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부일체’…비웃지 않고 웃기는 ‘착한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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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5.17. 오후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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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톡톡

에스비에스 제공
<집사부일체>(에스비에스)는 자기 분야에서 성과를 이룬 사부들의 집에 찾아가 1박을 하며 가르침을 얻는다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다. 처음 콘셉트를 접했을 때 의아했다. 요즘처럼 진지함이 사라진 시대에,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슨 사부를 찾고 가르침을 찾는단 말인가. 누구를 초대하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라디오 스타>(문화방송)나 원색적인 조롱을 일삼는 <아는 형님>(제이티비시)이 인기를 누리는 판에, 게스트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뭔가를 배우겠다는 취지의 예능이라니 잘될까 싶었다.

기우였다. <집사부일체>는 16개월 동안 30여명의 사부를 찾아 그들만의 독특한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한 사람은 한권의 책’이라는 말처럼 저마다의 삶 속에는 배울 점이 있다. 하물며 어떤 성취를 거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르침이 있기 마련이다. 프로그램의 콘텐츠는 사부들의 삶에서 나올 테니, 제작진의 개입은 최소화한 채 사부와 출연자들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될 일이다. 실제로 이런 연출을 통해 <힐링캠프>(에스비에스)처럼 인터뷰를 위주로 한 프로그램에 비해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조명되는 효과를 낳았다.

첫 회에서 전인권은 내내 곤궁한 일상을 보여주었지만, 마지막에 들려준 그의 절창은 예술가의 면모를 느끼게 해주었다. 유명인의 삶을 신변잡기로 분해하여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독보적인 그의 세계를 온전히 보여준 것이다. 차인표의 근황도 흥미로웠다. 인터뷰를 위주로 한 프로그램이었다면 그가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해 매 순간 엉뚱한 구상에 자아를 몰입시킨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박진영은 ‘꿈’이라는 화두를 통해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고 스스로 어떤 가치를 위해 살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고 강론했다. 그러면서도 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 자기관리에 힘쓰는 이유가 나이 먹어도 계속 춤추는 가수로 남고 싶기 때문이라는 ‘딴따라’의 욕망을 들려주었다.

강형욱이 경찰견 레오의 은퇴식에 찾아간 장면은 뭉클했다. 강형욱은 강압적인 훈련법만 통용되던 시절을 함께하다 떠나보낸 레오에게 각별한 애틋함이 있다. 8년간 레오와 함께 고된 임무를 수행해온 경찰관이 레오를 강형욱에게 돌려보내며 작별의 편지를 읽는 순간, 인간과 개와 위계는 희미해졌다. 전유성은 단지 원로라서 대접받는 게 아니라 진짜로 후진을 기르는 사부였다. 개그맨 시험에 3번 이상 낙방한 사람은 어떻게든 개그맨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특훈’을 통해 데뷔시켰다는 말은 놀라웠다. 한국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다. 경쟁의 결과만 중시되고, 낙오자는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이런 세태에서 운이 없어서, 실력이 없어서, 연줄이 없어서 번번이 떨어지는 이들이 유일하게 가진 ‘꼭 하려는 의지’를 보고 도움에 나섰다니 감동적이다.

이런 범상치 않은 가르침에 출연자 4명의 화학작용이 큰 재미를 낳는다. 이승기, 이상윤, 양세형, 육성재는 처음엔 어색했으나 점차 합이 맞고,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재미있는 장면들을 뽑아냈다. 그 공로로 연말 시상식의 상을 휩쓸었는데, 가장 큰 미덕은 가학적이거나 자학적인 방식으로 웃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점잖고 단정한 캐릭터인 이상윤과 이승기는 물론이고, 경망스러운 캐릭터인 양세형도 무례하게 공격하거나 비아냥거리지 않는다. 육성재는 이따금 진지한 눈빛으로 내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드러내고 상대를 격려한다. 육성재는 돌을 세우고, 양세형은 기발한 추임새를 넣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심지어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이상윤은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려 든다. 서로의 못남과 비천함을 강조하는 <무한도전>이나 <아는 형님>이었다면, 예능을 모른다며 쓴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이들의 상생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양희은 편에 있다. 양희은이 아끼던 안경 줄을 실수로 망가뜨린 출연자들은 고치고 숨기느라 애를 쓰다가, 다음날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익명의 사연으로 털어놓았다. 이런 협력과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출연자들이 서로를 북돋는 분위기가 있어온 덕분이다.

최근 <집사부일체>는 소방관들을 사부로 모셨다. 유명인에 국한되었던 사부의 범위를 무명의 영웅들로 넓힌 것이다. 출연자들은 소방관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25㎏의 장비를 착용한 출연자들은 숨이 갑갑하고 시야가 좁아지며,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그대로 느껴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화마가 산소를 빨아들여 폭발하는 백드래프트 현상을 접한 출연자들은 공포를 실감했다. 밤새 초긴장 상태로 대기하다 수차례씩 출동하는 것도 힘들지만, 심리적인 외상이 더 큰 문제다. 소방관들의 평균수명이 58.8살에 불과하고, 자살자 수가 순직자 수의 세배에 가깝다는 통계는 소방관들의 직무환경이 시급히 개선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마지막에 출연자들은 흰 가루를 뒤집어쓰며, ‘소방관 고(GO) 챌린지’를 알렸다. 현재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과 처우 개선을 위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뉜 소방관을 국가직으로 일원화하면, 강원도 산불 같은 대형재난에 대처하기 쉬울 뿐 아니라 지역마다 다른 소방관들의 처우, 인력, 장비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다.

이런 공익적인 메시지에 재미와 감동을 섞어 전 국민에게 알려주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었으랴. ‘착한 예능’ <집사부일체>의 힘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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