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明成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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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로 사후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명성황후상
출생-사망 1851 ~ 1895
본관 여흥
시호 명성황후
출생지 경기도 여주

출생과 왕비 간택

1851년(철종 2) 9월 25일 경기도 여주군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에서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치록(閔致祿)과 한산 이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 민치록이 사망하였으며, 다른 형제자매도 일찍 죽어 외동딸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1866년(고종 3) 1월 시작된 왕비를 선발하는 삼간택(三揀擇)에서 최종적으로 남아 왕비로 간택되었다. 같은 해 3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연(同牢宴)의 가례 의식을 치러 고종(高宗)의 부인이자 조선의 왕비가 되었다. 1871년(고종 8) 원자를 출산하였지만 4일 만에 사망하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훗날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가 되는 이척(李坧, 후일 순종(純宗))을 출산하였다.

고종의 친정과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어릴 적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 등의 책을 읽었으며, 왕비가 된 이후에는 《주역(周易)》,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의 서적을 즐겨 읽었다. 명성황후는 학문에 관심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곁에서 국가 정사의 운영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1863년(철종 14, 고종 원년) 고종은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으나, 어린 나이로 인하여 조대비(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잡는 형태로 정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성인이 된 고종은 정사 운영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졌고, 1873년(고종 10)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명성황후는 민승호(閔升鎬), 민영익(閔泳翊), 민겸호(閔謙鎬) 등 외척 출신 인사들을 여러 주요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이들이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자 각계의 비판과 견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과의 갈등과 임오군란 피신

명성황후는 왕비가 된 후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1868년(고종 5) 고종과 궁인(宮人) 이씨의 사이에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난 후,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아끼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실각 과정에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대척점에 서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어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통하여 흥선대원군이 복권되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민씨 일가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명성황후는 간신히 궁을 빠져나와서 장호원을 거쳐 충주의 한 산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며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이 바오딩부(保定府)로 압송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다시 실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과의 갈등과 을미사변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청과 일본의 군사들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특히나 일본은 조선에 내정개혁추진을 강요하고,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감금되어 위협받았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지만,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를 기회로 삼아 러시아를 통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은 조선 조정 내 친러파의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보고,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국면의 전환을 도모하고자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새벽, 여러 무리의 일본인이 경복궁에 들어갔고, 곧 명성황후의 처소 건청궁(乾淸宮)으로 이동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수립되었고, 내각은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켰다. 명성황후의 살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들은 명성황후의 복위(復位)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지에서 국모(國母)를 살해한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대한제국 수립과 황후 책봉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정사를 이어나갔다. 이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국가와 왕실의 재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1897년 10월(양력)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大韓)’이라는 국호의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10월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는 의식을 마친 뒤 황후를 책봉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명성황후는 1895년 살해된 후 서인으로 폐위되었다가 10월 빈(嬪)으로 복호(復號)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후로 책봉되며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후 책봉 이후에는 앞서 지지부진하였던 명성황후 국장 진행에 속도가 가해졌고, 황후의 지위에 맞는 국장이 치러졌다. 명성황후의 능은 홍릉(洪陵)으로 처음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이 죽은 후 남양주시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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