 지니지 못하는 큰 부가가치를 지닌다. 당장 팔지 않아도 되니 흥정에서 밀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오래 묵힐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질 수 있다.

와인의 탄생에 얽힌 또다른 측면에는 와인을 양조한 사람들이 모두 유목민이었다는 이유도 작용한다. 새로운 땅에 정착한 그들에게는 식수가 귀했고, 야채도 귀했다.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을 확보하기 위한 먹거리가 필수 불가결한 문제였다.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와인은 그들에게 있어 삶의 숙제들을 일거에 해결해 준 신의 선물이었다. 지금 우리가 여가로 즐기는 와인은 생존과 연관된 고민으로 탄생한 산물이었다.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와인 경매사가 알려주는 와인의 모든 것을 담은 『올 댓 와인』. 이 책에서는 와인을 제대로 고르는 법에서부터...더보기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