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년 다윗이 거대한 장수 골리앗의 머리에 돌을 던져 죽인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카라바조가 살던 시기의 이탈리아에선 이런 성서나 신화, 역사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은 굉장히 좋은 주제 거리였습니다.
이 그림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라는 제목의 바로크 시대 초기 카라바조가 남긴 마지막 작품 중 하나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걸작, 카라바조의 이 마지막 작품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고가 담겨있습니다.
카라바조는 1571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나 화가 수업을 받으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의 역사와 종교적, 신화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여러 그림들은 후대의 여러 유명 화가 루벤스, 렘브란트와 같은 인물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화가로서의 명예로운 명성과는 달리 평소 굉장히 난폭한 성격을 지닌 탓에 가는 곳마다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그의 난폭성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은 당시 법정 기록에 여러 차례 언급될 정도입니다. 명예훼손, 경비원 상해, 경찰에 욕설, 불법 무기 소지, 여인숙 주인집에게 투석, 식당 종언원의 얼굴에 요리를 던진 사건 등 이런 사건들은 그가 성스러운 종교화를 그릴 때도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그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인과 테니스 게임 내기를 하다가, 싸움으로 번져 결국 상대의 하복부를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만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살인죄로 사형이라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대로 지방으로 도주해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방에서 숨어지내며 초조함과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이 사면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의 그림 실력 덕분에 고위 관료와의 인맥이 상당한 편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사면을 주선해 줄 수 있는 추기경에게 그림을 헌정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그는 3개의 작품을 완성해 로마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라섭니다. 하지만 여객선 내의 경찰이 카라바조를 다른 범죄인과 착각해 체포, 구금하게 되었고 카라바조는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됐지만 그의 사면을 위해 가져갔던 그림들은 배에 실린 채 떠나 잃어버리고 맙니다. 덩달아 당시 치명적이었던 병인 말라리아에 감염되고 맙니다. 그는 결국 38세 이른 나이에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자세히 보면 머리 잘린 골리앗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과 상당히 닮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머리 잘린 골리앗의 모델로 사용해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죄를 응징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무게만큼이나 암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그림을 통해 얻은 명성은 죽음 이후에 다시금 명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교황은 카라바조의 직인들과 후원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사면 판결문에 도장을 찍었고 그는 죽음 이후에서야 죄인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