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朝鮮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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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국왕이 일본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 15세기 초에 조선과 일본은 서로 사절을 파견하는 외교체제가 이루어졌다.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 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자로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사절을 서로 파견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때 조선의 사절을 통신사, 일본의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통신(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해 교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초기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통신사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년) 박분(朴賁)을 정사(正史)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교토(京都)에 있는 막부까지 다녀온 첫 통신사는 1429년(세종 11년)에 박서생(朴瑞生)을 정사로 파견된 사절단이다.

역대 통신사의 파견은 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목적을 달리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의 소요 등에 대한 금지 요청이 위주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강화와 포로의 생환이나 일본 국정의 탐색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1636년(인조 14년)부터는 막부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이때부터 통신사 파견 절차는 대체로 정형화되었다. 즉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 장군의 습직(襲職)이 결정되면, 조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한다.

그러면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중 정사 · 부사 · 서장관(書狀官)을 임명하여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한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해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거기서부터는 쓰시마 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로 쓰시마섬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해 일본 각 번(藩)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서 상륙한다. 여기서 육로로 조선 전기에는 교토까지, 후기에는 더 멀리 도쿄까지 행차한다. 사절단이 지나가는 객사에서는 시문(詩文)과 학술의 필담창화(筆談唱和)라는 특이한 문화교류 행사가 거행되곤 한다.

막부 장군에게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기까지는 대개 6개월~1년이 걸린다. 사절단은 방문하는 곳마다에 서화나 시문 등 작품을, 일본 측은 또 나름대로 환영 병풍이나 판화 같은 작품을 남겨놓았다. 사절단마다 귀국 후 일본 현지 견문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해행총재(海行摠載)』란 견문록 문집으로 엮어져 당시 한 · 일 두 나라간의 외교와 교류의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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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학자, 정수일 교수. 그는 일제 강점기 연변의 가난한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북경대학을 거쳐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중국의 엘리트로 거듭났다. 그러다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북한으로 건너 가 평양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 후 평양대학교를 떠나 10년동안 튀니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지의 대학에서 이슬람을 전공한 교수로 활동해왔다가 1984년 그는 한국인이 아닌 아랍계 외국인의 신분으로 남한에 돌아온다. 그는 아랍계 외국인으로서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국스러운 외모와 완벽한 아랍어 구사로 한국에서 만난 아내조차 그를 아랍인으로 믿고 있었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고,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관계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후 단국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강의 하였고, 많은 저술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하며, 한반도의 고대문명과 아시아와 이슬람간의 문명교류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는 1996년 ‘정수일’이라는 이름의 북한공작원으로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문명교류학’이라는 그의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사형이 선도되기 전, 그는 이미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였지만, 감옥 안에서 그는 자신의 얽혀버린 삶을 반성하듯 더욱 더 연구에 매진하여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연구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정수일은 석방, 이후 2003년 4월 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으며 5월 14일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통하여 자신의 할 일을 학문에 몰두하는 일이라고 다짐한다.“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현대사의 한국이 놓여있던 갈라짐과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던 학자는 사형수로서 독방에서 해왔던 것과 같이 쉼 없이 이슬람과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있다. 어긋난 삶의 복원은 그가 추구하는 학문 속에서, 그 지식이 담긴 글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문명 교류사 연구』, 『이슬람 문명』, 『실크로드 사전』 등이 있으며, 역주서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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