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2)러시아 극동, 선언을 넘어 실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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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2.05. 오전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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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요란한 장밋빛 협력 비전 제시에 비해 지금까지 결과는 빈약

1990년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 극동은 ‘한·러 교류의 시금석’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2018년 양국 간 교역의 40%가 극동에서 이뤄졌고, 한국은 극동의 제1위 수출국이자 제2위 수입국으로, 극동 전체 교역량의 3분의 1을 점했다.

러시아 극동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들이 유엔제재로 철수하고 있다./UssurMedia 홈페이지 캡쳐


중국·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일본과 인접한 러시아 극동의 최대강점은 동북아 국가 간 접촉을 필연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한국의 신북방정책, 중국의 일대일로 공히 극동을 교집합으로 삼는다. 또 거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 덕에 극동은 늘 거창한 수사를 동반해왔다. ‘통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미래거점’, ‘21세기 동아시아 자원·식량·교통물류의 전진기지’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극동의 시제가 현재진행이 아니라 미래라는 데 있다.

극동 플랜, 역대 정부 단골 레퍼토리

한국 정부는 그간 극동 관련 나름의 협력 비전을 제시해왔다. 바로 이전 정권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그랬고, 현 정부의 신북방정책과 ‘9-브리지(bridge) 전략’이 그렇다. 하지만 2015년 필자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때, 현지 한국 기업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요란한 팡파르 아래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이 5000만 달러를 들여 2013년 완공한 고압차단기 공장은 기계 한번 돌려보지 못한 채 멈춰 있었고, 대표 영농기업 아그로상생은 농수로 권리를 두고 힘겨운 소송 중이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선언이 독려하는 장밋빛 미래는 오히려 멍에가 된다.

그간 극동을 둘러싸고 나라마다 수많은 계획을 제출했다. 시베리아 천연가스의 보급을 목표로 한 ‘시베리아의 힘’ 프로젝트, 연해주와 동북 3성을 잇는 러·중 해륙복합루트 건설,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잇는 러·일 에너지 브리지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경우, 극동의 가치는 무엇보다 남·북·러 삼각협력을 가능케 한다는 데 놓였다. 북한으로 매개되지 않을 때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과 절연된 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3대 메가 프로젝트인 ‘시베리아횡단철도-한반도종단철도 연결, 남·북·러 가스관과 전력망 연결’은 한국 정부 대대로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평화의 경제적 가치를 역설하는 ‘평화경제’의 대표모델이 그것이다. 그런 만큼 북핵문제와 연동된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그간의 요란한 선언에 비해 결과가 너무 없다. 현재까지 관련 성과는 나진(북)-하산(러) 간 철도 연결 후 시베리아 석탄을 한국으로 3차례 시험 운송한 것이 전부다.

평화경제의 방점은 ‘평화가 경제를 만든다’만이 아니라 ‘경제가 평화를 만든다’에도 놓인다. 경제협력에 우호적인 정치환경을 만들려는 노력과 더불어 경제협력의 성과로 평화를 견인하려는 의지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때그때 정세에, 단기간의 이익에, 정권 교체에 휘둘리지 않는 묵직한 걸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남·북·러 협력의 대표모델인 나진-하산 프로젝트만 보더라도 그렇지 못했다. 이 사업이 개시된 지 이미 20여 년, 그동안 한국은 참여와 보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현재 이 프로젝트가 러시아의 노력으로 대북제재 목록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또 러시아의 요청에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미온적인 입장이다.

경제로 평화를 견인하는 방법에는 한·러 양자협력의 성과로 남·북·러 삼자협력의 현실화를 도모하는 것도 포함된다. 2017년 3차 동방경제포럼에서 천명된 ‘9-브리지 전략’은 이런 관점 아래 한·러 간 협력이라도 서둘러보자는 취지로 제안됐다. 이후 연이어 새로운 계획들이 들려온다. 러시아의 조선 콤플렉스와 삼성중공업의 조인트 벤처 설립, 롯데의 연해주 낙농업 축산단지 건설 합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의 극동 산업단지 건설 계획 등 이번엔 과연 계획을 넘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문제는 30년간 차곡차곡 쌓인 상호불신에 있다. 30년 내내 선언으로 실천을 대신해 온 건 한·러 양자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수익성보다 상징성이, 경제성보다 경제외적 의미가 앞서는 극동 경협의 구조 자체가 부담일 뿐더러, 추위만큼이나 적응이 안 되는 러시아의 경제환경에 자주 골머리를 앓는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통 큰 투자 대신 이를 빌미로 사업이익만을 꾀하려는 한국이 불만이다. 이 불신의 악순환을 극복할 방법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뿐이다. 진부한 결론이지만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를 위해 극동의 사람들, 그들이 공유한 역사와 문화로부터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극동 공유역사, 평화경제 자산으로



러시아 극동은 그 자체 이미 ‘작은 동아시아’다. 특유의 접경성이 허락한 초국가적 접촉의 결과, 이미 오래전부터 남·북·중·일·러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울려 살고 있다. 특히 한국인-고려인-사할린 한인-조선족-북한 노동자로 다원화된 극동 코리안은 극동 속 남·북·중·일·러 간 접속의 역사를 존재 자체로 입증한다. 극동에는 이들이 나눠온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즐비하고, 그만큼 동아시아 이웃 나라에 대한 극동 러시아인의 관심은 러시아인 평균보다 훨씬 높다.

최근 한국에 분 블라디보스토크 관광 붐은 2014년 한·러 비자면제협정 같은 관의 노력, 짠내투어·배틀트립 등 방송 콘텐츠의 선전, 저가항공사의 관광상품 개발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여기에 최재형 생가, 이상설 유허비, 안중근 단지동맹비 등 극동이 허락하는 역사투어의 의미도 더해진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면 황량한 벌판에 기념비 하나 덜렁 놓인 풍경에 당황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다. 그나마 발굴조차 되지 않은 역사도 부지기수다. 최근 충무공의 녹둔도 유적 남·북·러 공동발굴단 발족 같은 소식이 더없이 반가운 이유다.

북한 노동자도 극동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통상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의 절반 정도가 극동에서 일하며, 그 수는 1만 명 정도다. 2017년 12월 22일 통과된 대북제재 결의안은 ‘북한 노동자의 24개월 내 본국송환’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도 2018년 2월부터 송환을 개시해 2019년 12월 22일 이를 완료할 계획임을 밝혔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는 극동개발에 필수적인 존재로, ‘연해주 건설업은 북한 노동자에 달렸다’고 말할 정도다.

북한 노동자 입장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파견지가 러시아다. 1946년 북한 노동자의 러시아 파견이 처음 이뤄진 후 극동에 북한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한, 앞으로도 북한 노동자는 극동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것이다. 이미 단기비자로 노동비자를 대신하는 편법이 성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제재 국면에서 구조화되는 불법은 안 그래도 열악한 환경에 놓인 북한 노동자들을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부터 북한 노동자 문제까지 극동은 정치와 경제가, 가치와 이익이 맞물리는 평화경제의 모델이다. 따라서 극동을 배경으로 동북아가 공유했던 역사·문화·사람의 기억을 지역협력의 원형으로, 평화경제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극동의 ‘동북아 공유역사 박물관’을 계획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남·북·러가 극동에서 공유한 역사의 흔적들, 그 공존과 갈등의 기억들을 연결해 내셔널 히스토리를 뛰어넘는 ‘지역사(regional history) 순례길’로, 문화명소로 가꿔나가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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