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正祖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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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대왕 동상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팔달산에 있는 정조대왕 동상이다.
출생-사망 1752 ~ 1800
재위기간 1776년 ~ 1800년
가족관계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아버지 장조(莊祖), 어머니 헌경왕후(獻敬王后),

출생과 세손책봉

이름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며 1752년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장조)의 아들로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영조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 헌경왕후)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당시 좌의정이자 외척인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소란스러웠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이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로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과 연대하여 세손에게는 정치적 정적이 되었다. 홍인한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조선 22대 왕위 승계와 정치적 상황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또한 생부인 사도세자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으며 세손 때부터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홍씨(元嬪洪氏)가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壯勇衛), 1791년의 장용영(壯勇營)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皇極編)》을 통해 주자·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조 본문 이미지 1
영조 정조

주요활동과 치적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大誥)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인재(人才)·융정(戎政)·재용(財用)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民隱),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宮)의 공선정례(貢膳定例)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內需司)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암행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應旨)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占風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內帑)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經界)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의금부와 형조 등의 결옥안(決獄案)을 초록하여 매월 말에 보고하게 하고, 4분기마다 책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사형수의 결옥안은 세심하게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힘썼다. 그 심의 기록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자로 전한다.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졌다.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각 지역별 성과를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한성부, 1792)〉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영남, 93)〉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강원도, 1794)〉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제주도, 1795)〉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함흥, 1795)〉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함경 ·평안도, 1800)〉 등으로 각각 간행하여 도과(道科: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慶科)를 통해 다수의 출신(出身)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兵學通, 9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4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하여 보급했다. 융정으로는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海防)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統禦營)과 강화도 경영에 힘썼다. 

재용면에서는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 양곡수를 조사하여 《곡부합록(穀簿合錄)》, 환곡행정의 전국적 현황을 조사하여 《곡총편고(穀總便考)》,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하여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를 각각 편찬하여 재정의 혁신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각 관서간의 급대(給代) 관계의 개선을 통해 각 계층의 부당한 부담들이 경감되는 추세를 보였다.

화성축조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정약용에게 수원성 축성에 필요한 기술서인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짓게하였다.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저술과 간행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御定)·어명(御命)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신저술들이 이루어졌다.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詞苑英華)》, 《시악화성(詩樂和聲)》,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다수,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經書正文)》,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등, 사서로 《송사전(宋史筌:72)》, 《사기영선(史記英選:95)》 등, 유가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 불서로 《범우고(梵宇考)》, 지리서로 《도리총고(道里摠攷)》, 축성서로 《성제도설(城制圖設)》,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續五禮儀)》 등의 저술이 이루어졌다.

선왕 영조 때 한국의 제도문물의 내력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크게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만들고, 1782년에는 역대 선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완하였다. 보감은 세조 때 태조·태종·세종·문종 4조의 것을 편찬한 이후 숙종 때 《선조보감》, 영조 때 《숙묘보감》을 편찬하는 데 그쳐 그 사이에 12조의 보감이 궐문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고 《영조보감》을 새로 만들어 합쳐 1768권으로 완성시켰다.

1784년에는 보감을 종류별로 재편집하여 《갱장록》이라고 하였다.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 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기자·삼국·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삼성사(三聖祠) 제의를 바로하고, 온조왕묘를 숭열전(崇烈殿)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목활자)·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철자) 등 여러 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 자 이상 만들었다. 그러나 재위 중에 활자로 간행을 한 것은 전체 신저술 중 1/3 정도였으며 순조 연간에 어느 정도 간행이 후속되었으나 현재 대부분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근신인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했으며,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日得錄)》으로 편집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입장

1791년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진산(珍山)사건이 발생하여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정학(正學)을 신장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극형은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에만 한정하고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 때 천주교뿐만 아니라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패관소품의 학을 속학(俗學)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함께 보였는데, 재위 초부터 문체가 날로 흐트러지는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본래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 많은 한편, 공격하는 측에 후자의 경향을 띤 자들이 많은 상황을 간파하여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여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795년에 어머니의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이 행사를 기념해 조관(朝官)은 70세 이상, 일반 사서(士庶)는 80세 이상, 80세 전이라도 해로한 자 등에게 1계를 가자(加資)하여 모두 75,145인이 혜택을 보았는데 《인서록(人瑞錄)》이라는 책으로 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남겼다.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으로 남겼다. 재위 10년째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 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사망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