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2003년 20일 만에 바그다드 점령
2019년 이란 공격엔 변수 너무 많아
이란, 미국에 적대적 국가로 둘러싸여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하면 국제 재앙
이란 국경, 자그로스 산맥 가로막아
이란, 미사일·전투기·전차 자체 생산
시리아·헤즈볼라·후티반군 대리전도
위기 앞에 단합하는 이란 국민 중요
트럼프 대통령 합리적 판단이 관건이란과 미국의 갈등이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이 지금 이란과 전쟁을 할 수 있을지, 만일 그럴 경우 이란은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사태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2003년 이라크전이다.
전쟁은 불과 1개월 1주일 4일 만에 끝났다. 그해 5월 1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하면서 이라크전은 막을 내리고 군사적 점령으로 전환됐다.
당시 전 세계는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과 효과적인 전술, 강력한 무기 체계에 경악했다.
이란과 동북부 국경을 맞닿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지리적, 경제적으로 러시아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 미군이 이라크 침공로로 활용하기 곤란하다. 터키는 여전히 나토 회원국이긴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인권 등의 문제로 서방 세력과 사이가 지극히 나쁜 상태다. 러시아로부터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한 대공무기인 S-400을 들여오기로 계약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시리아 문제 해결을 논의한다며 지난 1월 14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러시아 소치에서 3자 정상회담을 하는 등 러시아 및 이란과 가까운 행보를 계속 보여왔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경을 맞댄 이란을 침공하려는 미군에게 길을 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란과 동북부 국경을 맞닿은 투르크메니스탄 역시 러시아 영향권에 있다.
이란 동부의 파키스탄은 미국과 가깝게 지내다, 사이가 벌어지기를 반복해왔는데 현재는 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통해 이란을 공격하는 것은 난센스다. 아프가니스탄 자체가 제대로 안정화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부 국경은 이란의 중심지와 거리가 너무 멀어 전술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이란의 중심지는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이스파한과 시라즈, 그리고 페르시아만 유전지대를 잇는 중서부 지역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한 이라크는 강대국이 인위적으로 만든 모자이크 국가다. 메소포타미아를 400년 이상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 1920년 맺은 세브르조약으로 이 영토를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넘겼다. 영국은 중부 바그다드의 수니파, 남부 바스라의 시아파, 북부 모술의 쿠르드족을 인위적으로 통합해 1932년 이라크 왕국이란 나라를 만들었다. 1차대전 당시 영국에 협력했던 메카의 하심 가문 출신의 파이살 1세가 초대 국왕을 맡았다. 1958년 아브드 알 카림 카심 장군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라크공화국이 들어섰다. 1968년엔 바트당 쿠데타로 일당독재 체제가 시작됐으며 1979~2003년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이 철권을 휘둘렀다. 후세인은 시아파 국가인 이란에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벌어지자 1980~88년 이란-이라크전을 벌였다. 쿠르드족이 독립운동을 벌이자 독가스로 5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2003~2011년 미국 점령기에 이라크는 새로운 헌법으로 나라를 구성했지만 혼란으로 13만~46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2014년 이라크 내전이 발생하면서 7만2800~10만9500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란은 다르다. 이란은 사실 다민족 국가다. 페르시아인이 61%, 서북부에 주로 사는 아제르바이잔인이 16%, 서부 지역과 동북부 투르크메니스탄 접경지역에 나뉘어 거주하는 쿠르드족이 10%, 서남부에 사는 루르스 인이 6%를 각각 차지한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이란 국민은 99%가 무슬림이며 이 가운데 90%가 시아파이고 9%만 수니파다. 이란은 이라크와 비교하면 시아파 일색으로 비교적 통일된 국가다. 위기가 닥치면 분열의 가능성보다 통합의 가능성이 더 큰 국민이다.
쿠르드족도 독립보다 이란에 통합되는 분위기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활동했던 쿠르드족 모하마드 바게르 알리바프는 쿠르드족 아버지와 페르시아계 어머니를 둔 인물로 이란-이라크전에 참전했으며 2005~2017년 12년 동안 수도 테헤란 시장을 지냈다.
1980~88년 벌어진 이란-이라크전에서 이라크가 8년간 이란을 공격했어도 전선을 뚫지 못했다.
지형의 이점에 사기까지 높았던 이란군의 필사적인 방어와 반격으로 국경 근처에서 밀고 밀리는 혈전만 계속했을 뿐이다. 이라크군은 최소 10만5000명에서 최대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전사자를 내고도 험준한 국경지대를 뚫고 이란 영토 깊숙이 진입하는 데 실패했다. 이란도 최소 12만3220명에서 최대 60만 명의 추정 전사자를 내면서 방어했다. 2016년 이란을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이 마을마다, 모스크마다 지역 전사자들의 사진이 들어간 현수막이 걸려있다는 사실이었다. 대도시이건 시골이건 예외가 없었다. 적을 맞았을 때 이란은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는 단결할 가능성이 높은 게 이란 국민이다. 이란은 이란-이라크전 당시 총력전을 수행하느라 어느 정도 사회적 통제를 풀었다. 여성은 복장에서만 제한을 받을 뿐 직업 선택이나 사회 활동에선 거의 제약이 없다. 게다가 부유층이 많은 소수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들은 전쟁 당시 군자금을 대면서 이슬람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이란 체제에 근본적으로 불만을 품거나 과거 군주제 시절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미 400만~500만 명이 출국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최고 지도부는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종교계는 자칫 타협했다가 그나마 권위를 잃어버리고 몰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과 전투를 벌이는 예멘의 시아파 후티족 반군은 이란으로부터 미사일 관련 지원을 받는 것으로 관측된다. 후티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으며 드론을 통해 요격 미사일 기지를 공격해왔다. 사우디는 최근 이들이 드론을 이용해 자국의 원유 파이프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란은 테러 세력과는 무관하다. 중동의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이란과 종파가 다른 이슬람 수니파인 것은 물론 시아파를 지극히 혐오한다. 수니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이 이슬람 성인을 공격하고 성인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시아파에 대한 증오와 탄압을 일삼기 때문이다. 와하비즘은 사우디 왕실인 알사우드 왕가의 신앙이기도 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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