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아픔의 치유는 의학 너머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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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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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트위터에 게재된 방호복 입은 의료진이 환자와 화투로 그림 맞추기 놀이를 하는 모습. 화제의 주인공은 삼육서울병원 간호사 이수련(29)씨로 확인됐다. 대한간호협회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격리된 90대 할머니와 화투 놀이를 하는 방호복 입은 간호사 사진에 약 1만5,000명이 공감 버튼을 눌렀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트위터에 밝힌 것처럼 "코로나19 시대의 사랑은 '돌봄과 연대'"인 듯하다. 사진의 감동이 컸던 이유는 사진 속 간호사가 의료를 단지 자연과학적 기술로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질병과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코로나19로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 의료를 기술 이상의 문화인류학적 태도로 바라보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은 한국사회가 질병과 죽음을 대하던 낡은 방식에 균열을 내고자 한 책이다. 아픔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의학의 기술적 진보를 강조하는 대신 의료를 제도·문화와 결합해 나타나는 사회 문제로 본 것이다. 2014년부터 활동해 온 '의료인류학연구회' 회원 37명 중 13명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저자들은 의료와 관련된 한국사회의 다양한 아픔의 경험을 인류학적으로 접근했다. 책의 부제도 '한국 사회의 아픔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다.

저자들의 의료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아픔의 삶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산후풍,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난임, 희소 난치성 질환 등이 그렇다.

가령 HIV 감염은 의료화 과정, 즉 질병과 의료와의 관계 속에서 감염인의 불필요한 고통이 추가됐다. 신종 감염병이 확인되면 질병의 반응과 속성을 어떻게 의료 문제로 다룰지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논쟁이 발생한다. HIV 확산 초기인 1980년대 초 미국에서는 이 질환에 '게이 암'이라는 진단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남성 동성애자 집단 내에서 증상 발현이 다수 보고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후 발병 보고가 전 세계적으로 늘면서 인구군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파 가능하다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HIV에 대한 의학적 대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이 질병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응급 상황에서 진료를 거부당하는 등 의료체계 내에서조차 질병 낙인에 따른 비과학적 관행은 여전하다. 질병의 원인을 감염자에게서 찾고 '비정상적' 사람들을 솎아 내면 사회는 다시 안전해질 것으로 믿는 감염병에 대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증 환자의 병원 사망 경로나 조선족 간호사의 돌봄 노동, 세월호 참사 등의 아픔과 관련된 의료 현장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사실 이미 한국 의료 시스템 내부에는 응급실에서 상급 종합병원 병동으로, 다시 호스피스나 중환자실로 이어지는 촘촘하게 짜인 생애 말기의 경로가 있다. 저자들은 이 시스템화된 경로에서 과연 온전한 자기 결정이 가능한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의료 시스템에 짜인 견고한 죽음의 경로 너머에 다양한 출구와 우회로가 생겨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 '학교 가는 길' 중 한 장면. 장애아 엄마가 특수학교 '서진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주민토론회에서 무릎을 끓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환자와 비환자, 오염과 비오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사회가 경계를 구분하려 함으로써 고통이 커지는 아픔의 사례도 존재한다. 저자들은 장애, 성매개감염, 국가유공자, 흡연 등을 해당 사례로 꼽았다.

2016년 강서구의 한 특수학교 건립 과정에서 반대하는 지역주민 앞에 무릎 끓고 호소한 학부모의 모습은 최근 '학교 가는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됐다. 한국사회에서 특수교육을 받는 장애인을 향한 시선이 어떤지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은 병역 등 필요한 순간에는 장애를 증명해야 하지만 일상에서는 장애가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조절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는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다.

저자들이 이처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아픔의 주제를 꺼내 든 이유는 결국 치유와 연대를 호소하기 위해서다. 13명의 필자 각자가 현장에서 만난 아픔의 삶을 공유함으로써 아픔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데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를 바라는 취지다. 최근 출간이 잇따르고 있는 질병 서사 에세이와 더불어 만연해 있는 질병과 아픔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곱씹어보게 하는 책이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제소희 외 지음·후마니타스 발행·352쪽·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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