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돕는 사모 되려면 나도 똑같이 해보자”… 40일 금식 결행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경은 목사의 ‘아스팔트에 핀 부흥의 꽃’ <8>
이경은 순복음진주초대교회 목사가 2010년 8월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성령치유 부산대성회’에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

1992년 3월 순복음진주초대교회를 개척했지만, 성도도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내 몫을 감당해보려 부단히 애를 썼다. 남편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이 길에 발을 디뎠지만, 목회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남편이 아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결단했다.

1993년 2월에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장기 금식에 들어가는 이들의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다. 죄를 씻기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해 금식하는 이도 있고 능력 받기 위해 금식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며 승승장구하던 때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드려야 할 때가 왔음을 말이다. 당시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러면 이제 영적인 복 받으소”라는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사명의 길에 발을 내디뎠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지내며 그저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던 내가 과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남편의 목회에 걸림돌이 되는 사모가 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결단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영광 가릴 것 같으면 왜 목회 길을 가겠습니까. 남편의 목회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저를 살리시고, 도움은커녕 영광을 가릴 것 같으면 금식 중에 그냥 저를 데려가세요.’

금식하다 죽으면 지옥은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그저 죽을 각오로 40일 금식에 들어섰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이런 마음도 들었다. ‘남편이 했던 40일 금식기도, 나도 꼭 해보리라.’

나는 사모로서 남편을 돕는 배필이 되려면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남편의 가는 길 앞에 놓인 돌부리도 치우고 장애물도 치워가며 조심해서 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남편을 의존하고 뒤따라가며 목회를 힘들게 하는 사모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처지를 이해하려면 남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해봐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남편이 산(山)기도를 하면 나도 산기도를 했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신학교에 가니 나도 신학을 했다. 남편이 40일 금식을 했으니 이것도 따라 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1993년 2월 40일 금식기도 마지막 날 감사의 고백을 하는 이경은 목사.

남편은 평신도 시절인 1989년 40일 금식을 마쳤다. 금식 이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때마다 두렵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남편이 만난 하나님을 나도 만나고 싶었다. 그런 각오를 기뻐 받으셨는지,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순두부 하나 살 수 없어 된장만 넣어 끓인 된장국으로 보호식을 했지만, 그마저도 감사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사모로서 기도의 불씨를 지키는 역할을 내게 맡기셨다. 개척 당시, 남편은 아직 신학교에 다니던 전도사였다. 주일예배를 모두 마치면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가고 금요일에 수업을 마치면 곧장 진주로 내려와 저녁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러다 보니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비어있는 남편의 자리를 사모인 내가 채워야 했다. 주말 목회는 남편이, 주중 목회는 사모인 내가 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남편을 대신해 저녁기도회를 인도했다. 적은 숫자이지만 성도들과 둥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손뼉 치며 찬양하고 부르짖어 기도했다. 강대상 삼아 펴놓은 낮은 책상을 두드리며 찬양 인도를 했다. 물 한 사발 떠놓고 목을 축여가며, 책상을 열심히 두드리다 보면 손바닥이 갈라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저녁부터 시작된 기도회는 새벽녘이 되도록 계속됐다.

누구보다도 절박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과 콧물로 기도 자리에는 늘 두루마리 화장지가 있었다. “1년을 울어보자. 2년을 울어보자. 10년을 울어보자. 그렇게 울다 보면 날이 새겠지. 울다 보면 꽃이 피겠지.…” 그런 마음으로 울고 또 울었다. 하룻밤을 꼬박 눈물로 기도하며 지새웠던 적도 있었다.

남편이 서울에 간 일주일 동안, 기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은 사모인 내 몫이었다. ‘하나님, 제가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제가 성전의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매일 나의 기도였다. 그렇게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새댁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

그런 마음을 기뻐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교회 설립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저녁 기도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인도해주셨다. 그리고 그 불길은 활활 타 올라 성도들의 심령에 불을 일으켰고 목회 현장에도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불길은 진주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 아바드리더시스템이란
신앙은 순종과 불순종의 싸움… 순종에 두려움·자존심 앞세우면 안돼


신앙은 순종과 불순종의 싸움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순종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며,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을 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때에 이미 약속된 것이다.(창 15:13~21)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 아래 있던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출 6:2~5)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 6:6~8)

400년을 이방 나라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받던 그들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의 말씀인가.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으로 인해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출 6:9) 이처럼 축복을 받기 전에는 꼭 마음을 상할 일이 있다. 100세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후,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얻은 생명보다 귀한 아들이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은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다.(창 22:2)

그때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하나님, 주실 때는 언제고….’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해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잡고 그를 잡으려 한다.(창 22:9~10)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1~12) 하나님은 독자도 아끼지 않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약속하신다.(창 22:16~18) 그렇다. 복을 받기 전에는 분명 마음 상할 일이 있다.

은혜를 받기 전에도 마찬가지다.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 그의 평생소원이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눈을 뜨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는다.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님이시라는 말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막 10:47~48)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예수님께로 갈 수도 없었다. 아무도 그를 예수님께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저 꾸짖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는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했는가.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부르신다. “내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한다는 그의 말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마음을 상하지 않고 은혜의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옴으로 바디매오는 소원대로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복을 받으려 할 때,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려 할 때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축복과 기적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순간적으로 상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은혜의 자리를 놓치지는 않았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순종하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기회, 은혜의 기회를 확실히 붙잡는 축복자가 돼보자.

이경은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미션라이프 홈페이지 바로가기]
[미션라이프 페이스북] [미션라이프 유튜브]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