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끄 아노 감독의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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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2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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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끄 아노 감독의 1986년 작품 <장미의 이름>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지금 돌이켜보더라도 영화화되었다는게

대단히 신기한 일로 생각되는군요.

흔히 20세기 영미문학권에서 가장 뛰어난 책 중 하나라는 극찬을 받는 원작소설이

내포하고있는 다양한 담론들을 생각해보면 지금 다시 영화화되더라도 아노 감독 버전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만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 이후에 출간된 에코 교수의 <푸코의 진자>나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같은 작품들이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화화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의 작품세계가 영화화하기 얼마나 난해한 작업이 될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언젠가 얼핏 본 기억이 나는데, 흔히 글줄 꽤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준을 과시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작가가 움베르토 에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더군요.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전세계적인 초대형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완독한 이가 그리 흔치 않은 책이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한번쯤 접해보신 분들이나 서양철학사, 혹은 사상사에 관한 책을 몇권 뒤적여 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고, 오히려 아주 재미있게 읽혀질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사실 <장미의 이름>은 도입부에서 조금 지루한 부분만 넘어가면 역사적인 상식같은 것은

아무것도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여튼 이 소설이 전세계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이후 본격적인 엄청난 박학다식이 동원되는 지성이 본격 오락소설과 결합되는 양상을 낳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이인화씨의 경우 이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정조대왕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역사소설 <영원한 제국>이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었고,.

또한 일본의 아쿠타카와 문학상을 수상한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장미의 이름>과 아주 유사한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빌려와 <일식>이라는 독특한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

 

14세기 중엽 이탈리아 변방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둘러싸고

당시 유럽이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정치, 경제, 종교, 사상, 문학, 철학, 과학, 예술 기타등등이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박학다식한 지식으로 철두철미하게 재구성되고 있는 점은

단연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백미입니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현학적이며, 너무 많은 대사가 나오는 탓에 영화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던 이 소설을 프랑스의 장 자끄 아노 감독이 수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끝에

마침내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을 했군요.

 

참고로 전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볼때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구축해두었던 이미지들을

하얗게 지워버리고 영화를 접하는 편입니다.

 활자매체를 영상매체로 완벽하게 옮긴다는 자체부터가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볼때는 원작에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차용해서

영화로 재구성해낸 작품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복잡해지지도 않고,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즐길수 있게 된다고나 할까요.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이나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일,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지."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 역을 맡은 숀 코넬리입니다.

노쇠한 007 이미지로 남아있던 손 코넬리는 이 작품으로 비로소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이 작품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쳐블>같은 작품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 숀 코넬리의 젊은 시절 영화는 007시리즈를 포함하여 거의 본 것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언터쳐블>이나 <인디아나 존스 3>, <붉은 10월>같은 작품을 보면 정말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그렇고, 이 작품속의 윌리엄 수도사는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이면서도

광학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로저 베이컨을 스승으로 모신적이 있는, 신학자이자 자연과학자로 등장합니다.

한때 이단심문관으로 재직했지만 이단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독실한 신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되면서 심문관 자리를 그만둔 인물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눈위에 찍혀있는 말의 발굽자국만 보고도 그 말이

수도원장의 말이며, 심지어 브루넬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맞출 정도의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부분은 단연 셜록 홈즈를 연상시키는 부분이기도 한데, 중세시대의 수도사가 뛰어난 명탐정으로

활약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정말 참신했었던 것 같네요.

아, 우리나라의 이인화씨가 쓴 <영원한 제국>에서는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해내는 명탐정으로

다산 정약용이 깜짝 등장하기도 해서 감탄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하여튼 14세기 중엽, 교황파와 프란체스코파 사이의 성경해석을 둘러싼 대립이 첨예해질 무렵

윌리엄 수도사는 이탈리아 변방의 수도원에서 양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회합하는 자리에 참여해

중재를 권유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제자 아드소와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나는, 세계가 피와 광기의 폭풍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는데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이 작품의 화자인 아드소 역으로는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출연했군요.

그는 위노나 라이더와의 <헤더스>라는 작품에서 카리스마 만땅인 사고뭉치 고등학생으로

출연했는데, 당시 대단한 연기를 펼쳐보여 "젊은 잭 니콜슨"이라는 가공할만한 별명까지 얻었다고 하는군요.

이후 <일급살인>같은 좋은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지금은 존재감이 무척이나 희미해져버려 안타깝습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제자이기도 한 아드소는, 수도사의 길을 걷기로 서약한 인물이지만

미숙함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인물인데, 스승과 더불어 일주일간 이탈리아 변방의 거대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극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신념으로 구축되었던 세계가 혼돈의 아수라장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부님께서는 오류를 범하시지 않습니까?"

 

"자주 범하지. 허나 한 가지 오류보다는 여러 가지 오류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오류로부터 나를 구할 것이다."

 

 

 두사람은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원장으로부터 전날 밤 채식수도사 아델모가 수도원 뒷편의

절벽으로 투신해 자살했는데, 그가 자살을 위해 뛰어내린 성벽의 창문은 모조리 닫혀있었으며

심지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는데도 빗방울에 젖어있는 창문조차 없었다고 하면서

악마의 농간인지 아닌지를 조사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이후 윌리엄 수도사는 단번에 수도원장이 궁금해했던 미스터리를 밝혀내지만,

아델모의 자살동기를 둘러싸고 보다 더 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살에는 수도원의 역사뒤에 숨겨진 비밀과 수많은 수도사들의 지식에 대한 탐욕 등이

미로처럼 뒤얽혀 있음을 직감하게 되는데....

 

 

윌리멈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첫날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돼지피떡(우리나라로 치면 선지 쯤 될까요?)을

만들기 위해 돼지피를 받아둔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힌 시체가 발견되면서

수도원은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일주일간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한건씩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발견되는데...

 

"너무 죽어.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어......

헌들...... 어째...... 사도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첫 나팔 소리가 들리면 우박, 두번째 나팔 소리가 들리면 바다의 삼분지 일이 피로 끓는다......

그것 보아요, 시신 하나는 폭설이 내린 이튿날에 눈에 띄었고, 또 하나는 피 항아리 속에 있었다지.

세번째 나팔소리는, 불타는 별이 강과 샘에 떨어진다는 걸 경고하는게요.

거봐, 세번째 형제가 사라졌지...... 네번째가 나타날까봐 겁이 나는구먼.

태양의 삼분지 일이 일그러지고, 달과 별이 얼굴을 가려 세상은 암흑천지가 될 게야."

 

 수도원의 최고 연장자인 알리나르도 노인은 세번째 시신이 욕조 속에서 발견되자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읊기 시작합니다.

이후 연쇄살인사건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일곱가지의 예언에 등장하는 구절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이 부분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네요.

아, 그러고보니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초딩때 열렬히 빠져든 추리소설이었고,

아가사 크리스티는 중딩때 열렬히 빠져든 추리소설이었군요! 

 

 

 한편 소설 <장미의 이름>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주일간 벌어지는 수도원에서의 연쇄살인극을

둘러싼 추리소설, 혹은 미스터리 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다루는 담론들은

일일이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합니다.

 

특히 윌리엄 수도사와 극중 요르게 수도사가 벌이는 웃음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대단히 인상적인데,

요르게 수도사는 웃음이란 인간의 얼굴을 원숭이에 가까울 정도로 일그러뜨리고 영혼을 추악하게 만드는 것으로

수도사들이 마땅히 경계하고 멀리해야하는 것이라고 갈파합니다.

그러자 윌리엄 수도사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야 말로 유일하게 웃을 줄 아는 존재로서,

위대한 성인들은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재치를 보였다며 적극 권장할만한 것이라고 하죠.

이런 논쟁들은 지금보자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치한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대가 시대이고, 종교가 종교이니만큰 작품속의 두 인물은 엄청난 박학다식을 겨루듯이

논쟁을 벌여나갑니다.

 

사실 예수가 웃은 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그 진위를 밝혀내기 힘든 문제겠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야할 당위성을 찾지 못하는 탓에

작품속의 인물들이 심각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겠지요..

영화에서는 원작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논쟁들이 비약적으로 압축되었지만

원작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이단과 정통, 과학과 미신, 합리와 비합리, 탐욕과 절제 등등의

관념들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며 벌이는 논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많은 논쟁거리가 될만한 주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항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 좌파와 우파의 문제, 노동과 자본의 문제, 환경과 개발의 문제...

앞으로 500년쯤 지나면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미래의 세대들은 참으로

유치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살았구나... 하고 피식 웃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그런 시대가 빨리왔으면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우습게 생각할 미래의 세대들은 그네들만의 논쟁거리로

또다시 골머리를 앓게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이 작품속의 윌리엄 수도사가 그리던 하늘을 나는 날틀이 있는 시대,

바다 속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배가 있는 시대,

그리고 교량없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이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로 인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쉽게 말하기는 참으로 난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느님께서 버리신 수도원이란 말씀이십니까?"

 

"하느님께서 편하실 만한 데가 어디 있더냐?"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수많은 이론과 사상, 종교적 신념 등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대목들을 보여주는데, 이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느님을 모신다는 수도원은 동성애와 연쇄살인, 지식을 위해 금단의 규칙을 어기는 수도사들,

심지어 수도원 아래의 가난한 여성을 양식으로 유혹해 성매매를 일삼는 수도사까지,

 온갖 어둠과 비밀로 가득찬 세계로 묘사됩니다.

 

장 자끄 아노 감독의 비쥬얼에 대한 집착이야 유명한 편입니다.

그는 이 작품의 영화화를 위해 유럽에 있는 모든 수도원을 이잡듯이 뒤진 끝에

대규모의 로케이션과 엄청난 규모의 세트를 만들어 14세기 온 세상의 축약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한 수도원을 완벽하게 스크린에 담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얼핏 보기에 그의 초기작인 <불을 찾아서>, <베어>, <연인>등은 할리우드산 블럭버스터에 비해

그다지 스케일이 커보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프랑스 영화로서는 최대규모의 물양과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영화들입니다.

그리고 <에너미 엣 더 게이트>같은 작품은 당시 유럽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윌리엄 수도사는 연달아 발견되는 시신들이 모두 장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승이라는 것을

알고는 콘스탄티노플의 도서관보다 더 많은 금단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는 이 수도원의

장서관으로 수사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장서관은 사서 이외의 수도사가 출입하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는데..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광학이론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로저 베이컨 아래서 수학했다는 윌리엄 수도사 답게

여기서 안경을 사용해서 작은 글자들을 해석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 이 원작소설을 고등학생때 읽었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중세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안경이라는 소품이 깜짝 등장하는 것이 정말 신기하게 보이더군요.

이른바 <장미의 이름>이라는 이 작품은 실제의 역사적 배경과 부합되는 한도내에서의

작가적 상상력이 번득이는 희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중세에 안경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인화씨의 소설 <영원한 제국>을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에도

등장했는데, 거기서는 안성기씨가 정조대왕으로 출연해 안경을 쓰는 장면이 깜짝 등장하기도 했었쬬.

아, 얼마 전에는 드라마 <이 산>에서 정조대왕으로 출연했던 이서진씨도 안경을 쓴 모습을 보여주었네요.  

 

 

"대체 그 여자는 누구였던가? 새벽처럼 일어났으되, 달처럼 아름다웠고

태양처럼 명징했고, 기치창검을 시위하는 군대처럼 위풍당당하던 그 여자는 대체 누구였던가? 

...... 아, 영혼이 그 길을 잃으면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일만을 미덕으로 삼고,

보이는 것은 소유하는 일만을 지복으로 삼는 법,

지복의 삶이 그 근본에 취하게 되면 보이는 건 모두가 영원한 천사들에 둘러싸인 사후의 삶 같은 법......"

 

 

 위의 문장을 보면 번역문학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움베르토 에코의 복잡다단한 원작소설을 번역한 이윤기님의 엄청난 노고가 빛나는 작품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장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전 이 작품의 영어판 원서도 가지고 있는데, 원서에서는 작품속에 등장하는 라틴어나

프랑스어, 이탈리아의 사투리 등등은 영어로 옮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품속에 등장하는 살바토레가 여러나라의 단어들을 섞어서 쓰는 대사는 아마 미국사람들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윤기님은 많은 자문을 구해가면서 세심하게 번역했는데,

그래서 한때 웬만한 소설가 못지 않게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었죠.

실제로 이윤기님은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영화버전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소개해

베스트셀러로 만든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그런지 직접 저술한 <그리스 로마신화>나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한 영웅들>같은

번역물은 작품 자체도 대단히 뛰어나지만 번역한 문장도 굉장히 수려하더군요.

 

한편 밤에는 출입이 통제되는 장서관의 아래, 문서사자실에 몰래 숨어든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는

그들을 추적하는 인물이 있음을 알고는 추적을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 주방에서 인기척을 느낀

아드소는 웬 젊은 아가씨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이 젊은 여인은, 수도원 아래의 빈민촌에 사는 여인인데, 먹을 것이 넘쳐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로부터

성매매를 통해 양식을 구하는 서글픈 인물이지만, 나중에는 이단심문관에게 붙잡혀

화형대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군요.

 

사실 전 이 원작소설을 처음 읽었을때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 바로 수도승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성과 사랑을 나눈 아드소가 나중에 사랑의 본질에 대해 깊게 사색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언젠가 호기심에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인류의 정치, 철학, 예술의 모든 근원을 이루는 개념" 이라고 간략히 서술되어 있더군요.

움베르토 에코는 이 광범위한 개념의 사랑에 대해 치열한 사색이 묻어있는 문장들을 진중하게 펼쳐놓습니다.

원래 어려서부터 책을 좀 즐겨읽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것을 다루는 책을 접해본 적도 없는 터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작품의 후반부에서 아드소가 여인의 이름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장면에서는 한숨이 길게 나오더군요.

 

실제로 사랑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문학, 미술 등에서 가장 흔하게 다루는 주제이기도 한데,

의외로 그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상가나 철학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지나치게 만병통치약처럼 군림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차분한 사색의 시간을 가지려면 역시 독서나 산책같은 것보다 더 주효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금세기 최고의 소설가이자 철학가, 미학자 등등의 명성을 쌓아올린

움베르토 에코가 그려낸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을 책으로 접해보시는 것도 근사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에서는 이런 사색이나 치열한 논쟁들이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분주함 속에 프란체스코파의 대표들이 수도원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당시 성경을 통하여 예수가 세속적인 재산을 가졌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교회가 엄청난 부를 축적할수 있도록 하려는 교황에 반대하여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는 수도사들입니다.

중세 모든 철학과 과학, 예술을 움켜쥔 교회가 지상의 모든 부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려는

교황의 움직임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작품속의 인물들은 제각기 하느님에 대한 신념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후에 곧 도착할 교황파의 사절단에 냉철하기 그지없는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귀가 있음을 알고는 수도원에서 발생한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이 회담에 영향을

미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수사의 속도를 높이려 하는데... 

 

 

"서책을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서책을 대할 때 우리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게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침내 기독교국 최대의 장서관에 몰래 숨어든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는 금단의 서적들이

무한히 보관되어 있는 장소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아드소는 윌리엄이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지식에 대한 사랑이 더 지나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참... 지금 돌이켜보더라도 이 작품속의 윌리엄 수도사는 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학창시절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닐때마다 배낭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던 책이기도 하고,

작년까지 휴가철마다 지리산을 종주할때도 의무적으로 배낭에 들어가 있던 책이기도 하네요.

뭐, 여행도중에 이런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면 에... 아무래도 베개로 쓰는 일이 더 많긴 하지만서두...-_-;;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포스팅하다보니 덧글로 해마다 그 책을 한번씩 읽는 분이 계시다고

덧글을 써뒀던데, 전 <장미의 이름>을 해마다 한번 정도씩 읽는다고나 할까요.

올해는 조금 길게 떠날 것 같아 이번에는 원서를 한번 챙겨볼까 하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특히 이 작품속에서 윌리엄이 금단의 지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장서관에 들어가서

기뻐하는 모습을 본 이후 저도 꼭 그런 장소에 가보고 싶었더랬었나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의 하나도 이 수도원에서 가공할만한

사건을 경험한 아드소가 먼 훗날 이탈리아를 들렀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이 장서관의 잔해더미 속에서

찢어진 양피지들을 주워모아 장서관에 있었던 책들 중의 일부를 자신의 서재로 다시 복원하는 대목이었던 것 같군요.

 

그러고보면 이 작품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도 움베르토 에코가 가공으로 꾸며낸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2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줄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책이라는 물건에 관하여 책이 이야기하는 가장 심오한 주제와 방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요즘처럼 독서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시절에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이 책에 담겨있는

화두는 다시 새겨볼 가치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사실 원작소설에서는 중세시절 세계지도라 일컬어지던 T지도의 모양대로

장서관은 지구를 압축시켜둔 미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수는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되는데, 책으로는 아무리 읽어봐도

미궁형식으로 되어 있는 장서관의 구조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이 작품을 영화화한 장 자끄 아노 감독도 이 미궁을 어떻게 비쥬얼로 그려낼 것인가가

최대의 고민거리였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보자면 요즘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입이 떡 벌어질만한 스케일의 미궁은 아니지만

상하의 공간을 활용한 세트디자인이 무척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더군요.

 

 

"이같은 암흑시대에 현자란 모름지기 자기네 무리들과도 서로 모순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 또한 온당하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역작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짜르트에 대한 시기를 감출수 없었던

비운의 평범한 노력파 궁중음악가 살리에르로 열연을 펼쳤던 F. 머레이 에이브라함은

교황파의 일원으로서 냉혹하기 그지없는 이단심문관으로 등장해서 막강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최근에 제니퍼 코넬리와의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인물로 쉽게 잊혀지지 않을 명연기를 보여주기도 했었네요.

 

이 작품에서 그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프란체스코파가 주장하는 교회의 청빈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와해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윌리엄 수도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어나가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당시 교황의 골머리를 가장 앓게 만들었던 돌치노파라는 이단파에 몸담았었던 살바토레라는

인물로는 론 펄먼이 출연했습니다.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초기작 <불을 찾아서>에서는 원시인으로 출연하기도 했었는데,

영화화된 이 작품에서 원작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의 캐릭터로는 단연 윌리엄 수도사역의 숀 코넬리와

살바토레 역의 론 펄먼일 것 같습니다.

정말 전 이 배우를 처음 봤을때 특수분장을 한 외모인줄 알았더랬네요.

최근에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독특한 판타지 <헬 보이>에서 열연을 펼쳤군요.

 

하여튼 살바토레는 한때 정통파 기독교단에 반기를 들고 군중을 선동했던 돌치노라는 이단파의

수장이 훗날을 도모한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이단심문관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수도원으로 불러들였던, 작품의 중반부에서 아드소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마저

붙잡혀 마녀로 오인받게 되는데...

끝내 고문을 이기지 못한 살바토레와 그를 돌봐주던 레미지오라는 수도사는

그동안 있었던 수도원에서의 살인사건들은 모두 자신들의 소행이었음을 자백하고,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해결된 것처럼 흘러가게 됩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다시 조사에 착수한 윌리엄 수도사는 마침내

미궁의 장서관 한가운데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내게 되고,

그곳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제2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그동안의 살인사건 속에

숨겨져 있었던 놀라운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데...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제2권에는 대관절 무슨 내용이 있었길래...

이따금씩 서양철학사에 관한 책을 접해보신 분들이라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소개한 다음

곧바로 중세의 신학으로 건너뛰어버리는 부분을 접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자연과학이나 철학의 성장을 철저히

가로막았기 때문인데, 흔히 중세의 서구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데서 기인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작품속의 윌리엄 수도사의 말대로 대세의 흐름은 늦출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고,

이 작품은 기독교가 득세하던 시절 서서히 다시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던 시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시대의 유물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주저없이 앗아가면서도 그것을 신의 계시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변명하는 가공할만한 천재 수도사가 등장합니다.

극중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의하면 이 인물은 안티 그리스도의 또다른 모습으로 설명되는데,

이 기나긴 작품을 완독하거나,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절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보게 만드는

힘이 의외로 강한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이루어 놓은 가장 완벽한 세상이라고 믿었던 지고지순한 수도원이 온갖 추악한 범죄로 뒤덮인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공간임을 깨달은 아드소가 당황하는 모습은

오늘날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세상의 거울을 통해 보고 당혹해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이거든요.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는 예로부터 존재해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장미의 이름 (1986, 열린책들), 이윤기 옮김>에서 인용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의 이름 (1992, 열린책들, 개정증보판), 이윤기 옮김>에서 인용

 

"장미의 이름으로 태초의 장미가 존재하나 우리는 빈 껍데기 이름만 취한다."

<장미의 이름으로 (1986, 우신사), 이동진 옮김>에서 인용

 

 

원작과 영화는 모두 위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면서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싯구절을 인용했다는 이 구절을 이용해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지어졌다고 하는데,

수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어보더라도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에 있어 움베르토 에코는 작가는 작품을 만들 뿐,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화끈하게 밝힌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장미"와 "이름"이라는 단어가 교차하는 내용이 담긴 책은 종종 어렵잖게 접할수 있기도 한데,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로미오! 오, 로미오님!

왜 이름이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잊으시고 그 이름을 버리세요.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저를 사랑한다고 맹세만이라도 해주세요.

그러면 저도 캐플릿의 성을 버리겠어요. 당신의 이름만이 내 원수예요.

몬테규 가문이 아니라도 당신은 당신!

몬테규란 이름이 뭐람?

손도, 팔도, 낯도 아니고 신체의 어떤 부분도 아니잖아.

제발,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이름 속에 뭐가 있어?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로울 게 아냐?

로미오 역시 로미오란 이름을 버리더라도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남을 것이 아녜요?

로미오님, 그 이름을 버리고 당신의 신체와는 아무 상관 없는

그 이름 대신에 이 몸을 고스란히 가지세요.

 

 여기서 줄리엣은 로미오와의 사랑이 커다란 난관에 부딪친 이유로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장미가 다른 이름을 가지더라도 그 향가 아름다운 빛깔에 의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꽃이 될거라고 하면서 로미오 역시 몬테규라는 성을 버리더라도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독백인 셈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름을 없애버리면 우리 자신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름을 없애버리면 타인이 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 외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타인이 우리를 이름으로 파악할때와 우리의 본질만으로 파악할때는

어떤 차이점이 발생할까요?

이것이 명확한 이미지를 가진 사물일때는 그나마 이야기하기 쉽지만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을 뜻하는 단어로 넘어가면 이야기하기 굉장히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이 희대의 장편소설은 본질적인 것과 피상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무시할수 없는 거리감을 더할나위없이 훌륭하게 서술해낸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미"와 "이름"이라는 두 단어는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사물의 이름과,

그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상징할때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적 용어가 주는 막연한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단어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쓰이기에는 정말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교수는 미궁의 장서관이 있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극을 통해

끊임없이 선과 악, 좌파와 우파, 친일과 반일 등등... 두가지의 명제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기를 강요받는

현대인들에게 그 선택권이라는 것의 본질을 보다 더 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알고보면 <장미의 이름>이라는 이 원작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단종파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인,

혹은 냉혈하기 그지없는 이단심문관이나, 교회를 통해 무한의 부를 축적하려는 교황이나...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탓에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난처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 마저 이렇게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세상이라는 말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인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라는문장의 의미가 좀더 피부로 와닿을 것 같습니다.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버전 <장미의 이름>은 비록 원작의 방대하면서도 심오한 세계관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훑어낸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적잖은 관객들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는 것은

영화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원작소설을 나름대로 훌륭한 비주얼로 스크린에

담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상영되었을때는 1년간 장기상영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흥행작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숀 코넬리의 열연은 단연 원작소설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그려본 윌리엄 수도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진 탓에 

소설을 떠올리게 되면 반드시 부가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영화속의 이미지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의 귀퉁이에서 추리소설로서도, 역사소설로서도, 그리고 철학소설로서도

그 진면목을 단단히 하는 <장미의 이름>을 잡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에너미 엣 더 게이트> 포스팅 http://blog.naver.com/millenione/120061688536 

 프랑스산 걸작소설의 영화화 ㅡ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연인> 포스팅 http://blog.naver.com/millenione/120051276160

영국산 걸작소설의 영화화 ㅡ 닐 라뷰트 감독의 <포제션> 포스팅 http://blog.naver.com/millenione/120056008053

독일산 걸작소설의 영화화 ㅡ 톰 튀크베어 감독의 <향수> 포스팅 http://blog.naver.com/millenione/120054021701 

 

 

 

ㅡ 본문에 인용된 원작소설의 구절과 등장인물의 이름은 이윤기님이 1986년에 번역한 책에서 빌려왔습니다.

개정증보판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약간 달라지고, 번역된 문장도 약간씩 달라지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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