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삶의 맥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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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6.22. 오전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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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청년들의 불안감도 날로 커지고 있다. 취업시장은 완전히 무너졌고, 기업들 역시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 비관적인 전망과 산업계의 격변은 가뜩이나 어려운 청년들의 삶에 더 가혹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위태로운 청년들은 열심히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노력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피폐해져 가는 마음을 돌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청년들의 정신건강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적신호를 나타내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를 보면 2030세대의 공황장애는 2015년 3만1674명에서 2019년 6만1401명으로 93.8% 증가했다. 우울증도 2015년 12만3339명에서 2019년 22만3071명으로 80.8% 늘었고, 조울증은 2015년 2만6915명에서 2019년 3만8825명으로 44.3% 느는 등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정신과 치료 기록이 남을까봐, 심리상담 비용이 부담되어서, 본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두려움에 숨은 청년이 더욱 많다.

청년들의 마음은 왜 점점 힘들어지는 걸까? 기존의 사회적 위기들, 취업난, 일자리 감소, 빠른 은퇴와 같은 사회 변화의 공포는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있었지만 유독 2010년 이후 증가폭이 가파르다. 정신과나 심리 상담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고 접근성이 낮아진 덕에 치료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대할 때 성공과 실패로 분류하는 세태,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정보의 홍수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친구가 내게 MBTI 결과를 물었다. 자신은 이런데 나는 어떨 것 같다는 것이었다. 흥미가 생겨 검색을 해보니, MBTI뿐만 아니라 사람을 유형화하고 규정하는 콘텐츠가 엄청나게 많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정보를 참고만 하라고 얘기하지만, 여유 없는 청년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답안지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형은 아니었는데, 결과를 봤을 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러한 콘텐츠의 유행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려는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정답과 최적화를 요구당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학습하고, 빨리 정답을 찾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공포 앞에서 청년들이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천천히 돌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에서마저 정답을 찾게 된다. 이런 과정은 스스로를 아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도 한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은 이런 정보에 더욱 민감하고 취약하다. 판단은 점점 성급해지고, 기억도 사람도 스스로 판단할 기회 없이 남들이 정의 내린 유형에 끼워 맞춰 오해하고 왜곡한다. 세상에 나와 맞는 사람은 거의 없고, 외로움과 정서적 불안은 가중된다. 정답이 정해진 관계 앞에서 우리의 진심은 뒤틀리고, 고독함만이 남는다. 너무 많은 정보가 독이 된 셈이다. 과연 사람과 관계에 대한 정답을 찾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좋은 일일까?

나는 정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 정보를 계속 접하면서 과거의 인연이나 기억까지 왜곡시켜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호하는 건 중요하지만, 용기를 갖고 선택해온 경험까지 변질시키고 싶진 않았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내가 하나의 정답이 아니듯이, 우리는 각자의 답안지를 자유롭게 채우며 살아가면 된다. 거기엔 성공도 실패도 없다.

누군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게 내버려두지 말자. 불안하고 걱정되어도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삶의 맥락이 있다. 사람은 고유한 나이테를 지닌 나무와 같다.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다면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어렵고 힘들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모두 단단한 뿌리로 스스로 딛고 서 있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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