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구단소개

OB-두산 베어스

프로야구 구단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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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일 두산은 LG와의 개막전에 원년 우승 멤버를 초청해 특별 제작한 우승 기념 반지 전달식을 개최했다. 또한, 식전 행사를 통해 불사조 박철순이 김경문 NC 감독과 배터리를 이루고 홈런왕 김우열 전 쌍방울 감독이 시타를 하는 등 구단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토양을 만드는 한편 이를팬에게 알리는무대를 펼쳤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1982년 1월 15일 한국 프로야구 제1호 구단이 창단했다. 대전·충청을 연고지로 한 OB 베어스가 6개 구단 중 가장 발 빠르게 창단식을 거행한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김영덕 감독, 김성근 투수코치, 이광환 타격코치로 한 코치진에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박철순, 실업야구의 홈런왕 김우열, 윤동균 등 선수 25명으로 구성됐다.

박철순, 강철원, 박상열, 선우대영, 계형철, 김현홍, 황태환(이상 투수), 김경문, 조범현, 정종현, 김진홍(이상 포수), 신경식, 구천서, 이근식(大), 양세종, 유지훤, 김광수, 박종호(이상 내야수), 윤동균, 이홍범, 김유동, 정혁진, 이근식(小), 구재서, 김우열(이상 외야수)

애초 OB가 연고지로 희망한 곳은 서울이었지만 이미 MBC가 선점한 상황이었다. 이에 프로야구 산파역을 맡은 이용일, 이호헌 등은 대전·충청을 프랜차이즈로 시작해서 3년 후에 서울로 이전할 것을 제의했다.

“두산그룹 사주의 거주지가 종로구였고 선대도 경기도 광주였다. 대전, 충청도와는 전혀 연고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을 강력하게 희망했는데 MBC 청룡으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에 3년 후 OB가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것을 KBO와 MBC를 포함한 각 구단이 공증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 과정을 모르는 이들은 OB가 충청도를 버리고 야반도주했다고 비난하지만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은 예정된 것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1년 11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두산 프런트로 잔뼈가 굵은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의 얘기다.

양김의 시대 (1) - 원년 우승 신화

시즌 전 대다수 야구 전문가는 OB의 전력을 중·하위권으로 예상했다. 다른 팀이라면 코치를 할 나이의 윤동균, 김우열 등 베테랑에 무명의 젊은 선수로 팀이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OB는 1982년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개막전에서 9-2로 승리를 거두며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마운드에서는 에이스 박철순이 2실점 완투했고 타선에서는 신경식, 양세종의 백투백홈런을 포함한 홈런 3개를 비롯해 장단 11안타를 치며 완승을 거뒀다. 5월 12일 1위에 오른 뒤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고 쾌속 질주한 끝에 29승 11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전기리그 18승 1패를 비롯해 이 해 22연승을 기록한 에이스 박철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의 경험과 강력한 속구에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며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또한, 투타에서 신구조화를 이루며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끈기와 뚝심을 발휘했다.

이것은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잘 나타났다. 에이스 박철순이 허리부상으로 정상적인 등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맞이한 1차전에서 무명의 잠수함 투수 강철원이 9이닝 3실점 하는 호투를 펼쳤고 선우대영도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삼성의 삼두마차 권영호-황규봉-이선희를 상대로 숨 막히는 연장 15회 무승부를 펼친 것. 전력 열세 속에 뜻밖의 무승부를 기록한 OB 선수단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2차전 패배 후 3차전부터 4연승을 거두며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은 삼성 이선희에게 좌월 만루홈런을 기록하며 원년 우승을 자축했다. 이종도의 개막전 만루홈런에 이어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도 만루홈런이 나오며 한국 프로야구 원년은 만루홈런으로 동트고 만루홈런으로 저물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OB가 전문가 예상을 비웃으며 원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창단 멤버로 우승에 일조한 김광수 두산 감독대행은 “두산그룹의 모토처럼 인화 단결한 결과”라고 밝혔다. “구단에서 항상 강조한 게 인화 단결과 허슬이었다. 그라운드에선 항상 온 힘을 다하라고 강조했다.

선수 각자가 자기역할을 다할 때 생기는 것이 팀의 융합이다. 매 타석 홈런만 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그렇게 안 된다. 결국, 진루타를 치며 팀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선수라면 누구나 자기가 다 해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욕구를 참고 상황마다 자기 역할을 다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본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진적인 메리트시스템. 언론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의 운영 방식에 정통한 박용민 단장은 잘한 선수에게 혜택을 주는 메리트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승리나 연승, 그날의 투타 성적에 따른 수당을 지급했다.

그때 007 가방에 항상 5백만 원 정도를 현금으로 들고 다녔는데, 경기가 끝나면 바로 100~150만 원 정도를 나눠줬다. 이걸 뒤늦게 다른 구단들도 알고 따라 했지만 그때는 이미 분위기를 뒤엎기에는 늦었다.” 구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그리고 OB는 프로야구 정착을 위해 어린이 관중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어린이회원을 가장 먼저 도입하며 13만 명을 모집하는 등 각 초등학교 교실은 남색과 흰색, 주황색의 OB 모자와 잠바로 온통 도배됐다. 구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비 5천 원에 잠바, 가방, 모자, 팬 북, 수첩, 연필, 지우개, 책받침, 자 등 수도 없이 나눠줬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아주 유치한 사은품이지만 그때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어린이에게 프로야구를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 야구장을 찾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그 세대일 거다.”

1983년에는 처음으로 2군을 창설했고 경기도 이천에 잔디 구장과 실내연습장을 만들어서 유망주를 체계적으로 육성·관리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최근 두산 2군을 두고 마르지 않는 선수 공급의 화수분이라고 하는 말도 오랜 투자가 만들어낸 결실이다. 그러나 원년 우승의 영광은 이내 사그라졌다.

1983년 전기리그에서 최하위로 몰락한 데 이어 후기리그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종합 순위 5위에 그쳤다. ‘전력의 반’ 박철순이 허리 부상으로 전력 이탈하며 마운드가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 7월 전년도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이 임의탈퇴 대상에 오르는 등 팀 내 기강도 무너지며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추락했다. 시즌이 끝나고 김영덕 감독이 사임하고 김성근 코치가 사령탑에 올랐다.

김영덕 감독 시즌 성적(1982.01.15~1983.10.14)

양김의 시대 (2) - 불운에 운 명장 김성근

1984년 시즌은 시작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년도까지 OB 지휘봉을 잡았던 김영덕 감독이 사임 11일 만에 삼성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미 OB 잔류를 둘러싸고 김영덕 감독과 감정대립을 표출한 김성근 코치가 OB 2대 감독에 오르며 감정의 골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감정의 골은 프로야구 최대의 오점으로 나타났다.

당시 후기리그는 롯데, OB, 해태, MBC 등이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전이 이어졌다. 팀별로 2경기를 남겨둔 9월 21일까지 1위 롯데(27승 20패 1무)와 2위 OB(26승 21패 1무)와의 승차는 1경기. 롯데의 최종 상대는 전기리그 우승팀이며 그때까지 5승 13패로 절대적인 열세를 나타낸 삼성이었고 OB는 우승권에서 멀어진 해태가 상대였다.

상대적으로 1경기 뒤진 2위 OB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노골적인 져주기 경기를 펼치며 롯데에 2승을 헌납했고 OB는 망연자실. 58승 41패 1무로 종합승률 1위를 차지하고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과 함께 남색과 흰색, 주황색의 OB 모자는 당시 초등학생에게 명품 모자가 부럽지 않았다. 또한, 깔끔한 흰색과 남색 바탕의 유니폼은 지금도 팬의 지지를 받을 정도로 세련미를 뽐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1985년에는 예정대로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전기리그 2위에 오르며 선전을 펼쳤지만 후기리그에서는 5위로 처지며 앙숙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지켜봤다. 1986년 9월 1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남을 명승부로 꼽힌다.

9회 말까지 롯데 최동원의 호투에 눌려 1-3으로 뒤지며 후기리그 우승은 승률 5리 차이로 MBC에 넘겨줄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김형석이 동점 2점 홈런을 쏘아 올린 데 이어 신경식이 3루타와 상대 실책을 틈타 홈 베이스를 밟으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김형석의 한방으로 3년 연속 20승을 노리던 최동원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또한, 최일언이 행운의 승리 투수가 되며 승률왕에 오르며 해태 선동열의 투수 3관왕도 날아갔다. 그러나 OB는 믿을 수 없는 뚝심으로 MBC를 제치고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삼성 김일융에 막혀 2승 3패로 분루를 삼켰다.

1987년에도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며 5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의 꿈을 부풀렸지만 아쉬운 수비 하나로 좌절했다.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앞선 4차전 9회 말 2사까지 3-2로 리드.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아웃카운트 하나만 남겨뒀다.

그러나 해태 김성한의 내야 땅볼을 유격수 유지훤이 주춤거리며 내야 안타로 만들어줬고 그 사이에 3루 주자 서정환이 홈을 밟으며 동점을 허용했다. 연장 10회 말 1사 만루에서 투수 최일언의 폭투로 3-4로 패했고 5차전에서는 4-0으로 완패하며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역전패라는 고배를 마셨다.

1988년에는 김성근 감독과 구단과의 불화가 표면화되며 종합 5위에 그쳤다. 일본과 미국에서 야구연수를 다녀온 이광환 2군 감독과의 야구관 차이에 전기리그가 끝나고 나서 감독 신임을 놓고 프런트가 찬반 투표를 한 것이 알려진 것.

실망감을 감추지 않은 김성근 감독은 시즌이 끝나고 나서 태평양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광환 2군 감독이 OB 3대 감독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 시즌 성적(1983.12.24~1988.09.08)

암울한 전국 시대

“OB 특유의 끈질김에 공격야구를 가미해 팬을 의식한 경기를 해보고 싶다.” 1988년 9월 9일 OB 사령탑에 오른 이광한 감독의 취임 일성이다. 1986년과 1987년에 일본 세이부와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에서 1년씩 야구연수를 받은 이 감독은 ‘자율야구’를 내세우며 한국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감독의 야구철학을 선수들이 소화해내지 못하며 실패로 끝났다. 현재가 아닌 먼 장래를 내다보고 유망주를 키우겠다는 의도였지만 신구조화가 이뤄지지 않고 팀 리더가 사라지는 부작용을 나타낸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어느 야구관계자는 “근본적으로 OB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광환 감독이 자신의 야구를 펼치기 위해서는 구단의 투자가 필요했지만 OB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투자할 자금도 없었고 선수 기량도 부족했다.

LG에서 성공을 거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OB가 아닌 삼성이었다면 이 감독이 마음껏 자기 야구를 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삼성 눈에는 검증이 안 된 지도자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시즌 5위에 그친 데 이어 1990년에는 6월 11연패를 당하는 등 최하위로 추락한 끝에 6월 19일 도중하차 하며 이광환 감독이나 구단이나 쓰디쓴 경험을 맛봤다.

이광환 감독 시즌 성적(1988.09.09~1990.06.19)

이광환 감독이 물러나며 감독대행에 오른 이는 이재우 타격 인스트럭터.이재우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은 후 팀 성적은 더 떨어졌다. 남은 74경기에서 기록한 승수는 20승. 승률 2할 9푼 7리에 머물렀다. 1991년에도 초반 반짝한 후 최하위로 추락했고 8월 1일을 끝으로 해임됐다.

이재우 감독 시즌 성적(1990.06.19~1991.08.01)

이재우 감독과 배턴을 터치하며 감독대행에 오른 이는 윤동균. 프로야구선수 출신 1호 감독이 탄생한 것이다. 남은 47경기에서 승률 5할 6푼 4리를 기록하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지만 2년 연속 최하위라는 수모를 피하지는 못했다.

1992년 최하위를 벗어나 5위를 기록했고 1993년에는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오랜만에 가을야구를 팬들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시즌 4위 LG에 1승 2패로 무릎을 꿇었다. 7위에 머문 1994년은 OB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이야기된다.

9월 4일 쌍방울과의 군산 경기가 끝나고 나서 윤 감독의 체벌 위협에 선수들이 집단 반발해서 숙소를 이탈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재계약이 확실했던 윤 감독은 중도 퇴진하고 최주억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남은 경기를 이끌었다.

윤동균 감독 시즌 성적(1991.0712~1994.09.14)
최주억 감독대행 시즌 성적(1994.09.14~1994.09.27)
오래전부터 두산은 야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 1986년부터 어린이 야구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야구 불모지에 야구교실을 열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원년 우승 이후 199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다시 밟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수한 신인 선수를 영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985년 OB가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신인 지명도 이전(MBC와 OB는 서울 선수에 대해 2:1 비율로 나눠 가졌다)과는 달리 MBC와 1:1 지명권을 갖게 됐다.

누가 먼저 지명할 것인가. 그 우선권을 놓고 처음에는 동전 던지기(앞면은 OB, 숫자가 있는 뒷면은 MBC)로 하다가 주사위 던지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무엇을 던지든 OB의 연전연패. 프로야구선수처럼 합숙훈련도 하고 컨디션 조절도 힘썼지만 매번 MBC의 승리로 귀결됐다.

1986년에 처음으로 이기며 박노준을 획득했을 때만 해도 동전이나 주사위 던지기는 단순한 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OB가 이긴 것은 1989년과 1998년 단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한 카지노에 갔는데 딜러가 한국 여성이었다. 역시 프로는 달랐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잘 던지느냐?’라고 비결도 물어봤는데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 LG 정영수 과장님이 ‘차라리 그 딜러를 스카우트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게 기억에 남는다.” 구경백 사무총장의 얘기다.

게다가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1989년에 OB는 국가대표 왼손투수 김기범이 아닌 무명의 왼손투수 이진을 선택했다. 고교·대학에서 혹사를 당한 김기범보다 빠른 볼을 던지는 이진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한 것.

그러나 김기범이 11시즌을 뛰며 62승을 올렸지만 이진은 4시즌 동안 단 10승에 그쳤다. 당시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지난해까지 고교·대학 선수를 조사한 데이터가 있으니까 스카우트팀은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한 결과였다”고 지적했다.

팀 성적이 하락하면서 지명한 신인 선수로부터 외면 받는 악순환도 일어났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으로 1차 지명자(김경원, 황일권, 손경수)가 입단을 거부하고 대학과 실업야구를 선택한 것. 전력보강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팀 순위가 향상될 리는 만무한 법이다. 또한, 팀 상황에 맞지 않은 감독 선임도 성적 하락을 부채질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신(新) 양김의 시대 (1) - 믿음의 야구 김인식 감독

일반적으로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에 감독의 능력으로 좌우되는 승수는 10승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경기는 선수가 한다’는 시각이 강하다. 오치아이 히로미쓰 주니치 감독은 “경기를 하는 것은 선수이지만 감독은 게임을 장악한다”고 지적했다.

감독의 역량에 따라 팀 성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나타난 것이 1995년 OB다. 감독 한 명 바뀌었을 뿐인데 전년도 7위였던 팀이 시즌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김인식 감독이 “4강은 노려볼 만하다”고 조심스럽게 출사표를 던졌을 때 다들 코웃음을 쳤다. 지난해 7위라는 성적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수단 이탈 사건으로 팀워크는 모래알처럼 흩어졌고 눈에 띄는 선수 보강도 없었다. 아무도 OB가 우승은커녕 4강 후보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프로야구 판도는 지난해와는 판이하게 흘러갔다. 시즌 초반 만년 하위권인 쌍방울과 OB가 선두를 다퉜다. 쌍방울이 한때의 바람으로 끝났지만 OB는 꾸준했다. 김 감독은 선수들 스스로 할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절대 무리하지 않으며 팀을 운영해나갔다.

시즌 종반인 8월 27일 1위 LG에 6경기 뒤진 2위에 머물렀다. 대다수 야구전문가는 “LG 우승은 확정적이고 OB는 2위 자리를 롯데에 내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역전 기회가 한 번은 온다”고 믿고 기다렸다.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12승 2패를 기록하며 9월 10일 선두에 올랐다. 이후 OB와 LG는 막판까지 숨 막히는 반게임 승부를 가려나갔다. 누가 1위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태평양과의 마지막 2연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OB는 우승을 위해 이겨야 했고 현대로 매각이 결정된 태평양은 홈에서의 고별경기라서 질 수가 없었다.

수원에서 벌어진 1차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남을 명투수전으로 전개됐다. OB 김상진과 태평양 정민태간의 에이스 대결은 9회 초까지 0의 행렬이 이어졌다. 김상진도 정민태도 온 힘을 다해 던졌다. 9회 초 OB는 안타로 출루한 김민호가 2루 도루를 성공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장원진이 적시 2루타를 치며 기나긴 0의 행렬에 마침표를 찍으며 1-0으로 승리. 2피안타 완봉승을 기록한 김상진은 한 시즌 최다 완봉승 타이기록(8개)을 세웠다.

기세가 오른 OB는 9월 27일 인천에서의 시즌 최종전도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반 경기 차이’로 시즌 1위에 올랐다. 13년 만에 밟은 한국시리즈에서는 롯데를 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4승 3패로 물리치며 ‘V2’를 달성했다.

1995년 OB 우승은 한 편의 멋진 드라마였다. 메가폰은 김인식 감독이 잡았고 인화로 똘똘 뭉친 OB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다. 7개월에 걸친 러닝타임은 자율과 믿음을 강조한 김 감독의 용병술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김 감독이 OB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박용민 사장이 감독직을 제의했다. 당시 김 감독은 해태에서 계속 코치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쌍방울에서는 창단 감독 제의가 있었다. 고심 끝에 쌍방울 창단 감독이 됐지만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위권에서 맴돌았다.

3년 계약이 끝나자 만년 꼴찌의 책임을 지고 미련 없이 물러났지만 어느 팀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2년의 야인 생활을 거쳐 OB에서 야구 인생 최고의 해를 맞은 것이다.

1996년에는 다시 최하위로 추락했지만 1997년 5위를 시작으로 해서 매년 한 계단씩 상승했다.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LG를 4승 2패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막강 현대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고배를 마셨다.

2001년 두산은 믿기지 않은 우승 드라마를 쓰며 ‘미라클 두산’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1992년 롯데와 함께 유일하게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한국시리즈 왕좌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산이 역대 최저 승률(0.508)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철옹성을 쌓은 불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마무리 투수 진필중을 비롯해 이혜천, 차명주, 박명환, 장성진 등이 막강 불펜을 구축했다. 이 해 거둔 65승 중 절반에 가까운 29승이 구원승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10승 투수가 한 명도 없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두산 특유의 뚝심이 발휘됐기 때문이다. 2연승을 거둔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제외한 현대와의 플레이오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첫 판을 내주고 역전승하는 저력을 나타냈다.

특히 한국시리즈 1차전 패배 후 2차전이 우천 취소된 것은 두산의 열성에 반한 신의 선물이었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두산은 2차전부터 4차전을 내리 이기며 분위기를 잡았고 6차전에서 6-5로 신승을 거두며 4승 2패로 ‘V3’를 달성했다.

2001년 두산은 기적의 팀이었다. 시즌 3위로 가을 야구에 참가해서 한화, 현대, 삼성을 잇달아 꺾으며 6년 만에 정상에 복귀했다. 이전까지 한국시리즈에 9번 진출해서 단 한 번도 패장이 되지 않은 김응룡 삼성 감독에게 첫 고배를 안겼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김인식 감독 시즌 성적(1994.09.28~2003.10.09)

신(新) 양김의 시대 (2) - 화수분 야구 김경문 감독

2003년 10월 10일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두산은 팀 재정비와 분위기 쇄신을 위해 김경문 배터리 코치를 제7대 감독에 선임했다. 김 감독은 “두산 특유의 팀 컬러인 뚝심을 잘 살려 팬들이 실망하지 않는 플레이를 펼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말 그대로 김 감독의 뚝심은 유망주를 발굴하는 매의 눈을 가진 스카우트팀과 선진화된 2군 운영 시스템과 결합해서 ‘화수분 야구’를 구축했다.

외부에서 비싼 선수를 사오지 않고서도 뛰어난 선수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화수분 야구의 핵심은 균등한 기회를 통한 경쟁에 있다. 김 감독은 과거 명성이 아닌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주면서 내부 경쟁을 강화했다.

기존의 주전 선수들에게는 긴장감을, 후보 선수들에게는 희망을 줬다. 후보 선수가 주전 선수가 되고 2군 선수가 1군 선수가 된 것. 한때 가고 싶지 않은 구단에서 가장 뛰고 싶은 구단으로 환골탈태했다.

이 과정을 통해 김현수, 이종욱, 손시헌, 고영민, 양의지, 이성열, 오재원 등 유망주들이 성장했고 김동주, 최준석, 김선우, 임재철, 정재훈 등 중견 선수들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기량 향상에 힘썼다.

그 결과, 2006년을 제외하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차례나 가을 야구에 참가했다. 2005, 2007, 2008년에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항상 우승에 도전하는 팀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또 두산과 SK와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2007, 2008년)를 통해 한국야구가 질적 발전을 이룬 것은 어느 야구인이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야구에 상대를 압박하는 스피드가 도입된 것.

타자의 빠른 배트 스피드, 주자의 전력질주, 수비의 재빠른 공 처리는 경기에 박진감과 긴박감을 더하며 경기 질을 높였고 야구팬은 열광했다. 이 스피드 야구가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과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의 밑거름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1년 6월 13일 김 감독은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되지 못했지만 김 감독이 명감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믿을 수 없는 전승 금메달과 통산 5할 4푼 2리라는 높은 승률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김 감독에 이어 김광수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고 매 경기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그라운드에 수놓으며 두산다운 끈기를 발휘하고 있다.

김경문 감독 시즌 성적(2003.10.10~2011.06.13)
최근 두산은 3년 연속 100만 관중을 돌파하는 등 프로야구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매년 눈에 띄게 관중이 증가하는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구단과 선수단이 팬과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두산은 지난 8월 27일 3년 연속으로 홈 관중 100만 명을 돌파했다. 올해는 궂은 날씨에 부진한 성적 속에 올린 성과라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인기구단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야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두산은 1986년부터 어린이 야구대회와 어린이 야구교실을 개최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퀸스 데이 등을 통해 여성팬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또한, ‘베어스 데이’, ‘직장인의 날’, ‘스폰서 데이’, ‘플레이어스 데이’ 등 다양한 이벤트를 실시하며 야구장을 한 번 온 이가 다시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올 시즌 두산의 캐치프레이즈는 ‘All In V4! Hustle Doo 2011!’이다. 구단과 선수단, 그리고 팬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네 번째 우승에 도전하자는 의미다. 뜻밖의 부진으로 ‘V4’는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팬과 함께 호흡하는 구단과 선수단에는 변함이 없다. 두산 야구는 구단과 선수단, 그리고 팬이 즐기는 야구가 된 것이다.

  • 발행일2011. 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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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윤 야구 칼럼니스트

    야구전문블로그 <야구라>의 일원. 네이트 등에 야구 글을 기고하고 있다.

  • 감수
    신명철 前 스포츠 2.0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