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현직 판사 “사법행정권 남용 인적 쇄신” 요구 11일째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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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8.21. 오전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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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금식을 8월10일 아침부터 시작…

사법행정권 남용 관여자 밝히고

법관회의 결의 모두 존중되길

대법원장 마땅히 결자해지 해야”



현직 단독 판사가 사법행정권 남용 책임자 규명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해소를 위한 추가조사 등 전국법관 대표회의 요구사항 이행을 촉구하며 20일로 11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 임기가 한 달 남짓 남은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6월 거부 의사를 밝힌 뒤부터는 법관회의의 추가조사 재요구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지방법원 소속 오아무개 판사는 17일 법원 내부게시판(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금식을 지난 8월10일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늘이 8일째로 법관 전체를 대표하거나 대법원장을 대신할 자격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금식 참회 기도를 하겠다”며 “각급 판사회의가 무수히 의결했던 내용, 그리고 전국법관 대표회의가 재차 결의하였던 바가 모두 존중되고 수용되기를 바라면서 금식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 판사는 “추가조사는 진상규명과 신상필벌을 통하여 사법부가 깨끗하고 당당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하자는 염원이 당긴 소중한 의결”이라며 “전국 판사님들의 심사숙고한 판단이 총집약된 의결이므로 이렇게 거부당하고 묻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오 판사는 블랙리스트 의혹 그 자체보다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의 기획·의사결정·실행에 주로 관여한 이들이 누구이며, 그러지 않았던 분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추가조사를 지지하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장께서는 추가조사 결의에 대하여 일체 거부하시고 지금까지 인적 쇄신 등의 합당한 대안을 내놓지도 아니하셨다”며 “책임이 무거운 현 대법원장께서 마땅히 결자해지 하셔야 한다. 후임 대법원장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은 명백히 옳지 못한 처사라고 감히 말씀드린다”고 오 판사는 밝혔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판사 모임을 탄압한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별도의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가 지난 4월 충분한 조사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에 현직 판사들은 지난 6월19일 전국 법원 대표들이 모인 법관회의를 열어 추가조사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양 대법원장은 6월28일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며 이를 거부했지만, 7월24일 열린 법관회의는 추가조사를 거듭 요청했다.

오 판사는 법관회의 대표 중 한명으로 블랙리스트 추가조사를 위한 현안조사 소위원회 위원이다. 현안조사 소위원장인 최한돈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7월20일 양 대법원장의 조사 거부에 항의하며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법원은 아직 이를 처리하지 않고 있다.

다음은 오 판사가 올린 글의 전문이다.


금식 참회 기도

전국법관 대표회의 대표법관 여러분께 드리는 글

무더위와 격무에도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최근에 특별위원회 구성 및 안건에 관한 소식을 보았습니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이루어나갈 성과이고, 제도개혁의 노력은 알차게 결실을 맺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간사님들과 특위 법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추가조사!

추가조사는, 진상규명과 신상필벌을 통하여 우리 사법부가 깨끗하고 당당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하자는 염원이 담긴, 소중한 의결입니다. 현 대법원장께서는 추가조사 결의에 대하여 일체 거부하시고, 지금까지 인적 쇄신 등의 합당한 대안을 내놓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기가 막혀서 개탄하면서도, 판사 신분으로 부끄러워서 어디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책임이 무거운 현 대법원장께서 마땅히 결자해지하셔야 합니다. 후임 대법원장에게 짐을 떠넘기시는 것은 명백히 옳지 못한 처사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상대방은 현 대법원장이라야 합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의 기획·의사결정·실행에 주로 관여한 이들이 누구이며, 그러지 않았던 분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 제가 당초에는 추가조사를 반대하였지만, 저는 위와 같은 필요성을 받아들여 추가조사를 지지하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속칭 블랙리스트 의혹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판사로서 참 부끄럽습니다. 법원에 몸 담은 지 오늘로 4,197일째인데, 지난 11년 반을 뒤돌아보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저는 올바른 재판, 좋은 재판이 가장 중요함을 잊어버리고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엎드려 참회합니다.

우리 사법부는 존경과 신망을 잃고 불신과 비난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처참한 지경에 당면하고도, 이러한 일이 없도록 막기 위하여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던가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도 고민스럽습니다.

우리 사법부는, 자정(自淨) 노력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진실한 반성이 없으면 진정한 화합도, 밝은 앞날도 없습니다.

이렇게 갑갑하고 처연한 심정이 들 때마다, 나름대로 마음을 가라앉혀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습니다. 책상 옆에서 좌정하거나 백팔배 절을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안되어, 이제는 밥을 끊었습니다.

금식(禁食)을 지난 8. 10.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늘 8일째입니다.

물론, 제가 법관 전체를 대표하거나 대법원장을 대신할 자격은 전혀 없지요. 사법부 자정(自淨)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저로서는 이렇게라도 금식(禁食) 참회(懺悔) 기도(祈禱)를 하렵니다.

우리 모든 판사님들께서는 너나할 것 없이 고민하고, 정신 차리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부끄러워서 금식기도를 하겠다는 저의 비상한 결심에 대해서, 이것이 마냥 부적절하다고 단정하실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부디 지혜를 보태주십시오.

금식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다스리는 수행법에 포함됩니다. 비록 물과 소금 뿐이지만, 저는 평소와 다름 없이 재판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힘든 면도 있었지만, 머리가 맑고 몸이 가볍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업무에 도움 되었습니다. 방법과 원칙을 숙지하고 신중하게 관리하여, 앞으로도 재판업무에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제1차, 제2차 결의가 천명한 인적 쇄신의 당위, 그리고 이를 위한 추가 조사와 진상 규명은, 수많은 판사님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왜곡되거나 무시되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전국 판사님들의 심사숙고한 판단이 총집약된 의결이므로 이렇게 거부당하고 묻혀서는 아니됩니다.

각급 판사회의가 무수히 의결하였던 내용, 그리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재차 결의하였던 바가 모두 존중되고 수용되기를 바라면서, 저는 금식을 계속할 것입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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