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도 넘은 아들에게, 매일 아침 카톡 보내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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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보입니다

'낀40대'는 40대가 된 X세대 시민기자 그룹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이번에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 다룹니다. <편집자말>

출근 준비로 부산한 아침, 카톡 알람이 울린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면 아버지가 보낸 것이다. '살면서 친구가 소중한 5가지 이유', '겨울철 조심해야 하는 건강 상식' 등 누군가에게 받은 내용을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 아버지의 카카오톡 메시지 매일 아침 아버지가 보내주는 카카오톡 메시지
ⓒ 신재호

 
그 시작은 3년 전 어느 날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보내고 말겠지 했는데, 그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카톡을 보냈다. 가끔 어머니와 나들이 가거나 친구와 산에 간 사진도 보내오면 나도 "잘 다녀오세요"란 답을 했다.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이제는 안 오면 이상할 정도로 일상이 되었다. 신기하게 아버지가 직접 적은 것도 아니면서 그 안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거리만큼이나 멀었던 아버지
 
▲ 운동장 철봉에서 아버지와 나 어릴 때 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 신재호

 
어릴 때 기억 속에 아버지는 희미했다. 내가 기억나는 시점부터 아버지는 강릉에 계셨다. 원래는 서울에서 함께 살다가 내가 태어날 무렵 강릉으로 발령이 나서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강릉을 가기 위해서는 고속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7~8시간 넘게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어머니는 누나 둘과 나를 데리고, 그 험난한 길을 오갔다. 자연스레 아버지가 서울에 오는 것은 1년에 몇 번 되지 않았고,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여행지는 늘 강릉이었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 유도선수였고, ROTC로 군대 장교까지 지냈다. 까만 얼굴에 다부진 체격은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어린 시절 멸치처럼 바싹 말랐던 나는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집에 올 때면 나를 데리고 동네 운동장을 가서 축구를 하거나 캐치볼을 시켰다.

초등학생 시절의 어린 나이에 쌩쌩 날아오는 공을 받는 것은 무서움을 넘어 공포였다.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운동을 해야 했다. 주말에는 새벽부터 깨워서 물통을 들고 동네 뒷산을 갔다가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왔다. 마음 속으로는 잔뜩 툴툴거리면서도 아버지에게는 표현을 못 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둘이 있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은근 좋았던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온 가족이 안방에 둘러앉아 무직이 된 아버지와 우리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마흔을 조금 넘었다(지금의 내 나이다). 아버지는 이내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고, 계속해서 우리 다섯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함께 지내게 되면서부터 여러 가지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미 아버지가 없는 공간이 익숙한 우리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낯섦이 불편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서 어머니와 큰소리가 오가는 날이 잦아졌고, 우리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모습에 점점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한 아버지가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붙잡고, 몇 시간 동안 가족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뒤로도 서로 간의 간극을 좁히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에게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내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다. 자대에 배치받은 뒤 아버지에게 첫 편지가 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나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잘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장문의 글,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사랑한다"는 말을 보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늘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가슴 깊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군대 기간 틈틈이 아버지는 편지를 보냈고, 면회 와서 군복 입은 내 모습을 보고는 뿌듯해 하셨다. 그제야 아버지께 인정받는 아들이 된 같아 더욱 힘내서 군 생활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보인다
 
▲ 아버지는 인생의 선배요 동반자 아버지가 되어보니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다. 아버지는 인생의 선배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였다.
ⓒ 밥상뉴스

 
시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 당시 나는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넉넉지 않은 상황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소주 한 잔 하자며 동네 포차로 데려갔다. 술이 얼큰히 취한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먼저 대학원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 하면 좋겠다며 어깨 펴고 다니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또 아내를 만나 결혼을 결정했을 때, 종교 문제로 어머니와 자주 부딪쳤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입장도 대변하고 내 마음도 달래주며,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그렇게 삶의 굽이마다 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 빈 아버지의 자리를 그렇게 찾아갔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 후 아버지는 무척 살가운 할아버지가 되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 없는 사람인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손자 손녀들에게 장난도 치고 잘 놀아주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예전에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나도 마흔이 훌쩍 넘어 사춘기를 맞이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예전부터 나는 결혼하면 가족 곁에 있기를 바랐다. 아마도 어릴 때 아버지의 부재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지 않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고스란히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아버지는 얼마나 그립고 외로웠을까. 1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한 가족들이 만나면 어색해만 했으니 마음속으로 많이 서운했으리라. 다시 함께 살던 시절에 이미 멀어진 거리를 좁히고자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을까. 그때는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이 비로소 보였다. 가장의 무게를 잔뜩 짊어지고, 홀로 그 힘든 길을 묵묵하게 걸어오셨다.
 
얼마 전에 아버지께 연락을 드려 좋아하는 초밥을 먹었다. 이제는 살도 많이 빠지시고, 예전에 강인했던 인상은 온데간데없다. 푸근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나에게 직장 생활에 힘든 점은 없는지 물어보시고, 아이들도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셨다. 하긴 코로나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본 지도 가물가물했다.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함께 한 오랜 시간이 서로 간의 거리를 많이 좁혔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되어보니 알겠다. 좋은 것 있으면 아이들 먼저 생각하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 한없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이다. 좀 더 일찍 깨닫고 아버지에게 살갑게 대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나 역시도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짙어진다.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같은 이름으로 삶의 발자취를 걸어온 인생 선배이자 동지였다. 자주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가끔이라도 아버지와 둘이 보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여전히 살가운 아들은 아니지만 언젠가 아버지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버지, 그간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표현은 못 했지만 저에겐 늘 자랑스러운 아버지셨어요. 부족한 아들이라 죄송하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group 낀40대 : http://omn.kr/group/forty
40대가 된 X세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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