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희의 맛있는 술 이야기>패전국 프랑스의 영토 지켜준 와인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혼란기를 틈타 등장한 나폴레옹은 유럽 정복사업을 펼쳤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자랑이었고 그의 승리는 프랑스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몰락하자 시대의 영웅을 낳았던 프랑스의 지위도 패전국으로 전락한다. 포성이 사라진 유럽은 나폴레옹이란 인물을 지우기 위해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에 주도적으로 나선 인물이 오스트리아의 외교수장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는 처음엔 프랑스에서 진행됐으나 서로의 이해가 부딪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외교사절단을 빈으로 초청한 메테르니히는 1814년 9월 1일부터 회의를 주관했고, 유럽 열강들은 각국의 이득을 위해 서로를 견제했다.

패전국인 프랑스도 회의에 참여했다. 프랑스 대표는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이였다. 장군들을 배출한 무관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다리를 다쳐 군사학 대신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성직자가 돼 1788년 20대 중반에 오툉의 주교로 임명된다. 이듬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교회의 재산을 나라가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삼부회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혁명에 동조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임명된 탈레랑은 1792년 협상을 위해 영국으로 간 사이에 체포영장이 발부돼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1796년에 귀국한 그는 외교업무를 담당하다가 그해부터 이듬해까지 있었던 이탈리아 정복 과정을 지켜보며 나폴레옹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 기여해 외교장관직도 이어간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과욕을 경계하며 그가 일으키려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외교장관직을 그만둔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즉위한 루이 18세 때 그는 다시 외교장관을 맡으며 빈에서 열리는 회의에 패전국 대표로 참석한다.

회의는 한 달간 이뤄질 계획이었지만, 오스트리아에 불리하게 진행될 때마다 메테르니히는 회의를 중단하고 파티를 열었다. 타고난 화술과 외교력으로 정평이 나 있던 탈레랑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 요리와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가져온 샤토 오브리옹을 각국 대표자들에게 따라주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며 프랑스를 변호했다. 그는 그들이 패권국가 때문에 유럽 질서가 다시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국가 간 세력균형을 통한 안정을 원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진실이 된다. 회의가 8개월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서 저녁 때마다 탈레랑이 따라주는 오브리옹을 마시며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던 열강의 대표자들은 그의 말을 믿게 된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영토를 거의 온전히 유지한 채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겉으로는 난세에 나타난 나폴레옹이 유럽을 쥐고 흔든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탈레랑이 혁명으로 어지러웠던 프랑스를 안정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을 선택했다가 프랑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폴레옹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술칼럼니스트

[ 문화닷컴 바로가기 | 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 | 모바일 웹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