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발로만 승부한다

대주자

야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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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프로야구 경기 중 대주자 권도영의 모습.

야구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각 팀에서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는 10명이다. 아홉 명의 야수와 타자, 그리고 한 명의 투수. 하지만 그 열 명만으로 경기를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선수들의 체력과 집중력이 한결같이 유지되기에는 세 시간 남짓도 긴 시간일 뿐만 아니라, 경기의 흐름에 따라 무언가를 노리고 승부수를 던져야 할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부지런히 빼야 할 선수와 대신 넣어야 할 선수를 고르고, 결국에는 스무 명 안팎의 선수가 경기장을 밟게 된다.

1 팽팽한 승부를 가르는 ‘대주자’

교체멤버의 대부분은 힘이 떨어진 투수와 교대해 마운드에 올라가는 구원투수고,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 투수를 공략할 특명을 받고 타석에 들어서는 대타들이다.

하지만 앞서가고 있는 경기의 한두 점을 지켜내기 위해 대수비를, 혹은 결정적인 한 점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대주자를 투입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만회의 1점을 뽑지 못하면 경기를 내주어야 할 9회 말의 어느 순간에 체중 100kg이 넘는 거구의 거포가 선두타자로 나와 단타를 치고 나가 1루 주자가 되는 순간이 그렇다.

그래서 대주자 요원들이란 구원투수나 대타보다 존재감이 떨어지는 선수들인 경우가 많지만, 경기의 흐름상 팽팽한 승부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에서 이대호를 대신해 대주자로 나선 조동찬이 강정호의 안타를 틈타 홈으로 쇄도, 득점에 성공하는 모습.

2 훌륭한 대주자의 조건

대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빠른 발이다. 공격도, 수비도 필요 없고 오직 누상에서 출발해 발만을 활용해 홈까지 돌아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판단력과 주루센스도 중요하다. 선발멤버를 교체해 내보낸 대주자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견제구에 걸려 횡사하기라도 하면 팀이 받는 충격은 애초에 타자가 고이 삼진으로 물러난 것의 몇 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두 시즌 동안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05경기에 출장한 허브 워싱턴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단거리 스프린터 출신으로 ‘허리케인 허브’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빨랐던 그는 출장했던 105경기 동안 단 한 번도 타석에 서지 않았으며, 오직 대주자로만 기용되어 베이스와 베이스 사이에서 선수 인생을 보내고 마쳤다.

그는 모두 48번 도루를 시도해 31번 성공했다는 기록, 그리고 31번은 홈을 밟아 득점을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물론 그가 두 해 만에 퇴출된 것은 그 기록이 ‘오직 발만으로 승부하는’ 선수로서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74년에는 29번 도루에 성공하는 동안 무려 16번이나 실패했는데, 그만하면 그냥 얌전히 누상에 서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할 만하다.

3 롯데 자이언츠의 서말구

1979년부터 2010년까지 31년간 한국 남자 100미터 기록보유자였던 롯데 자이언트의 서말구<출처: 연합뉴스>

한국에서도 그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4년부터 3년 동안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일하면서 종종 선수로도 등록됐던 서말구가 그 주인공이다.

2010년 6월 7일에 김국영이 10초 23를 기록하기 전까지 30년 이상 100미터 달리기 한국신기록이었던 10초 34의 기록을 세운 장본인인 그를, 롯데 자이언츠는 대주자요원으로도 활용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차례도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아무리 빨라도 투수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찾아내고, 미세한 몸짓으로 야수들을 기만하며, 벼락같이 달리다가 날아오는 공과 야수의 글러브를 피해 급브레이크를 밟아 슬라이딩하며 정확한 지점에 멈추어서는 기술이 없이는 무용지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장기를 살려 선수들의 ‘달리는 근육’을 만드는 트레이너로서의 역할로 팀에 기여했기에, 아마도 ‘허리케인’이라 불렸던 허브 워싱턴보다 훨씬 팀에 대한 기여도가 높았던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발행일2012.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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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식 스포츠 칼럼니스트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글을 써왔다. 2006년부터는 각종 지면에 야구에 관한 에세이와 칼럼을 써왔다. [야구의 추억],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등 야구 관련 도서들도 여러 권 집필했다. 테드 윌리엄스가 지은 [타격의 과학]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