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있는 종이를 개발하다

채륜

蔡倫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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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50(?) ~ 121(?)

종이는 문자와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인류의 정신문화를 발전시킨 3대 발명품으로 일컬어진다.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태블릿PC 등의 개발로 점점 그 역할이 축소되어 가고는 있지만, 종이는 아직도 인간의 생각을 담아내고 기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종이의 발명가로 흔히 알려진 사람이 바로중국 후한대의 사람 채륜이다.

1 채륜의 생애

채륜은 중국 후한대의 환관이었다. 후난성 계양사람으로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 때 환관으로 황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4대 화제가 즉위한 후 어린 화제를 양자로 두고 섭정을 하던 두태후(3대 장제의 황후)의 편에 서서 권력을 얻어 중상시를 거쳐 상방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상방령은 황실의 칼이나 무기를 제작 감독하거나 황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제작하고 기술을 확립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성실한 인품에 학문을 좋아하며 물건 만들기에 재능을 가지고 결백하게 행동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채륜은 화제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 유악이라는 국가 기획기관에 참가하여 정책 입안에도 참여하였고 왕의 곁에서 자주 간언을 올리는 위치에 올랐다.

더불어 그는 고전의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학자 관리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는 105년 기존의 포장지 개념이었던 종이를 개량하여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하였다.

그가 만든 종이는 학문발전에 있어 일대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전에 문자 기록은 무겁고 부피가 큰 대나무나 나무판자 혹은 고가의 비단을 이용해야만 했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채륜이 글을 쓸 수 있는 가볍고 저렴한 종이를 개발함으로써 문자의 기록과 학문전달은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맞게 된다.

이는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컴퓨터 개발 이상의 지적 혁명이었을 것이다.

황제 화제의 적극 후원 속에 승승장구하던 채륜은 화제가 죽고 난 뒤 어린 상제를 대신해 섭정하던 등태후(화제의 황후)와 손을 잡고 권세를 이어나갔다.

등태후의 후원으로 114년 채륜은 용정후에까지 봉해져 장락현의 태복이 되었다. 등태후는 아들 상제가 죽고 난 후 어린 안제를 황제로 봉하고 계속 섭정하였기 때문에 채륜도 그와 함께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채륜의 권세는 121년 등태후가 사망하고 안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저물기 시작하였다. 안제는 3대 장제의 아들로 황태자 자리에 있다가 두태후에 의해 축출된 유경의 아들이었다.

그는 등태후와 그 외척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유경이 황태자 자리에 있다가 쫓겨나게 된 경위를 조사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조모였던 송귀인(장제의 후궁)이 두태후의 중상모략에 의해 무고하게 자살로 내몰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때 송귀인을 모함하는 두태후에게 힘을 보탠 것이 바로 채륜이었다. 채륜은 즉시로 형장으로 끌려나올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에게는 형을 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형벌은 대개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채륜은 자신에게 형장으로 출두하라는 칙명을 가지고 온 사자가 내민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2 채륜이 만든 종이 채후지

대개 채륜을 종이의 발명가로 알고 있으나 그는 종이의 발명가라기보다는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의 개발자라고 하는 편이 옳다.

종이는 채륜이 개발한 종이가 나오기 200년 전으로 추측되는 시기의 유적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이때의 종이들은 풀솜이나 마를 펴서 만든 것으로 하나같이 동경(구리거울) 등을 싸는 포장지의 개념으로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는 아니었다.

채륜의 종이 개발 이전에 문자는 대개 대나무를 쪼개어 이은 것이나 나무판자 아니면 고가의 비단 등에 쓰였다.

이는 보관과 이동, 가격의 면에서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지식은 이들 기록물을 가질 수 있는 상류층들에게만 국한되었고 그로 인해 학문의 발전은 지체되었다.

105년 채륜은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헌 헝겊, 낡은 그물 따위를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이를 화제에게 헌상하였다. 채륜의 종이 만드는 법은 비단 제품을 제조하는 과정에 생긴 나머지 비단 실이나 풀솜을 이용하여 부직포를 만드는 방법을 응용한 것이었다.

채륜은 종이의 재료를 잘게 잘라 재료를 물에 녹이고 이를 대나무를 짜 만든 책에 얹어 말리는 공정으로 종이를 완성하였다. 이로 인해 저렴한 재료로 가볍고 질기며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매끄러운 종이가 탄생하였고 이는 인류의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종이를 뜻하는 한자 지(紙)는 당시에는 비단을 만들고 남은 재료로 만들어진 천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에 채륜이 만든 종이는 채후지(蔡侯紙, 채륜이 만든 종이란 뜻)란 말로 높여 불렸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그림.(왼쪽 상단부터)<출처 : wikipeida.org>

3 종이의 보급

채륜 이후에도 종이의 개량은 계속되어 제자 좌백이 [좌백지]를 개발하였다. 종이의 보급으로 후한 이후 중국에서는 학문이 매우 발전하였고 이 종이의 제지술은 3~4세기경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최초로 전해졌다.

백제의 왕인과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술을 전파하면서 종이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져 중국과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종이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한편 종이는 8세기경 중국 당나라 시기 이슬람을 거쳐 서양에도 전해져 서양의 학문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한 채륜은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국 섬서성에는 채륜박물관이 있어 오늘날에도 채후지가 복원 제조되고 있다고 한다.

  • 발행일2011.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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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미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